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연말정산 도서편 (1)
백 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1967)
무시무시한 가계도가 나오는 책ㅋㅋㅋㅋㅋ 올해 초에 읽었으니까 기억이 안 날 법도 한데 많은 부분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책과도 닮지 않은 별난 이야기인데, 읽고 있으면 그 모든 것이 (사람이 이백 년 넘게 살고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태어나는 그런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마땅한 일처럼, 심지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현실 세계가 이상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니까 흔히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것이 내게는 그냥 리얼리즘처럼 느껴졌다는 뜻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한 말 중에 사람은 "실재를 회피하기 위해 현실 속으로 깨어난다"는 말이 있다. 언제나 진실은 꿈속에 있고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현실이라는 허구로 도망친다. 마꼰도는 실존하고 부엔디아 가족들은 정말 살았던 사람들이다. 바나나 학살 사건도 실제로 일어났다. '마술적'인 것은 2024년과 지금 여기의 우리들이다.
킨 (옥타비아 버틀러, 1979)
리얼 고전 명작 SF 호러... 눈 깜빡이는 것도 까먹고 읽게 됨. 노예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우리는 지금도 모르고 앞으로도 영원히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그 숨막히는 삶을 잠깐 알 것 같아진다. 권력구조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개인이나 이성 같은 것은 그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처절하게 느꼈다. 요즘은 시장에 비슷한 타임리프물이 발에 채일 만큼 많은데 이거 한 번 읽고 나면 아류작들은 다 밍밍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눈 떴더니 이세계' 류의 소설들... 세상은 우리를 위해 짜인 안락한 세트장이 아니라는 걸.
9번의 일(김혜진, 2019)
가수 하림 씨의 노래 중 '우사일'이라는 곡이 있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 운이 좋아서 몇 번 라이브로도 들었다. 들으면서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나는 사실 일하면서 죽을 위험이 높지도 않고 '저녁엔 집에서 쉬고 휴일에는 여행도 가는' 화이트칼라 노동자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근데 교사가 화이트칼라인가? 일단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이제는 안다. 칼라 색깔이 중요한 게 아니고... '9번의 일', 나의 일, 내가 밀어내는 누군가의 일,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의 일, 이것은 일이 아니라는 말을 듣는 그런 일...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고 - 사람 아닌 것으로 만드는 일. '우사일'은 아주 단순하고 느린 멜로디로, 따라 부르기 쉽도록 만들어졌다. 따라 부르자.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똑 같 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기억의 공간에서 너를 그린다(세월호 참사 10주기 위원회, 2024)
직업 작가는 아니지만 글을 쓰다 보면 민망한 일이 종종 생기는데, 처음 보는 분들이 너무나 간곡한 표정으로 '글을 참 잘 읽고 있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좋은 글이에요, 멋진 분이에요, 이런 말을 들으면 상투적 표현이지만 정말 쥐구멍으로 들어가 사라지고 싶다. 내가 살아 봐서 아는데(?) 글은 글쓴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오직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고, 내가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은 몇 건의 업무 연락을 비타500 젤리와 함께 씹으며 키보드를 두들기는 것뿐이다... 가끔 내가 쓴 글을 읽으며 아니 이렇게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진짜로 나라면 정말 좋겠네, 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는 진짜가 담겨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물리적 공간을 지키면서, 실제로 기억을 수행한 사람들의 이야기. 안산 세월호 단원교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기차에서 울면서 읽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아름다워서. 그 공간이, 그 공간을 만들고 지키기로 정말로 다짐한 사람들이.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1951)
난 내가 이 책을 평생 안 읽을 줄 알았고, 읽더라도 절대 좋아하지 않을 줄 알았다. 이 책을 둘러싸고 있는 명성들, 그러니까 '소년, 청춘, 방황' 이런 키워드들에서 벌써 진부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자기가 아직도 소년이라고 믿는, 사실 소년 시절에도 그렇게 소년이었을 것 같지 않은 배 불룩한 중년 남성들의 그 자기연민과 오만함... 안 읽었는데도 벌써 다 알 것 같은 그런 기분으로, 순전히 독서모임 때문에 책을 폈다가 좀 놀랐다. 놀란 점 하나. 나는 이걸 읽으면서 심지어 좀 울컥하기까지 했다. 둘.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좋게 본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책을 읽고 나자 이 책이 '소년, 청춘, 방황' 같은 키워드로 팔린다는 사실, 게다가 수많은 남성들에게 열광받았다는 사실이 더욱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니 홀든은 반항아가 아니야... 맞고만 다니는 애가 무슨 반항을 한다고... 홀든은 비트의 정우성이 아니고... 그냥 좀 찌질하고 보드라운 마음을 가진 아이고... 마음에 사랑이 좀 많고... 그래서 아픈 세상을 딴에는 열심히 살아보면서 계속 상처받고 사랑을 주려는 그런 애인데. 그런 아이에게 전세계 남자들이 열광을 했다니. 그런데 세상은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진짜로 사람들이 콜필드에게 공감한다면 뭐 기성 체제에 저항하고 멋있는 말 하고 그러는 게 아니라 센트럴파크 공원의 오리들을 걱정하고 있어야 한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찬 겨울의 오리들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는데 여기서 그 이름을 말하는 것도 윤리적이지 않은 것 같으니 그만두자.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질베르 아슈카르, 2024), 가자란 무엇인가(오카 마리, 2024)
급하게 나온 작은 책들. 계속 눈을 뜨고 있자는 의미에서 샀다. 책을 사는 것도 행동이 될 수 있을까? 되겠냐. 그래도 눈은 뜨고 있으려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충실한 목격자가 될 것이다.
삼체(류츠신, 2008)
이게 대륙의 기상이냐며ㅋㅋㅋㅋㅋㅋ 연휴 내내 입을 딱 벌리고 읽었다. 진짜 진짜 재밌음 최고의 스케일ㅋㅋㅋㅋ sf를 좋아하다보면 수천 년, 수만 광년 같은 단위에도 무덤덤해지게 되는데 삼체는 내가 읽은 그 모든 sf보다도 멀리까지 가는 소설이다. 3권 후반부에서는 '아니 작가 진심이냐;;;?'라고까지 생각했음. 1부 2부 3부 분위기 다 다른 것도 너무 좋고 나는 그래도 1부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3부에서 청신과 위톈밍의 (스포) 결말이 너무너무 충격이었다.... 진심 내가 읽은 어떤 결말보다 더 '이게 뭐야' 싶어지는 억장 와르르 결말... 얼마나 충격받았으면 꿈에도 나옴. 청신아!! 행복해라!!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단요, 2023)
기억에 남는 한국 sf는 이 책. 천선란의 <어떤 물질의 사랑>도 읽었는데 그건 영 별로였고...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는 어느 날 사람들의 머리 위에 '운명의 수레바퀴'가 등장한 이후의 미래를 페이크 다큐처럼 그린 책으로, 뚜렷한 줄거리를 따라가는 대신 선행과 악행, 윤리와 사회를 질문하는 사고실험을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갈 '확률'을 미리 알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확률이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따라 실시간으로 바뀐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이 질문이 그려나가는 세상이 흥미로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소설을 기대하고 읽으면 안 되고, <굿 플레이스>처럼 윤리적으로 머리 아픈ㅋㅋㅋ 이야기 좋아하시는 분들은 좋아하실 듯. 추천.
바람이 분다, 가라(한강, 2010) 채식주의자(한강, 2007)
옛날에 이 블로그에 한강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신이 많이 아픈 사람들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떡하니 받아버렸다.ㅋㅋㅋㅋㅋ 정신아픔이 한강팬 1호로서 무척 기쁜 소식이었구요... 덕분에 정신 건강한 우리 독서모임 사람들과도 한강의 문학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ㅋㅋㅋ 우리는 영혜를 이해할 수 없어요. 아무도 영혜를 이해할 수는 없고... 그냥... 느껴... 그녀를.....
그리고 <바람이 분다, 가라>를 10년 만에 읽었는데 여전히 너무 아프고 지독해서 혀를 내둘렀다. <소년이 온다> 이후의 한강이 거대 유압기로 마음을 눌러 짜내는 것 같은 둔통을 준다면 이 즈음의 한강에게는 칼을 들고 슥 슥 베어내는 오기 같은 게 있다. 그럼 나 같은 독자들은 피를 좔좔 흘리면서 아 최고의 소설이에요 하고 별점 다섯 개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2024년 한국에 계엄령이 떨어져 한강을 더욱더 슈퍼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뉴스와 sns에는 한강의 노벨상 수상 연설이 끊임없이 인용되고... 광주가 너무 많이 불려나와서 조금 놀랄 정도였네.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저의 총평은요. 아직 없음.입니다.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고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함.
아직 정리 안 한 책 많지만 2편은... 내 마음 내킬 때~~ㅎㅎㅎ https://slowglow01.tistory.com/144 여기에도 몇 권 써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