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정 연수, 멋쟁이 토마토, 역사의 천사
별로 의식하지는 않고 지냈지만 사실 지금까지 나는 2급 정교사였다. 올해로서 교육경력 4년차가 되어, 올 여름에는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1급 정교사 자격연수를 받고 있다. 옛날에는 이 1정연수 결과를 향후 승진 점수에 반영하는 바람에 경쟁이 어마어마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점수 대신 P/F 제도로 바뀌어 그런 부담은 거의 없다. 3주 동안 출석만 잘하고 과제만 꼬박꼬박 한다면 누구나 통과할 수 있다.
연수를 듣기 전에 내가 걱정했던 것은 강의가 아주 형편없어서 듣기에 고역이면 어쩌나, 또는 강사가 불쾌한 소리를 지껄여서 대판 싸우게 되면 어쩌나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연수 프로그램은 의외로 제법 알찼고, 강사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강의력도 뛰어났다. (그리고 간식에 성의가 있었다.) 나는 걱정했던 것처럼 책상에 엎드려 자거나 벌떡 일어나 항의하는 대신 차분히 메모하고 집중하면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맛있는 간식을 먹으면서.)
그런데도 연수 내내 가시지 않은 불편한 느낌은 무엇인가? 아마 연수의 흐름이 곧 교육계를 흐르는 권력의 물결과 같아서일 것이다. 교육계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사람들, 강의를 좀 다니고 책을 좀 쓴다는 사람들이 공작새처럼 뽐내며 줄줄이 들어와서 비슷한 얘기를 한다. 에듀테크, AI, 디지털 교과서, 미래교육... 내가 이렇게 멋지고 대단한 수업을 했다고. 무슨 연구회를 꾸리고 무슨 프로젝트를 주도한다고. 여러분도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유튜브/밴드/오픈카톡방에 들어와 도움을 받으라고. 이렇게 늘어난 그의 블로그/유튜브/밴드/오픈카톡방 회원 수는 또 다시 그의 다음 행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의 멋진 수업 아이디어(비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멋졌다)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받아적고 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그리고 이들을 강사로 섭외한 연수원과 교육청이 한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교사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특별해지세요. 커리어를 쌓아서 자본시장에서 우위를 점하세요. 스스로 브랜드가 되어, 포트폴리오가 되어, 상품이 되어 가치를 올려 살아남으세요.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멋진 강의 내용은 진열장의 상품처럼 느껴지고 그들은 자기 자신을 판매하는 세일즈맨처럼 느껴졌다. 아주 실력이 좋은.
좋은 강의를 듣고 이렇게까지 고깝게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 이미 내가 바로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 그래도 연수원에서 만난 몇몇 이들은 내게 이미 구면이었고, 인사하는 나를 보고 동료 연수생 선생님들은 "쌤은 어떻게 이렇게 인맥이 넓어요!"라며 놀라기도 했다. 연구회 두 개에 가입돼 있고, 그중 하나는 내가 회장이고, 이런저런 강의나 자문회의를 다니고, 칼럼을 쓰고, 자료를 만들어 온라인에 공유하고... 전부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다. 내 관심사는 에듀테크가 아니라 5.18과 계기교육 쪽이니 주제는 다르지만 자기경영-자기착취적인 모습은 같다. 강사들이 나에게 말한다. 지금처럼 살면 너도 나중에 우리처럼 될 수 있어. 내가 대답한다. 싫어요.

여름 내내 들은 말들. 학생주도성, 인공지능, 미래 융합 창의 영재 혁신 어쩌고저쩌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교육을 좋아하는지는 아주 잘 알겠다. 실제로 내 눈에도 제법 좋아 보이기도 한다. (정말로 저렇게 될 수만 있다면야!) 그런데 나는 밝은 미래로 나아가는 데 도무지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진보? 성장?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만 갔더니 무엇이 나왔나... 40도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날씨와 쓰레기 사막이 된 지구뿐이다. 어쩌면 미래교육은 기후 지옥에서의 생존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기후 취약계층이 길에 쓰러져 죽어가는 동안 교실에서는 탄소를 더 배출하면서 3+2=5를 AI 디지털교과서에 입력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나는 멈춰 서 있는 데 관심이 있다. 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데 관심이 있다. 혁신을 향한 망설임 없는 발걸음... 그 뒤에 차마 놓고 갈 수 없는 사람들, 두고 갈 수 없는 기억들에 관심이 있다. 멋진 건물을 새로 짓고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보다, 부서진 옛 건물의 잔해 앞에서 울고 있는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이번 1정연수에서는 유대인 교육의 훌륭함에 대한 언급이 꽤 자주 나왔다. 팔레스타인 학교, 병원, 대피소에 폭탄을 퍼붓는 이들의 훌륭함)

2022 개정교육과정이 약속하는 장밋빛 전망 속에서, 어떤 아이들은 정말로 AI와 혁신기술을 활용해 자기주도성을 발휘하여 이런저런 역량을 갖춘 미래 인재로 성장할 것이다. 그리하여 고위 공무원이나 유명 스타트업의 CEO 같은 사람이 되어 또 다른 젊은이들에게 자기계발과 성장을 설파할 것이다. 거기에는 별 불만이 없다.(그러나 그때도 과연 젊은이들이 존재할 것인가?) 그러나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마음이 간다. 단원평가에서 20점을 맞는 아이들. 수업이 끝나도 갈 곳이 없어 학교에 죽치고 있는 아이들. 계단에 앉아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다가 나를 보면 배시시 웃는 그 얼굴들.
내일이 연수 마지막 날이고 나는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에 맞춰 변화하는 학교 현장과 구성원의 모습'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해야 한다. 내 발표에 우리 팀원 선생님들의 점수도 같이 달려 있으니 (P/F라서 큰 의미는 없지만) 열심히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만큼은 밝혀 두고 싶다. 수백억 짜리 에듀테크 산업이 어디로 가든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한 손에는 종이와 연필, 나머지 한 손은 비워 두고, 아이들과 함께 기꺼이 뒷걸음질을 치며 허송세월을 누리겠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