투명하고 가벼운
템플스테이를 다녀왔습니다
조수석에 동생을 태우고 한시간 동안 운전해서
영어로 읽으면 문라이즈 마운틴...이 되는 멋진 산에 있는 오래된 절에서
하룻밤을 자고왔어요
정말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절에 도착해 방을 안내받고, 헐렁한 옷으로 갈아입고 짐을 풀고
서늘한 바닥에 드러눕자
마음이 말랑,하고 가벼워졌습니다
우째 이런일이???
아무것도 안 하고 눕기만 했는데???
지난 몇 년 동안 안팎에서 나를 몹시 괴롭히고 두들겨대던 소음들이
거짓말처럼 뚝 하고 그친 것입니다...
머릿속의 스위치는 당연히 꺼지지 않고
여전히 수만 가지 생각들이 쉬지 않고 점멸하지만
늘 그래왔듯이 뇌수를 찌르고 심장을 조이고 호흡을 막는 대신
그냥 두둥실, 떠올랐다가 흘러갔어요
고통 없는 사고
두렵지 않은 적막
정말로 낯선 느낌이었습니다...
바닥에 대 자로 누운 채로 가볍다... 가볍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어요
짧은 낮잠 후, 스님 한 분이 사찰을 안내해주셨는데
불자가 아닌 나로서는 그저 모든 게 신기했습니다
흐르는 세월에 단청이 다 지워진 수백 년 된 목조 건물과
금칠을 해서 새것처럼 반짝거리는 오래된 불상들
부처님들마다 다 이름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다던데
왜 얼굴은 다 똑같은 건지
누가 말 걸어도 절대 대답 안 해줄 것 같은 기묘하고 평온한 미소...
어쨌든 예수님보다는 훨씬 편하게 앉아 계셔서 마음이 더 나았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저녁 예불이라는 것도 들어가보았습니다
불교도 모르고 한자도 모르는 내가 경험한 예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법당에 들어가 절을 세 번 한다
스님이 뭐라고 중얼거리며 목탁을 친다
스님이 뭐라고 중얼거리며 망치로 종을 친다
스님이 뭐라고 중얼거리며 절을 여러 번 한다
이때 나도 옆을 힐끔거리며 같이 절을 한다
합장으로 인사하고 법당을 나간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예불이 무척 좋았습니다
어둑하고 고요한 법당
종소리, 목탁 소리, 스님의 불경 외는 소리
그리고 생각보다 코어 힘이 좀 필요한 절하기 운동
이런 것들이 합쳐져서
사람의 심리를 상당히 편안하고 안정되게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천년의 노하우를 가진 심리치료 시스템인 셈일까요
손을 모으고 공손히 절하면서
영혼이 깨끗해지는 기분을 잠시 받았습니다
파스칼이 했다는 말도 떠올랐어요
“무릎을 꿇어라. 그러면 믿게 될 것이다.”
예불을 마친 다음에는 주지스님과 차를 마셨습니다
교회를 다닐 적에 만난 목사님들은 대부분 꼰대 할아버지였는데
뭐 스님도 크게 다르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대화는 그럭저럭 재미있었습니다
<대화1>
"제가 전에 심리검사를 받았는데, 항상 긴장하고 경직되어 있다고 하더라구요..."
(뭔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지금도 그래요."
"??!!"
와... 그게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 눈에도 그냥 보이는구나... 비싼 돈 내고 검사받을 필요가 없었네...
<대화2>
"근데 다 가질 순 없어. 야무지다는 말 많이 듣지요? 일 잘 하는 똑순이면서 동시에 마음도 편안하게 풀어져 있고 그럴 수는 없는 거예요."
"...!! 그렇네요."
당연한 소리 같지만 꽤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방에 돌아오자 이제 잘 시간
불을 끄자 방안이 완전한 암흑에 잠겼습니다
휴대폰 대신 캄캄한 천장을 바라보며 잠들었어요
이것 또한 정말 오랜만의 일....
새벽 네 시 반에는 새벽예불이 있습니다
종무원 선생님이 안 와도 된다고 했지만
사실 전부터 새벽예불이 로망(?)이었기 때문에 굳이 들어갔어요
새벽예불 자체보다는 차가운 새벽 공기와
별이 총총했던 밤하늘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어요
이곳에서 정갈하고 투명한 마음으로
별과 꽃과 새들과 함께 천일을 하루처럼 살고 싶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는가보다고(ㅋㅋㅋ)
안 깎았습니다... 안심하세요...
새벽예불을 마치고 짧은 아침잠을 자고
아침을 먹고 절 근처 녹차밭을 산책하고
시원한 오미자차를 한 잔 마시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동생과 함께 일주문을 나설 때 법당에서는 오전예불이 한창이었는데
여전히 한 마디도 못 알아듣지만 그래도 제법 익숙해진 불경 소리를 들으며
가방을 내려놓고 다시 저기 돌아가 절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일상의 중력이 익숙하게 마음을 끌어당기는 게 느껴졌습니다
짐을 풀고, 세탁기를 돌리고,
영겁의 세월 동안 되풀이되었던 인류의 영원한 질문
오늘 저녁 뭐 먹지
를 고민하고...(닭갈비 해먹었습니다)
잠들기 전에는 평소처럼 핸드폰을 쥐고 모로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요가매트를 펴고
108배를 했습니다
절에서 얻은 둥글고 가벼운 마음이 이대로 사라지는 게 아쉬워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들고 싶었어요
그러나 불상도 목탁소리도 없는 방에서 혼자 절하고 있으려니 경건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고
그냥 버피테스트 하는 기분으로, 속으로 숫자만 세면서
착실하게 108번을 채워 절했습니다
별다른 심정의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고
다만 무릎이 좀 아프고 땀이 나서
핸드폰 없이 잠들 수 있었어요
다음주는 개학
학기중에는 피로하고 방학에는 괴로운
그런 마음으로 지내온지 오래되었는데요
이번 방학은 유난히 마음이 좀 처져서
어디 놀러가지도 않고 요양하는 기분으로 보냈는데
그래도 절에서 좋은 휴식을 한 것 같아 참 좋습니다
그립톡 스티커 노트 등등 불교굿즈도 많이 받았어요(놀랍게도 귀엽고 예쁨)
여러분도 시간 있으면 템플스테이 추천합니다
나는 학기중 주말에라도 한 번 더 가려구...
다들 본인 마음 잘 돌보면서 지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