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방학 어떻게 지내세요

slowglow01 2025. 2. 3. 22:06

며칠 전부터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오늘은 소위 천국의 계단이라 불리는 스텝밀을 처음으로 타 보았다. 타면서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 들었는데, 아니 이거 에스컬레이터와 정확히 반대되는 물건이잖아?? 오르지 않아도 저절로 올라가는 계단과, 올라도 올라도 절대 오를 수 없는 계단. 계단을 올라야 할 때는 가만히 서 있고, 전혀 오를 필요가 없을 때는 끝없이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현대인이란 정말 부조리한 존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천국의 계단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라도 해야 버틸 수 있다. 시끄러운 음악이 흐르고, 똑같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이상한 기구 위에서 끙끙대는 모습은 마치 어떤 집단 의례ritual의 한 순간처럼 보인다. 푸코가 살아서 헬스장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해지고, 왠지 누군가 이 주제로 벌써 논문을 써 놓았을 것만 같다. 현대사회의 리추얼이 이루어지는 곳은 헬스장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신자유주의적 건강 이데올로기라는 신을 섬긴다. 뭐 이런 문장이 (어쩐지 한병철 같은 말투로) 익숙하게 머릿속에서 흘러나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스텝밀을 오르고 맛대가리라고는 없는 단백질 음료를 마셨다. 이따위 물건에 초코맛이라고 적혀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부조리다...



방학은 평온하게 보내고 있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이렇게 쓰니 대단히 교양 있어 보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만진다. 늦은 새벽, 불을 끄고 이불 속에 파묻혀서, 졸린 눈을 비비며(일부러 늦게 잘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일 출근할 필요도 없는데? 왜 일찍 자야 하지?) 프리셀freecell 게임을 하고 있으면 아 이것이야말로 행복이다, 이것이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모든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뒤죽박죽으로 섞인 가상의 카드 더미를 가지런하게 정리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인터넷에 프리셀 프로젝트라는 사이트가 있는데 거기서 프리셀 게임을 천이백 판 정도 했다. 여러분도 그 사이트에 들어간다면 내 이름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눕지 않고 앉아 있을 때는 주로 뜨개질을 하고 있을 때이다. 몇 년 전에 뜨다 말고 처박아 뒀던 스웨터를 다시 꺼내 뜨기 시작했다. 마음이 많이 좋아졌다는 증거다.(나는 언제나 증거를 찾아 헤맨다) 뜨개질을 하면서 배우 이주승이 출연한 예능프로들을 몰아보고 있다. 이주승은 내가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에 열렬하게 좋아했던 배우인데, 몇 년 동안 잊고 살다가 최근에 연극 '테베랜드'를 보고 다시 팬심이 살아나서 그동안 밀린 활동들을 따라잡는 중이다. 오랜만에 팬카페에도 들어가 봤다가 십 년 전의 내가 너무 '주접'을 떨어놓아서 차마 보지 못하고 다시 나왔다. 소녀 시절의 나는 상당히 애정표현에 솔직했구나...

아무튼 그래서 이주승 배우가 나온 예능 프로들을 보는데, 아니 이분이 철학을 좋아한다면서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버스에서는 스피노자를 읽고, 즉자존재 운운하는 걸 봐서는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도 읽은 것 같다. 아니 10년 전에는 나도 이분도 철학에 아무 관심도 없었는데 왜 이렇게(?) 됐나요? 최애와 철학자 취향이 겹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서 조금 당황했다. 게다가 형이라니. 당신이 좋아하는 철학자 중에 이런 남성 호모소셜 용어를 반기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니체는 좀 좋아할지도?) 하지만 철학을 좋아하는 일에 굉장히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은 나에게도 꽤 귀감이 됐다. 그래 쓸데없이 비장할 필요는 없지... 그렇다고 버틀러나 이리가레를 언니라고 부를 생각은 없습니다만.

오빠 왜 10년 전이랑 얼굴이 똑같아요?ㅠㅠ
그래서 에티카 완독하셨는지 궁금하다(저는 못했어요)


어쩌다 보니 최애와 같은 취미생활을 즐기게 된 나. 연극 '테베랜드'도 한 번 더 보려고 예매해두었다.(마침 이 배우의 출연 회차가 딱 한 번 남아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 연극은 자크 라캉의 이론과 비슷한 데가 있는데, S-페데리코-마르틴이라는 세 명의 등장인물을 라캉의 상징계-상상계-실재계로 해석한 감상문을 써서 팬레터로 보내면 최애가 재미있게 읽어줄까? 실존주의 쪽을 좋아하시는 분이라 흥미 없을지도. 아무튼 누군가를 두근두근 좋아하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한 요즘이다. (아니 남자친구와는 아주 잘 지내고 있지만... 뭔가 다른... 암튼 그런 게 있다)

가끔은 아이들이 보고 싶다. 하루에 1분 30초 정도... 올해는 2학년을 맡게 될 것 같다. 2022년에 한 학기 동안 1학년을 한 것 빼면 저학년을 맡는 건 처음인데 괜찮을까. 2022교육과정이 아주 난해하다던데 교과서라도 한번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사실 걱정 안 된다. 내가 왜 저런 문장을 썼는지 모르겠다. 미래의 내가 잘하겠지. 유일하게 걱정되는 것은 삐약삐약 거리는 아홉 살 아이들의 에너지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헬스 시작했잖아. 튼튼한 코어근육으로 지치지 않고 놀아주려고. 구구단도 다 떼어줄테다. 으하하.

혼자 무작정 다녀온 함평 돌머리 해수욕장


방학도 벌써 절반 넘게 지나갔는데 정말 놀라울 정도로 할 말이 없군... 오늘은 브루노 라투르의 <존재양식의 탐구>를 조금 읽었다. 이것도 예전에 절반 정도 읽다가 던져둔 것인데 이번 방학 안에는 기필코 완독하려고 한다. 그리고 가족들과 부산여행도 다녀오려고 하고. 시간과 체력이 남아있다면 혼자 제주도라도 훌쩍 다녀올까.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던 곶자왈 숲의 검은 흙길을 다시 한 번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