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얘기

최근에 읽은 책 정리

slowglow01 2024. 8. 25. 23:05

 

R. 태가트 머피 <일본의 굴레>
어제까지 3박 4일로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곧 자세히 쓸 것이다. 아무튼 여행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거기서 읽을 책을 고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이 좋았는데, 마침 알라딘에서 글항아리 출판사의 전자책 대여 특가할인 이벤트를 하고 있어서 600쪽이 넘는 두껍고 비싼 책을 저렴하게 읽을 수 있었다. 글항아리 출판사는 뭔가 두껍고 의미 있고 좋은 책을 꾸준히 만든다는 이미지가 있음... 호감이 가는 출판사😋

사실 나는 일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최근에는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2016)'와 호시노 겐에게 입덕하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일본 문화에 탐닉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드와 미애니를 좋아함)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에 대해 거의 처음부터 알아갈 수 있었다. 

겐짱... 유이짱... 행복하세요 ㅠㅠㅠ

저자는 40년 이상 일본에 거주한 미국인이고 이 책 역시 영미권 독자들에게 일본을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쓰였는데, 비슷한 종류의 다른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서술의 폭과 깊이 그리고 관점 모두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했음... 일본의 역사,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현재의 국제정세와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 다루고 있는데 각 분야의 설명들이 일본이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서로를 참조하고 있다. 설명이 너무 자세한 나머지 경제와 정치 부분은 읽기 좀 괴로웠으나^^... 덕분에 책 한 권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눈에 꿰뚫어보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보면 여기가 바로 일본! 이라는 점이 너무 좋았음ㅋㅋㅋ 왜요? 제가 책 읽으려고 여행 가는 사람처럼 보이나요?

저자는 일본 국민 특유의 정서를 '피해자 의식'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그 한 마디로 내가 지금까지 접했던 모든 일본 미디어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모든 게 설명되어서 너무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일본을 욕하는 책은 아니고 그런 의식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역사 정치 문화 등등에서 설명하는데 그 서사가 몹시 충실하고 설득력이 있음. 전반적으로 저자의 태도가 '난 일본이 좋아...! 그치만 그건 아냐!! 하지만 일본은 정말 사랑스러운 나라야! 하지만 너무 지긋지긋한 문제가 많아! 일본이 잘됐으면 좋겠어! 하지만 지금처럼 하면 안돼!' 이런 느낌임ㅋㅋㅋ 읽으면서 누군가 한국에 대해서도 이 정도의 통찰력과 애정을 가지고 분석해준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있나요? 그렇다면 추천을 부탁..


아무튼 3박 4일간의 여행 중에 공항에서, 지하철에서, 숙소에서 붕 뜨는 시간을 멋지게 정리해준 고마운 책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내가 언제 또 이런 벽돌책을 완독하나 싶고, 다음에 또 두꺼운 책 읽으러 여행 가고 싶다...


박규태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일본 - 소녀와 마녀 사이>
이것은 여행 직전에, 다른 일로 서울에 가는 중에 기차에서 읽은 책이다. 살림지식총서에서 나온 95쪽짜리 아주 작고 얇은 책이고, 대학생 때 중고서점에서 아마 3천원인가에 샀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사기만 하고 읽지는 않고 꽂아만 두었는데, 기차에 들고 탈 가벼운 책을 찾다가 이 책이 눈에 딱 들어왔다. 그때 느꼈던 기쁨!! 그래! 책은 일단 사놓기만 하면 언젠가 딱 그 책이 필요할 일이 생기는 거야! 역시 내 선택은 탁월해! 라고 자화자찬하며 기차에서 즐겁게 읽었다. (사놓고 안 읽고 있는... 점점 늘어나서 이제 정말 둘 곳이 없는 수십 권의 책을 외면하며...)

이 책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 특히 '원령공주(1997)'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을 중심으로 하야오의 작품세계와 일본 문화를 탐색한다. 아까 말했지만 난 지브리 덕후라서 일단 그냥 읽으면서 너무너무 재미있었다...ㅠㅠ 그리고 이 책이 나온 뒤에 개봉한 '벼랑 위의 포뇨(2008)', '바람이 분다(201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 등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더 재미있음. 으아아 쓰다 보니 또 지브리 애니메이션 정주행하고 싶어졌어.




최호근 <기념의 미래>

이 책은 1정연수에서 사회 수업에 대해 강의하신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선생님에 대한 신뢰와 1정연수에 대한 만족도까지 함께 상승했다.ㅋㅋㅋ 정말 좋은 책임ㅠㅠ
여기에도 맨날 하는 얘기지만 나는 책 제목에 '기억', '애도', '기념', '공간' 같은 말이 있으면 일단 무조건 읽어본다. 끔찍한 일,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이미 일어났고, 죽은 자는 말이 없을 때, 남은 이들은 이 과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 질문이 거의 10년째 나를 사로잡고 있다. 5.18 교육을 하기 시작하며 그 고민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어졌다. 일단 나부터 이 비극을 소화를 못했는데 그걸 수업해야 된대... 그것도 초등학생들한테...(패닉) 올해 읽었던 <기억·서사(오카 마리)>는 정말 좋은 책이었는데 현장 학교에서 수업하는 나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책의 잘못은 아님)

어떤 사건에 대한 '기억'과 '애도', 그리고 '기념'은 비슷한 것처럼 들리고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 의미기 겹치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후자는 보통 전자가 이루어진 뒤에 따라오지만, 동시에 전자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내가 관심 가졌던 주제는 보통 전자였는데, 이 책은 (표지의 문구가 설명하듯이) 후자에 초점을 맞추며 세계의 기념문화를 분석하고 한국의 기념문화에 진단을 내린다.

광주 5.18 민주묘지


책의 전반부는 4.3, 5.18 등 한국의 기념문화 실태를 분석하면서 시작된다. 그동안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명쾌하게 설명해주어서 속이 너무 시원했지만, 냉정하게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한 부분은 칭찬하고 맥락을 섬세하게 읽어주는 것이 좋았다. (난 이제 지식보다도 애정이 있는 책이 좋다...)

후반부는 전세계의 다양한 기념관을 소개하면서 각 전시의 내러티브와 특징,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을 알아본다. 자문회의에 몇 번 나가본 입장에서 좀 뜨끔하게 되는 내용이 있었고...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전시를 특히 더 공들여 설명한 점이 특히 유용했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대안 제시가 아주 구체적이고 열정적으로 제시된다는 데 있다. 따로 메모해두고 앞으로 참고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만큼 저자가 한국의 기념문화와 역사교육에 진심이라는 점이 느껴져서 더 좋았음(나는 정말 애정이 있는 책이 좋다ㅠㅠ)
배성호 선생님... 듣고 계신가요? 선생님의 추천 책 잘 읽었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 <구토>
1정연수 강의실에서 이 책을 읽는 중에 옆자리 선생님이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었다. 그럼 그냥 구토라는 제목의 소설책이라고 대답하면 되는데 어쩐지 대답을 못했다. 민망해서... 갓-일반인들처럼 회귀하고 환생하는 로맨스판타지 무협 웹소설 같은 게 아니라 프랑스 현대철학... 실존주의... 장 폴 사르트르... 를 좋아한다는 게 왠지 너무 창피해서 대답을 못하고 "재...재미 없써요..." 하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상대는 별로 신경도 안 쓸 텐데!

아무래도 철학이라는 이름에 너무 무거운 아우라가 붙어 있는 게 민망함의 원인인 것 같다. 나도 좋아하고 나서 깨달은 건데 철학은 사실 심오한 진리나 우주의 비밀과 별로 상관이 없고(그렇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도 있지만), 인생을 의미 있게 잘 사는 것과도 별로 상관이 없다(상관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다른 취미랑 비슷한 정도로 상관 있는 듯). 철학은 그보다는 좀 어려운 용어를 많이 쓰는 사유 놀이에 가깝다. 철학의 이점은 대단히 깊이 있는 식견을 갖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그냥 재미있다는 것이다. 로맨스판타지 무협 웹소설과 마찬가지로.

철학 밈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역시 실존주의의 고전이라는 무거운 수식어에 싸여 있지만 사실 그냥 흥미롭고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사랑스럽기까지 한 책이다. 물론 소설적 재미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그저 앙투안 로캉탱이라는 남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구토'를 느끼기만 하는데, 그 구토라는 게 무엇인지도 사실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어떤 부분에는 깊이 공감을 했고, 어떤 부분은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고 느꼈고, 어떤 부분은 심지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쉽게 마음을 열고 친구라고 느끼는 사람들(나의 실제 지인이든 예술작품의 창작자든)의 공통점은 삶의 순간들을 매끄럽게 넘어가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며, '구토'를 느끼는 사람들이라는 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토하지 않는 자,,, 실존에 대해 논하지 말라,,,



매기 넬슨 <아르고호의 선원들>
어떤 책을 읽고 나서 저자가 '글을 잘 쓴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글을 잘 쓴다는 말은 내게는 몹시 이상하고 공허하게 들리는 말이다. 책의 주제, 내용, 형식,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지(결국 그것들을 잘 조직하는 것이 글을 잘 쓴다는 것이다) 저자가 글을 잘 쓰고 말고는 뭐... 그게 의미가 있는 감상인가? 고흐에게 그림을 참 잘 그리시네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음... 220쪽짜리 책인데 펼쳐보면 일단 차례가 없다. 냅다 '2007년 10월' 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그대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장(章) 구분 따위 없이 텍스트가 줄줄이 이어진다. 그러는 동안 과장 없이 수백 개의 다른 텍스트들이 직간접적으로 인용되고, 그 텍스트들은 일반적인 독자에게는 조금 낯설거나 어렵거나 또는 둘 다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런데 읽는 내내 전혀 걸림이나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이 매끄럽고 자연스러움... 이럴 수가 있나... 어느 순간부터는 책이 아니라 무림고수의 무공...? 진기명기...? 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진짜 개 쩐 다.... 그리고 이러한 단절이나 구획 없는 '흐르는 글쓰기'가 글의 주제와 완벽하게 조응하니, 네 이분은 글쓰기의 왕이십니다 라고 할 수밖에.

나는... 한페이지짜리 글도 흐름을 못 잡고 뜬금없는 짤이나 중간에 끼우는데...


한두 개의 키워드로 쉽게 요약할 수 없는 멋지고 흥미진진한 책이라서 뒷표지의 소개 문구를 빌려왔다. '쾌락과 돌봄, 퀴어와 가족, 래디컬과 순응의 관계를 흩뜨리며 나와 우리를 다시 또 잇는 무한한 되어 감의 노래'. 나는 이 무한한 되어 감이 참 좋았고, 특히 이 책이 '말하기'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끝내 말하기를 변호하는 방식이 좋았다. 그런데 하필 이 책을 읽던 중에 연수에서 혐오발언을 ^_^ 들어버려서... 책 안과 밖의 온도차에 그만 아찔해져 버리고 말았다... 흑 흑 흑...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어떤 책들은 읽으면서 감동을 받다 못해 당장 이 책을 쓴 사람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저자가 어느 대학의 교수인지 책날개를 다시 펼쳐보게 한다. 근데 사라 아메드는 교수가 아니었음. '학내 성적 괴롭힘 문제에 미온적으로 대처한 학교에 항의하며 교수직을 사임'했기 때문에... 젠장! 더 멋있잖아!!ㅠㅠ 영어도 못하고 학위도 없지만 당장 나를 제자로 받아줘라!

아무튼 이 책은 진짜 멋진 책이고 여러분 모두 한번쯤 읽어보길 바람. 두꺼운 책이고 아주 쉽지는 않다. (근데 이 글에서 소개한 책은 사실 전부 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감정과 정치에 대해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것. 이 책을 읽고 이어서 이태원 참사와 정동을 다룬 <달라붙는 감정들(김관욱 외)>을 읽으면 더 좋다. 나는 거꾸로 순서로 읽긴 했지만. 근데 읽은 지 시간이 좀 지나서 내용이 잘 기억이 안 난다. 다시 읽어봐야지.



여기까지 최근에 읽은 책 몇 권 간단하게 정리... 올해는 작년보다 책을 훨씬 많이 읽고 있다. 37권?? 왜 이렇게 많이 읽었지... 이제 개학을 하니 책은 잠시 내려놓고 현생을 살아야 한다. 보고 싶은 우리 삐죽이 4학년 꼬맹이들. 못하면 도와주고 울면 달래주고 넘어지면 일으켜주러 가야지. 너희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 모든 이론을 쌓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