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list
내 취미 중 하나는 지금 이 화면(티스토리 새 글 작성)을 띄워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다. 앉아서 한두 문단 정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마음을 들여다본다. 투명하게 들여다보인 적은 한 번도 없다. 슬프다 라고 쓰면 그제서야 슬픈 사람이 된다. 그게 싫어서 지운다. 단어들이 지겹고(이렇게 씀으로써 지겨운 사람이 된다) 이름이 지겹고 이야기되는 순간 비로소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이 지겹다. 그럼에도 계속 쓰고 싶다. 투명한 것들이 좋다. 현대철학은 투명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현대철학은 웬만한 것들은 다 없다고 하기 때문에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말은 어쨌든 위로가 된다.
아니, 섣불리 위로를 말하지 말자. 언제부터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는지 돌이켜보면 정확히 이 다짐을 했을 때부터였다. 섣부른 위로를 스스로에게 금하고 나자 할 말이 없어졌다. 섣부르게 위로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좀더 진실된 위로를 할 수 있게 될 줄 알았는데 그냥 말 없는 사람이 됨... 위로는 할 줄 모르고. 그냥 꽃을 들고 서 있다. 아니면 은박 담요를 두르고 키세스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다. 사실 대부분의 시간에는 누워 있다. 이번 주말에는 하루에 20시간 정도 누워 있었던 것 같다. 좋은 꿈과 나쁜 꿈이 번갈아 나타난다.
사실 옛날부터 섣부른 위로를 싫어'했다. 십대 후반에 커피소년의 '내가 네 편이 되어줄게'라는 곡을 듣고 몹시 화가 난 적이 있다. 네가 어떻게 내 편이 되어줄 건데?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내 편이 될 거냐고. 너 나 알아? 아 놔봐. 나 아냐고. 놔보라니깐. 웃긴 이야기지만 사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서 아직도 대부분의 '힐링' 곡들을 싫어한다. 내가 괜찮은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내가 객관적으로 안 괜찮은 사람이면 당신이 어쩔건데...(물론 뮤지션에게는 어째야 할 의무가 없다)
사실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뮤지션이든 글 쓰는 사람이든 그 누구든 자신이 줄 수 없는 것을 주겠다고,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겠다고 (이것은 내 지난 인생의 요약이기도 하다) 장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말하는 창작물이 백 배는 귀하다. 종현이 쓰고 이하이가 부른 곡 '한숨'에는 '누군가의 한숨'을 두고 '그 무거운 숨을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을까요'라고 털어놓는 가사가 있는데, 그 부분을 듣고 이 노래는 정말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어한다고 느꼈다. 종현 씨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헤아릴 수 없는 숨들까지 안아주고 싶어했던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모든 것들이 더 아팠던 걸까.
https://youtu.be/5iSlfF8TQ9k?si=IXL2-3cRMN996uLx
아픈 사람들... 나는 아프지 않다. 늘 피곤하고 만성적인 소화불량에 시달리지만 아프지는 않다. 이건 조금 불공평한데 왜냐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을 자주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십대 시절 사귀었던 친구들은 한 번씩은 내게 상처 받은 얼굴을 보여주곤 했다. 눈빛을 왜 그렇게 해? 말을 왜 그렇게 해? 이십대는 눈빛과 말을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었다. 쉽지 않았지만 효과는 있었다. 이제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는 선생님 mbti가 F(감정형)인 줄 알았어요 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 중 가장 대단한 업적이다). 하지만 잊을 만할 때쯤 또다시 상처 받은 얼굴들이 돌아오곤 하고, 사실은, 원하기만 한다면 눈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간단하게 부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기를 결코 원치 않을 때도. 사실 원할 때도.
https://youtu.be/AoIHzbRq2PE?si=L2v-30bS8jQirIMk
이제는 노벨상 수상자가 된,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내 마음에 가장 오래 살아 있는 문장은 이것이다.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 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이십대 초반, 살이 급격하게 빠지던 시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르던 문장이다. 얼마 전 젤네일을 받고 손톱을 길렀는데, 길어진 손톱이 책상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다시 이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내 뭉툭한 손끝이 좋아, 왜냐하면 일단 나한테 편하고, 그리고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으니까... 네일을 제거하고 손톱을 잘랐다.
요즘 유행어 중 '추구미'와 '도달가능미'라는 것이 있다. 내 추구미는 손뜨개 스웨터와 주름 스커트를 입고 미소를 주름처럼 얼굴에 새긴 할머니다. 내 도달가능미는 그냥 손톱을 짧게 깎는 사람이다. 손톱 자르듯 모든 날카로운 부분들을 잘라낼 순 없을까? 모든 단어들과 이름들을. 그리고 그냥 미안한 사람에게는 미안하다고, 고마운 사람에게는 고맙다고, 그렇게만... 하지만 습관이 쉽게 고쳐지지 않아 나는 또 섣부르게 그럴듯한 말로 위로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상찬을 보내고. 나는 모욕당한 기분인지 남을 모욕한 기분인지 알 수 없어진다.
종현 씨처럼 다정하지 못한 나는, 내 글을 읽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한 마디도 없다. 여러분은 그냥 어쩌다 저의 속마음노출쇼를 관람 당하신 거예요, 당황하셨으면 돌아가시고 취향에 맞으시면 계속 보시면 됩니다(감사합니다)... 그런데 나도 가끔은 이 실체 없는 독자라는 존재에게 연대의식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난 사실은 널 이해 못 해/너의 이름조차 몰라(9와 숫자들 '죽지는 마')" 하지만 "이 미친 세상에(브로콜리너마저 '졸업')" 함께 살다 잠시 비유적으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으로서. 내가 당신에게 뭔가를 줄 수 있을까. 섣부르지 않은 것을. 아니 사실 위로도 아닌 것을. 단어도, 이름도, 이야기도 아닌 것, 사랑도 아닌 것(우효 '네게 사랑 아닌 건 주지 않을래'), 굳이 뭐라고 부른다면, 고통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을, 왜냐면 결국 우리가 가진 것은 그것뿐이니까, 그것을 당신에게 건넬 수 있을까. 건넨다면 당신이 받을 수 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0jVziDGnNrA
어제는 토요일이었다. 광주 5.18민주광장에서는 윤석열 탄핵 촉구 및 애경제주항공 참사 추모 집회가 있었다. 또 광장에서 멀지 않은 광주독립영화관에서는 미얀마 민주주의에 대한 연대의 의미로 미얀마 필름투어가 있었다고 한다. 나는 두 군데 다 못 갔다. 누워있느라... 죄책감이랄지 책임감 같은 게 든다. 하지만 내가 모든 장소에 다 있을 수는 없는 것이고
다만 반드시 내가 있어야만 하는 곳이 한 곳 있다. 나의 교실. 나의 학생들. 내일은 종업식, 아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는 날이다. 아 나에게도 순수한 기쁨으로 말할 수 있는 문장이 있다. 누구도 기만하지 않고 아프게 하지도 않고 투명한 확신으로 쓸 수 있는 문장이. 나는 내일 아이들을 만난다. 나는 아이들에게 줄 것이 아주 많고 아이들도 그렇다. 우리는 그것들을 주고받으면서 많이 웃고 단 한 순간도 미안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