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얘기

올해 읽은 책들(1월~6월)

slowglow01 2025. 6. 16. 16:43

대일본제국 붕괴(가토 기요후미)
작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산 책. 어쩌다 보니 출판사 사장님? 대표님?과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이 책은 이렇게 만들었고 이 책에는 만들 때 이런 사연이 있었고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서 찐한 문과력(?)을 느껴 결국 한 권 사 왔다. 그리고 과연 진짜 괜찮았음. 역시 음식은 먹짱이 만들어야 하고 책은 오타쿠가 만들어야 한다.

일단 우리를 괴롭혔던(?) 나쁜 놈들이 망하는 이야기인 만큼 거기서 오는 즐거움이 있지만, 한국인 독자들의 시각에 맞춘 '사이다' 스토리는 아니다. 그보다는 일본인 역사학자가 객관적인 눈으로 일제의 몰락 과정과 그에 따른 동아시아 세계(특히 조선, 대만, 만주국, 사할린 등의 식민지들)의 변화를 설명해 주는 트랜스내셔널 역사학 교양 강의에 가깝다. 세계사 지식이 거의 없고 일제 패망=조선 독립으로만 알고 있던 내게는 여러 모로 신선한 충격이 되었다. 무엇보다 2차 대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끝났는지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그냥 원자폭탄 빵! 전쟁 끝! 이렇게 된 줄 알았지.ㅎㅎㅎ 

그동안 이것저것 읽은 게 있다 보니 웬만한 분야에서는 잡다하게 아는 게 많은 편인데, 유독 역사 관련 지식만 심각하게 텅텅 비어 있다. 일단 머릿속에 연표가 아예 없음. 심각함... 진짜로 공부하려고 아는 선생님한테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도 받았는데 몇 년째 아직 펼쳐보지도 않았다. 누가 나 역사 과외 좀 해줘요.


깃털 달린 여행자(멜리사 마인츠)
이것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산 책. 가지출판사는 생태와 지역에 관한 책들을 주로 펴내고 있는데, 이미 가방이 책으로 가득하지만 않았어도 부스에 있는 책을 몽땅 사 왔을 것이다. 부스에는 숫자 대신 새(bird) 그림이 그려진 아주 멋진 벽시계도 있었는데 사실 그걸 제일 사고 싶었다.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려...

수많은 새(bird) 책들 중에서 고심해서 딱 한 권만 집어온 게 바로 이 <깃털 달린 여행자>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철새를 다룬 책인데 일단 표지가 예뻐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작고 가벼운 판형에 종이가 도톰해서 실제로 보면 더 예쁘다. 삽화는 더 더 예쁘고. 그리고 책을 읽다 보면 철새라는 생물이 너무나 경이롭고 아름다워서 가슴이 두근두근 설렌다. 표지에 있는 새는 극제비갈매기인데 얘가 진짜... 제일 대단한 애다ㅠㅠㅠ 새는 정말 최고의 생물이에요...

새 좋아하시면 무조건. 소장하시고. 아니더라도 가볍고 산뜻하게 기분전환하기 좋은 책. 저를 믿어봐요.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조형근)
얼마 전에 영화 리뷰 쓸 때는 좀 유식한 척을 했던 것 같은데, 책 리뷰를 쓰려니까 "추천 열개!! 추천 백개!!" 이 따위 말밖에 생각이 안 난다. 서평 쓰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쓰는 걸까?

이 책이 추천 열 개 추천 백 개짜리인 이유. 일단 재미가 있고요. 아까 <대일본제국 붕괴>의 '재미'가 나 같은 문사철 오타쿠들이나 "호오... 흥미롭네..." 하는 그런 재미였다면(바오출판사 대표님 죄송해요.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이 책에는 좀 더 대중적인 재미가 있다. '꼬꼬무'나 '쌤과함께' 같은 지식예능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취향저격일 것. 은근히 '서프라이즈' 느낌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예능보다 훌륭한 점은 무고하고 떳떳한 주인공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역사에 '연루'되었다는 문장은 수동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은 느낌, 그리고 어쩐지 부정한 뉘앙스를 풍긴다. 저자는 피해와 가해,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다양한 방법으로 시대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의 드라마를 소개한다. 이들(우리)의 삶은 시대에 의해 조건 지워졌지만, 이들(우리)의 모든 선택이 시대에 귀속될 수는 없다. 콰이강에서 영국인 포로들을 잔인하게 학대했던 (그러나 그 자신들도 학대당했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처럼. 저자는 역사의 파도 앞에 선 개인들의 이야기를, 변호하지도 질타하지도 않으며 연민 어린 시선으로 풀어 나간다.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궁금해지는데... 지금처럼 탄소를 배출하며 산다면 아마 우리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확률이 크겠죠... 역사라는 게 없을 테니까...

인문잡지 한편 - 14호 '쉼'
'인덱스'라는 독립서점에 갔다가 표지가 너무 멋져서 사버렸다. 읽으면서 잘 쉬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사사키 아타루)
읽으면서 몇 번씩 맥주 마신 아저씨처럼 "크아아아~" 했다. 정말 파워풀한 책. 저 책한테 이런 표현 잘 쓰지 않아요.

프로젝트 헤일메리(앤디 위어)
SF의 팬이지만 앤디 위어의 작품은 처음 읽어봤는데 정말 (좋은 의미에서) 12세 이용가 비디오 게임 같은 책이었다. 아무 기억도 능력도 없는 주인공을 일단 망망 우주 한가운데에 던져놓고 시작하는 게임. 1인칭 시점의 주인공은 주변을 탐색하고 눈앞에 닥친 위기들을 하나씩 헤쳐나가는데 그럴 때마다 숨겨진 기억들이 해금되면서(?) 점차 메인 퀘스트가 드러난다. 바로 태양열을 가로채는 외계 미생물 문제를 해결해서 전 인류를 멸망 위기에서 구하는 것! 두둥. 그런데 이렇게 막중한 임무를 아직 기억도 온전치 않은 중학교 선생에게 맡겨도 되는가? 미스터리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쯤에서 외계인 히로인(?)이 등장한다.

좋은 비디오 게임의 조건이 있다면? 한 가지로 꼽을 수는 없지만 우선 너무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적당한 난이도와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중요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쉴 틈 없이(그러나 차례대로) 닥쳐오는 각종 위기들이 전자를 담당하고, 현재와 교차하며 서서히 밝혀지는 주인공의 과거가 후자를 담당한다. 여긴 어디지? 내가 지구를 구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지? 어떻게 하면 미생물을 처리할 수 있을까? 시기적절하게 배치된 질문들의 답을 하나둘 찾다 보면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마치 게임에 빠졌을 때처럼.

그리고 흥행하는 게임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캐릭터의 매력이다. 주인공이 백인 남성인 것을 알고 나는 조금 당황했는데, 무슨 편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백인 남성이 주인공인 21세기 sf를 너무 오랜만에 봤기 때문이었다. 20세기 sf는 백인 남성 주인공이고, 21세기 sf는 유색인종 퀴어 여성이 주인공인 게 사실상 장르 불문율 아니었어? 고전적인 매력이 있는 작품이네~(농담) 그러나 라일랜드 그레이스는 다른 20세기 sf의 주인공들처럼 끔찍하게 재수 없는 인물은 아니다. 선량하고, 유머러스하고, 딱 독자들이 답답하지 않을 만큼 유능하고, 딱 독자들이 너무 거리감 느끼지 않을 만큼 허술하다. (백인 남성인 것까지 포함해서) 누구든 좋아할 수 있도록 만든 인물이라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자기 일을 꽤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교사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미디어에서 그런 교사 캐릭터를 찾기는 은근히 쉽지 않다.

그리고 귀여운 공대생 외계인 로키가 등장한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sf를 여러 편 읽었지만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귀엽다(영화판이 대박 나서 로키 피규어가 출시됐으면 좋겠다). 라일랜드와 로키가 서로를 발견하고,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움을 뚫고 소통하고, 결국 친구가 되는 과정은 무척 사랑스럽고 좀 찡하기도 하다. 그러나 친구가 될 수 있는 귀여운 외계인이라는 건, 결국 바위거미 모습을 뒤집어쓴 또 다른 호감형 인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삼체>의 서늘하고 무시무시한 물방울 우주선, 그리고 여러 sf 걸작들 속 낯설고 신비한 외계인들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그러니까 12세 관람가의 비디오 게임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일단 굉장히 재미있고, 소설 속 우주는 위험으로 가득한 곳이지만 기본적으로 주인공에게 호의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선량한 주인공, 귀여운 외계인, 유쾌한 모험. 이런 책을 읽고 깊이가 부족하다든지 하드sf적 매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건 미니바이킹을 타면서 자이로드롭이 아니라고 불평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난 미니바이킹을 타면서 진심으로 즐거웠다. 하지만 놀이공원을 나오면서 가장 기억에 강하게 남은 기구가 아마 미니바이킹은 아닐 것이다.


랭스로 되돌아가다(디디에 에리봉)
엄청 재밌게 읽었는데 막상 할 말은 떠오르지가 않아서 몇 번을 썼다 지웠다... 그저 하루빨리 차별금지법 제정하고 노조법 2, 3조 개정해서 성소수자 인민과 노동자 인민 그리고 인문학 오타쿠 인민들까지 자유롭게 살아가는 해방세상을 건설하자는 말밖에는.

무지한 스승(자크 랑시에르)
올해 초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읽은 책. 워낙 유명한 책인지라 읽기 전에도 내용을 대강은 알고 있었고, 거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교사는 지적 해방자가 아니야, 둘은 거의 반대말이나 다름없어... 그랬으면서 왜 책을 굳이 사서 제주도까지 들고 갔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편견을 안고 펼쳐본 <무지한 스승>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다른 책이었다. 일단 이 책은 의외로 학교/교육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특정 교수법을 옹호하기는 하는데 나는 여전히 이 부분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애초에 교수법이 아니다. 이 책이 옹호하는 것은 반-교수법이다.) (와 나 진짜 "인문학"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 그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우리가 지식을 대하는 태도, 또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이다. 그러니까 교육철학보다는 인식론이나 정치철학에 가까운 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꽤 감동을 받았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심지어 "아름답다"는 감상을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지금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거의 안 남... 어쩌면 아름다웠던 것은 그냥 제주 바다였던 걸까?ㅋㅋㅋ



가장 느린 정의(리아 락슈미 피옙즈나-사마라신하)
광주 독립서점 '소년의 서'에서 산 책. 그날은 여성의 날이라서 여성 관련 도서는 10퍼센트 할인하는 이벤트를 하는 중이었는데, 내가 이 책을 계산대에 가져가자 알바생 분이 이걸 여성 도서로 봐야 할지 말지 고민하시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결론은? 할인받았음!ㅋㅋㅋ

아무튼 이 책은... 두껍다. 올해 완독한 책 중에서는 가장 두꺼운 듯하다. 다루는 주제도 결코 가볍지 않은데, 돌봄노동과 장애정의운동,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아프고-미친-유색인종-퀴어-트랜스-펨-장애인'들의 이야기다. 철학을 좋아하게 되면서 웬만큼 긴 단어에는 익숙해졌지만 이렇게까지 단어가 주렁주렁 많이 붙은 신조어를 만나서 난 좀 주눅이 들었다. 내가 이 책을 읽어도 되나? 난 아프지도 않고, 음... 5퍼센트 정도만 미쳤고, 유색인종이긴 한데 한국에선 주류 인종에 속하고, 퀴어도 아니고(아마도), 장애인도 아닌데(아직은). 이 책의 메시지를 이해하기에 난 너무 기득권이 아닌가?

그러나 이 책을 읽고 깨달은 게 있다. 첫째,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교차성 이론이라는 건 그렇게 특정 정체성에 합격하거나 불합격하는 것으로 단순하게 구분 짓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둘째.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억압은 연결되어 있다'는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진짜로. 이것은 나와 당신의 이야기다. 기후재난과 인구절벽은 이미 문을 열고 들어와 우리 눈앞에 있다. 사회구조와 빙하 중 어느 쪽이 먼저 무너질까? 얼마나 열심히 살든지,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아프고 가난한 노인이 될 것이다. 아주 많은 것이 부족하고 거의 모든 것이 어려워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돌봄을 받는 대신 서로를 돌봐야 할 것이다. 우리를 돌볼 젊은이들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러니까... 우리 이제 X됐구나!!!

이걸 깨닫고 나자 저자가 하는 말이 더 이상 급진적으로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일상이 된 재난, 그 속에서 아프고 가난한 노인들만이 남아 서로를 돌보는 미래를 우리는 어떻게 대비할까? 저자는 그 길을 장애정의가 먼저 가고 있다고 말한다. 모든 일에 접근성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 고통스럽고 모욕적이며 주로 여성-펨에게 부과되는 돌봄노동 대신, 상호적이고 기쁨을 주는 평등한 돌봄을 모색하는 것. 치유되거나 교정되지 않은 채로, 아프고 미치고 난잡한 채로 서로를 돌보며 나아가는 것. 장애정의운동은 이 책의 제목처럼 정말로 느린 운동이다. 장애정의가 구현할 세계는 지금의 세계보다 훨씬 느리고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 세계는 곧 우리 모두가 반드시 마주할 세계이기도 하다. 즉 장애정의는 도래할 미래를 '가장 먼저' 살아낸 이들의 귀중한 조언이자 생존법이기도 하다.

비상飛上을 말하는 이들은 바보 아니면 사기꾼이다. 지금은 연착륙에 목숨을 걸어야 할 때다. 안전하게 하강하는 법. 느려지는 법. 이젠 아프고 불편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우리의 스승이다. <가장 느린 정의>는 그 가르침의 최종 버전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우리 모두가 참여해야 할 논의의 출발점으로는 충분하다.



한국이란 무엇인가(김영민)
전학공 예산으로 산 책. 김영민 교수의 책답게 굉장히 재미있고 술술 잘 읽힌다. 요즘 집중력이 처참한 수준인데 이 책은 앉은자리에서 절반 가까이 읽었다. 다만 신문에 연재한 글을 모은 책인지라 글 한 편 한 편 사이에 일관된 흐름이 없고 내용이 머리에 잘 정리되지 않는다. <한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야심 찬 제목에는 다소 부합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교수님, 좀 더 각 잡고 진지하게 다시 강의해 주세요. 정말로 한국이란 건 대체... 무엇인가요?ㅠㅠㅠ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홍한별)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읽어 무조건이야ㅠㅠ
문학이나 언어, 번역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책이고... 관심 없어도... 한 번이라도 구글 번역기 돌려본 적 있으면 그냥 읽어봐.... 제발! 읽어!!(주세요)


단명소녀 투쟁기(현호정)
사실 이제 한국문학을 거의 읽지 않는다. 한국문학에 대한 기대나 관심 같은 게 아예 없어진 지 벌써 몇 년 되었다. 그게 한국문학의 잘못은 아닌 것 같고 그냥 이제 내가 좀 다른 독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단명소녀 투쟁기>는 내가 '아, 이런 이야기겠구나' 하고 감을 잡을 때쯤 내 목덜미를 물고(진짜로) 아주 멀리 떠나 버리는 소설이다. 적응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기 때문에 결국 두 번 읽어야 했다. 스무 살에 죽지 않기 위한 수정의 투쟁은 현실 세계도, 나름의 정합성을 갖고 움직이는 판타지 세계도 아닌 은유와 신화의 세계에서 일어난다. 백 개의 떡, 일곱 명의 아이, '내일'이라는 이름의 개 등 소설 전체가 알레고리적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지만, 그래서 무엇에 대한 알레고리인지는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아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소설 속 장치 하나하나에 일대일로 의미를 대입하며 읽는 문제풀이식 해석은 어차피 재미가 없다. 그보다는 '나의 죽음을 죽이는' 수정의 치열한 투쟁기에 감동하며 읽었다. 정말 어떤 소녀들에게 산다는 건 즉 생존을 위한 투쟁에 다름 아니다. 나는 자아를 확인하고 탐색하는 일, 그러니까 보통 청소년기의 과업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전부 스무 살이 되어서야 제대로 시작했다. 십 대 때는 뭘 했나? 살아남기 바빴다. 많은 것을 견디면서, 또는 견디지 못하면서, 나 자신이 나를 죽이는 것을 막는 데에 모든 심력을 다 썼다. 나는 그때 내가 몹시 괴팍하고 외롭고 우울한 애였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이십 대가 되어서 만난 고등학교 친구들은 나를 어른들에게 불만이 많고 남들이 안 보는 영화를 많이 보던, 그냥 좀 특이한 애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두 소녀 사이에 나의 투쟁기가 있었다. 그러니 알레고리는 필요 없다. 나는 수정이가 무엇을 통과해서 삶으로 돌아왔는지, 그냥 안다.

— 망친 게 아니야.
— 그럼?
— 구한 거야. 이룬 거야. 최선을 다했기에 흔적이 남은 거야.
— 그럼 잔해를 떠안고 살아가. 고약한 피 냄새에, 무질서에 익숙해질 각오를 해. 폐허를 쉼터로, 몰락을 휴식으로 착각하면서.
—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경고야?
— ......
— 나에게 그런 것들은 이제 조금도 두렵지 않아. 그리고 나는 그것들의 이름을 실제로 바꾸어 부르겠어. 폐허를 쉼터로, 몰락을 휴식으로... 영원히.. 그러면 그건 더 이상 착각이 아니게 되겠지.

수정이는 계속 살아갈 것이다. 더 이상 소녀가 아니고 한국문학을 열심히 읽지도 않는, 그러나 아직도 모든 것이 어렵고 괴로운 나도. 그리고 세상의 다른 모든 소녀들도.

https://youtu.be/2tda_TCjz8w?si=h5MZVCEyDZHwjQBb



자본주의 리얼리즘(마크 피셔)
몇 년 전부터 소문으로 많이 들었던 책인데 이제야 읽음. 너무 좋고... 어쩐지 찡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필사하고 싶었다! 

고요의 바다에서(에밀리 세인트존 멘델)
새벽 두시까진가 잠도 못 자고 읽은 소설. 그런데 '흥미진진하다'는 말은 어쩐지 이 소설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1912년부터 2401년까지 500여 년의 세월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 시간여행 SF지만, 소설은 시종일관 긴박하기보다는 쓸쓸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긴다. SF세상에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살아가는 일의 권태와 불안이다. 달까지, 화성까지 식민지를 만들어 진출해도 우리는 결국 현재라는 감옥에 갇혀 있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어쩌면 이 세상은 누군가의 시뮬레이션이고 자유의지는 처음부터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시공간에서 살아가든 우리는 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애쓰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어쨌거나 조금 더 옳은 선택을 내리려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 미스터리가 풀리고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 찾아온 것은 쾌감이 아니라 어떤 고요한 깨달음이었다. 아, 그래도 우리는. 그럼에도 어쨌거나 우리는.


이렇게까지 열심히 쓸 계획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정말정말 열심히 써버리고 말았네... 일주일 걸렸다. 지금은 <솔라리스>와 <브뤼노 라투르 마지막 대화>를 읽고 있는데 이건 간발의 차로 하반기 편(이 있다면)에 등장할 예정. 그때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