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얘기

2024 연말정산 영화/공연편

slowglow01 2024. 11. 29. 21:35

잘쓰려고 하면 영원히 완성 못할 것 같아서 그냥 아무말이나 하기로 했다. 2024년 문화예술 연말정산 영화편~~~

리지 Lizzie 
뮤지컬 관람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리지는 확실히 뭔가... 뭔가... 아주 특별한 작품이었다. 일단 막이 올라가면 단정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 넷이서 머리를 맞대고 "아빠한테... 도끼로 마흔 번... 엄마한테는 한 번 더...." 이런 노래를 하면서 음산하게 킬킬킬 웃고 있다. 그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스탠딩마이크(?)를 들고 댄스(??)를 추며 락 발성으로 신나게 노래를 함... 1892년 배경이라며? 그런데 일렉기타와 드럼이 있다는 설정인 거야? 1분 정도 들으면서 대충 적응하고 나면 "씨발 졸라 부자야 미스터 보든" 하는 가사가 완벽한 발성으로 귀에 꽂힌다. 몹시 당황했고... 개좋았다...

뮤지컬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장르다. 뮤지컬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멀쩡하게 말하고 있다가 갑자기 노래하고 춤추는 게 어색하다"라고 하는데, 나는 바로 그 이유로 뮤지컬이 좋다. 그렇다. 멀쩡한 사람들은 뜬금없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뮤지컬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이상한 사람들이다. 이상한 사람들의 노래에 반주를 깔아주고 가끔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군무를 춰주기도 하는 뮤지컬 속 세상도 이상한 세상이다. 그리고 어떤 진실은 오직 이상함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특히 '말할 수 없는' 이들의 노래와 춤은 말(로고스)의 대체재나 우회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진실을 담지하고 있는 행위이다... 너무 어렵게 말했나. 암튼 난 이상하기 때문에 뮤지컬을 좋아한다.

그리고 리지는 그중에서도 특히 이상한 뮤지컬이다... 고통과 억압으로 미쳐버린 19세기 미국 여자들에게 스탠딩마이크와 도끼를 쥐여주면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욕설! 헤드뱅잉! 동성애! 협박! 거짓말! 도끼 살인! 제4의 벽 부수기! 시대적 배경을 무시한 의상 체인지! 아무튼 감옥에 안 갔으니까 됐다는 해피엔딩! 솔직히 말하면 공연 내내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같은 느낌으로 조금 얼어 있다가 커튼콜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열광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길고 열정적인 커튼콜도 처음 봤다) 지금은 매일매일 리지 사운드트랙을 듣고 영상을 돌려 보면서 내가 서울 사람이 아니라 2차 3차를 뛸 수 없다는 걸 슬퍼하고 있다. 내 최애 넘버는 스윗 리틀 시스터Sweet Little Sister. 중간에 리지가 "학.학.학.학.학.학." 하고 숨쉬는 부분을 똑같이 따라하는 게 핵심이다.

https://youtu.be/0DFfde5JIn4?si=-Z6fc_6Qyzh1Zxjw

이봄소리 리지 짱ㅠㅠㅠㅠㅠ


위키드 Wicked 2024

피투성이 뮤지컬 리지에 한참 빠져 있다가, 꿈과 사랑이 넘치는 뮤지컬이 그리워져서 최근 개봉한 영화판 위키드를 보러 갔다. 줄거리는 전혀 모르는 채로, 오즈의 마법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과 아리아나 그란데가 나온다는 것만 알고 감. 대충 유명한 뮤지컬이고 돈을 많이 쓴 실사화니까 샤랑샤랑 예쁘겠지? 생각했는데 첫 넘버부터 나쁜 초록마녀가 죽었다는 거임... 잘 죽었다고 모두가 기뻐하는데 착한 분홍마녀만 표정이 조금 착잡한 거임... 그때부터 너무 당황스러웠다. 죽은 여자와 남겨진 여자... 이런 소재라고? 물론 내가 미치고 환장하는 소재긴 한데 그래도 대자본 메이저 작품인데 이래도 되나? 역시 뮤지컬은 아무리 메이저해도 정말정말 이상한 장르다...

그 다음부터는 딱 내가 기대했던 샤랑샤랑 아름답고 신나는 장면들이 가득하다. 아니 기대 이상이다. 너무 좋은데! 내 머릿속 한편에는 초록마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분홍마녀의 이후 삶이 어떻게 되었을지... 이런 어두컴컴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문제는 이 영화는 뮤지컬의 1막에 불과하고(2시간 41분짜리인데도! 그런데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더 놀랍다) 나는 2막의 줄거리를 모른다는 거다. 속편 나올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흑흑 더빙판으로 한번 더 봐야지...

https://youtu.be/4jChCNvhQfA?si=BvtULLP_ZpFiGNFF

아리아나 그란데와 신시아 에리보는 신이에요

노팅 힐 Notting Hill 1999
왠지 지금 사람들에게는 아름답고 감성적인 로맨스 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게는 그냥 되게 웃긴 영화였다. 웃기고 귀여움ㅋㅋㅋ 그리고 나 웬만해서 영화 볼 때 남자 배우한테는 별로 신경 안 쓰는데 20년 전 휴 그랜트는 진짜 전설이다... 내가 진짜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남자 배우가 딱 두 명 있는데 바로 20년 전 박해일과 20년 전 휴 그랜트다. 여러분, 남아있는 나날(1993) 보세요. 두 번 보세요.

파니 핑크 Keiner liebt mich 1994
너무 좋음ㅠㅠㅠㅠ 취향저격 최고의 영화 파니핑크 사랑해 파니핑크 울지마

빅토리 2024
비슷비슷한 한국영화의 하나로 묻힐 뻔하다가, 주연을 맡은 이혜리 배우의 열정적인 홍보로 입소문을 탄 영화. 근데 검색해보니 그래도 손익분기점은 못 넘었다고 한다.ㅠㅠㅠ 이 영화를 외면한 한국 관객들은 언젠가 반드시 그 업보를 받을 것이다.

사실 포스터만 보면 그냥 밝고 귀엽고 재미있는 영화처럼 보인다. 중간에 슬픈 장면 한번 있을 거고, 한번 싸웠다가 다시 뭉칠 거고, 하이라이트는 치어리딩 씬일 거고... 안 봐도 벌써 본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빅토리는 정말로 밝고 귀엽고 재미있는 영화다. 이게 뭐가 문제지? 밝고 귀엽고 재미있다는 것은 아주 귀중한 덕목이고 지금보다 더 대우 받아야 한다! 난 세상에서 밝고 귀엽고 재미있는 게 제일 좋다!! 그러나 빅토리의 진짜 대단한 점은 그렇게 가볍고 산뜻한 어조로 결코 가볍지 않은, 중요한 이야기를 던진다는 것이다. 빅토리가 그리는, 필선이가 살고 있는 1999년은 축구부와 치어리딩부, 아들과 딸, 원청과 하청, 서울과 거제라는 권력관계가 겹겹이 중첩된 세계다. 영화는 이 모든 맥락을 사려 깊게 짚으면서 언제나 주변화되었던 '응원'이라는 행위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해 낸다. 저마다 다른 목소리와 개성을 가진 소녀들의 청춘과 우정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하이라이트에는 천년 센터 이혜리의 개쩌는 치어리딩 씬이 있다. 뭐 왜 뭐.

아주 좋은 의미에서 기대에 부합하고,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의미에서 예상을 빗나가는 이야기. OTT에 올라오면 꼭 보세요. 밀레니얼 걸즈 포레버~~~


익스트림 페스티벌 2023
너무 웃김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지역축제 좋아하는 분들은 꼭 보세요 꼭꼭꼭
나 이제 김재화 배우 얼굴만 봐도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인사이드 아웃 2 Inside Out 2 2023
솔직 고백. 나 사실 인사이드 아웃 1에서 빙봉 죽을 때 안 울었다. 별로 슬프지도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선 쫌 울었지만 남들처럼 막 인생 영화로 꼽는다든지 하지도 않는다.
이번 2편도... 재미있게 봤고 감동적인 부분도 있긴 했는데 그렇게까지 마음에 와닿지는 않은 듯. 슬픔이가 귀여웠고.ㅋㅋㅋ 다만 그런 생각은 했다. 내가 어떤 마음의 골짜기에서 구르고 있을 때도, 어쩌면 내 마음속의 작은 기쁨이는 나를 위해 열심히 애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친구를 위해 힘내야겠다고.
(근데 좀더 애써줘... 노력은 가상한데 효과는 그닥이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이 영화에 대해 뭔가 말할 수 있으려면 일단 한 번 더 봐야 할 것 같다. 좋았냐고요? 당근빠따죠 조이야 사랑해~~!!!

유령과 뮈어 부인 The Ghost and Mrs. Muir 1947
생각해보니 올해는 옛날 영화를 거의 못 봤구나. 연초에 본 이 영화가 유일하다. 영화평론가 듀나가 죽기 전에 보고 싶은 영화로 이 영화를 꼽았는데(확실하지 않음) 왜 그런지 알 것 같고. 옛날 영화를 볼 때는 공감이나 개연성 같은 것은 조금 양보하는데(?) 이 영화는 의외로 현대 기준에도 진짜 충실한 로맨스코미디다. 진짜로 설레고 가슴 미어지고 무엇보다 진 티어니의 드레스 핏이 죽임. 이런 말 해서 미안해요


길 위에 김대중 2024
목포에서 시작해 광주에서 끝나는 영화. 중간중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고 영화가 끝나자 누군가 박수를 쳤다.
아... 교실에 김대중 평전도 있는데. 그것도 읽어야 하는데.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Jeux D'Enfants 2003
너무너무 좋음 최고의 로맨스영화...ㅠㅠ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파니 핑크도 그렇고 이런 정신나간 로맨스 영화는 역시 유럽이 잘 만드는 듯. 미국놈들은 사랑을 모른다.

첫 키스만 50번째 50 First Dates 2004
가볍고 재밌는 영화가 필요해!! 하고 틀었던 영화. 진짜로 가볍고 재밌어서 만족도 100%였는데 어째 곱씹어 볼수록 뒷맛이 찝찝했다. 이 영화가 드류 베리모어의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그냥 영화계가 드류 베리모어를 다루는 모든 방식들이... 휴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산타클라리타 다이어트>를 봐야 한다. 드류 베리모어가 사람을 잡아먹어요♥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아니 나 지금... 맘이 아픔... 포스터 사진 올리려고 제목을 구글링했을 뿐인데... 영화의 모든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가슴이 막 미어짐... 글도 못쓰겠음... 이 미친 영화가 나한테 무슨짓을 한거야 ㅠㅠㅠ


이것들 말고도 몇 편 더 봤는데(명탐정 코난 극장판이라든지... 베테랑2라든지...ㅋㅋㅋ) 일단 한 마디라도 하고 싶은 것들만 정리를 해보았다. 영화/공연편이라고 써놓고 리지 말고는 다 영화라서 민망하군. 내일 연극 <테베랜드>를 보러 가니까 기운이 있으면 뒤에다 추가해보겠다... 내년에도 즐거운 문화생활 합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