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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운동의 전선 그리기 : 새로, 다시

slowglow01 2026. 6. 16. 19:13

이 토론회의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지혜복 교사의 A학교 투쟁, 그리고 전교조 운동이죠. 이 둘을 나란히 놓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실은 당연히 전교조가 조합원인 지혜복 교사의 투쟁을 전혀 지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그 사실을 규탄하는 입장이실 테고요. 물론 저도 그렇고요. 그리고... 그게 다입니다. 둘이 같이 한 것이 없는데 둘을 같이 두고 무슨 말을 합니까? 그러나 오늘 저는 이 '동참하지 않음'에 대해 좀더 깊이 파고들어 보려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혜복 교사의 투쟁은 2020년대 전교조운동이 '가지 않은 길'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교조의 입장에서 지혜복 교사의 투쟁은 자신들도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그러나 되지 않기를 선택한, 그러나 여전히 될 수 있는, 어떤 가능태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지금부터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1. 
전선戰線이라는 화두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얼마 전 서울시교육청 집중집회에서도 꺼냈던 말인데, 투쟁을 한다는 것은 어쨌든 누군가 또는 무언가와 싸우는 것이고 그렇다면 아군과 적군 사이에 경계선이 필요합니다. 1989년 전교조가 창립되었을 때 그 전선은 독재정권과 반민주적 교육제도를 향해 있었습니다. 험난했던 전교조 창립 과정에서 학생과 학부모는 연대의 중요한 한 축이었습니다. 생각나서 창립선언문을 찾아봤는데 두번째 문장에 바로 나오네요. "오늘의 이 쾌거는 학생, 학부모와 함께 우리 교직원이 교육의 주체로 우뚝 서겠다는 엄숙한 선언"이라고요.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그냥 교육운동단체여도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전교조는 왜 노동조합이라는 형태가 되었던 걸까요? 전교조가 창립될 무렵 교사들에게 강요된 자아상은 성직자였습니다. 요즘은 스스로 전문직이라고 많이 여기시더라고요. 성직자와 전문가의 공통점이 있다면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학교현장을 위해 희생하고 기도합니다. 전문가는 학교현장을 분석하고 처방을 내리지요. 양쪽 다 현장 바깥에서 비당사자로서 관조할 뿐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많은 성직자와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현장에 개입하고 있습니다. 교직관의 종류로서 성직관과 전문직관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자는 현장의 일부이자 사회의 일부입니다. "교사는 노동자다"라는 문장 사이에는 생략된 의미가 있습니다. 교사는, 학교비정규직과 공무직이 노동자이듯이, 노동자입니다. 교사는 학부모들과 같은 노동자이며, 학생들이 미래에 될 바로 그 노동자입니다. 아까 읽었던 창립선언문으로 돌아가면, 그리하여 교사는 학생, 학부모와 함께 교육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개입하는 자만이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전교조의 전선은 분명했습니다. 바로 주체와 비-주체 사이의 투쟁입니다.

2. 
그게 37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교육현장은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저는 사실 올해 6년차 교사인데요, 그 짧은 만 5년 동안에도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우선 전선의 방향이 바뀌었고요, 그리고 전선이 훨씬 선명해졌습니다. 89년 이야기에서 전선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비유였는데, 2026년 지금은 정말로 전시를 방불케 하는 깊은 적대의 골이 학교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과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교사들은 참호에 숨은 병사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저는 오늘 하이톡을 두 개 받았는데요, 둘 다 소위 말하는 악성민원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문의사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두 개에 답장을 하고 나니까 마음이 완전히 녹초가 되더라고요. 너무 힘들었어요. 그리고 아마 하이톡을 보낸 두 분의 학부모님도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분들이 사용하신 어마어마한 이모티콘과 쿠션어들을 보고 알았지요. 우리는 전선을 사이에 두고 필사적으로 두 팔을 휘두르고 있는 겁니다. "쏘지 마세요! 쏘지 마세요!" 우습지 않습니까? 하지만 가끔은 진짜로 총알이 날아오고, 교사들은 진짜로 죽기도 합니다. 이건 전혀 웃기지 않죠.

전교조가 창립 당시 그렸던 전선이 주체와 비-주체 사이에 그려진 것이라면, 지금 교사운동의 전선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말하기 무척 조심스러운데요, 실제로 교사가 입는 피해들이 있습니다. 교사들이 일터에서 마주하는 모욕, 위협, 그리고 실질적 폭력들을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 피해들이 '교사라서' 가해지는 특수한 것이라기보다는 후기자본주의의 징후적 폭력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교사를 대상으로 한 가해가 존재한다'는 문장과 '교사는 피해자다'라는 문장은 완전히 다릅니다. 

교육활동에는 피/가해로 양분할 수 없는 수많은 맥락들이 존재합니다. 제 얘기를 하자면, 사실 저희 반에 전교에서 아주 유명한 학생이 있습니다. 저는 매일 그 학생으로 인해 어마어마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그 학생이 저를 가해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죠. 또, 제가 신도 아니고 그렇게 힘든 학생 앞에서 항상 웃을 수는 없잖아요. 다른 학생을 지도할 때보다 그 학생을 지도할 때 제 표정과 말투가 훨씬 거칠고 딱딱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학생을 가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죠. "누가 피해자냐? 가해자냐?"라는 질문은 이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적절한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교육공동체는 담임교사의 고통을 어떻게 덜어줄 수 있을까?" "교육공동체 안에서 이 학생을 지도하는 교육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저는 실제로 괴롭고 힘듭니다. 그러나 피해자는 아닙니다. 제 괴로움은 '교권보호국'이 학생을 단죄해 줌으로써가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지원과 보호를 받음으로써 덜어집니다.

그러나 현재 교육운동에 피해자가 아닌 교사는 없습니다. 전교조든 교사노조든 아니면 그냥 인스타하는 교사들이든 모두 같은 말을 합니다. 우리는 피해자고 너무너무 억울하다고요. 주체적으로 교육활동을 만들어가는 교사, 치열하게 성찰하고 성장하는 교사, 적극적으로 현장에 개입하고 연대하는 교사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사실 교사들 대부분이 그런 교사일 텐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누군가 입을 틀어막는지, 스스로 "전쟁 중에 이런 얘기는 하지 말자"며 자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학교비정규직, 공무직, 심지어 비교과교사까지도 가해자라고 하더라고요. 전교조 이름도 교직원노조가 아니라 교원노조로 바꾸자고 하고. 조금이라도 쪽수를 늘려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운동은 처음 봤는데요... 

하지만 지혜복 교사는 피해자가 아닙니다. 아니, 물론 맞지만, 적어도 지금 교육운동이 요구하는 피해자는 아니죠.

3.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지혜복 교사가 만약 공익제보 대신 그냥 학생을 한 대 때렸다면? 그래서 학생의 보호자로부터 아동학대 고발을 당해 해직되었다면? 씁쓸하지만 그랬다면 전교조는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지혜복 교사의 편에서 싸웠을 겁니다. 그건 피/가해의 도식에 들어맞거든요. 어쩌다 한 대 때린 것은 잘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교육활동 중에 일어난 일이고, 아동학대 고발은 전형적인 가해고, 지혜복 교사는 방어가 필요한 피해자니까요. 전교조는 기꺼이 방어를 도왔을 겁니다. 

하지만 지혜복 교사가 전교조에게 요구하는 것은 방어가 아닌 연대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평화로운 일상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성폭력 사안의 조사와 해결입니다. 게다가 그의 적은 학생과 학부모가 아니고, 그의 연대자는 동료교사가 아닙니다. 지혜복 교사와 연대자들이 여는 집회에는 퀴어, 해고노동자, 팔레스타인 의제가 등장합니다. 이 투쟁은 조금 다른 전선을 그립니다. 이 전선에는 교사, 학생, 학부모라는 입장권이 없습니다. 한쪽에는 성평등한 학교와 민주적인 학교문화(그리고 물론 지혜복 교사의 복직)을 원하는 이들이, 반대편에는 구태의연한 학교문화와 서울시교육청이 있습니다. 이제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실 텐데요, 이 전선은 분명 낯선 것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자... 입장 바꿔 생각해 봅시다. 2023년 이후 전교조는 피해자 교사들의 방어만을 위한 조직으로 변신을 마쳤습니다. 변신 과정에서 한때 소중하게 여겼던 많은 가치들을 자기 손으로 저버렸지요. 연대, 저항, 그리고 학생인권. 그것들을 다 배반하고, 학생, 학부모, 그리고 학교의 다른 노동자들과도 이미 다 척을 져 놓았는데, 갑자기 내 손으로 죽인 참교육의 유령이 살아돌아온 겁니다. 전교조 입장에서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장례식장에서 하면 안 되는 일은 바로 부활"이라고. 전교조가 지혜복 교사의 투쟁에 연대한다는 건 이미 '죽은 전교조', 교육의 주체로서 반-교육에 맞서 싸우던 전교조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럴 순 없죠. 어떻게 붙잡아둔 조합원들인데.

4.
시작하면서 제가 이렇게 말했죠. 전교조의 입장에서 지혜복 교사의 투쟁은 자신들도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그러나 되지 않기를 선택한, 그러나 여전히 될 수 있는, 어떤 가능태라고요. 지금까지 앞의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했고요, 이제는 마지막 '여전히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말해보려고 합니다.

전교조가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을 무조건 비난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2023년 서이초 사건 이후 전교조에게 가해졌던 공격을 기억한다면 누구도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교조를 지금의 전선으로 몰고 간 무시할 수 없는 흐름과 압박이 있었습니다. 인디스쿨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가해진 공격과 줄어드는 조합원 수 앞에서 전교조 집행부도 많은 고민이 있었을 거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전교조가 이 전선에서 탈출해서 새로운 전선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저의 신념 때문만은 아닙니다.

전교조는 이 전선에서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범죄나 도박 영화에 자주 나오는 말로 하면 짜고 치는 고스톱, 이미 다 짜여진 판이니까요. 교사 대 학생, 교사 대 학부모, 교사 대 학교비정규직이라는 구도는 처음부터 전교조의 학생인권조례와 진보교육운동, 사회적 연대에 대한 반발과 비난의 형태로 시작되었습니다. 전선을 만들고 지금까지 주도하고 있는 이들은 원래부터 전교조를 싫어했던 사람들이고, 자신에게 공감하는 '피해자 교사들'을 혐오의 정치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기 편으로 끌여들였습니다. 적으로 등장했던 전교조가 허겁지겁 유니폼을 갈아입고 함께 뛴다고 해서 경기의 주도권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2023년 '검은 점의 집회'에 전교조가 보여주었던 놀라운 헌신과 참여를, 지금 누가 기억하고 인정한단 말입니까?

당사자로서 냉정하게 말하자면, 전교조가 아무리 온건한 척을 하며 직능이기주의적 행보를 펼쳐도 2~30대 젊은 교사들은 교사노조에 가입하지 전교조에 가입하지 않습니다. 전교조가 그래도 상식과 염치를 생각해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교사노조는 '사이다'처럼 터뜨려 주는걸요. 솔직히 조합비도 더 싸고요. 반대로 지금까지 전교조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헌신해온 기존 조합원들은 이런 행보에 큰 상처를 받고, 전교조를 아예 떠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탈은 단순히 조합원 수가 한 명 줄어드는 것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크나큰 손실입니다. 이길 수 없는 전선에서 우리는 자꾸 빤한 손해만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육현장에서 피해와 가해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처럼 교사가 피해를 호소하기 좋은 때도 없습니다. 온 사회가 교사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문제의 드라마까지 나오지 않았습니까? 힘들다고 하면 "그래도 교사가 희생정신을 가지고..." 같은 말만 듣다가 이렇게까지 주목과 염려(?)를 받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서이초 사건 이후 잠시 잠잠해졌던 교사운동의 분위기가 다시 술렁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뭔가 될 것 같다!'

그럴까요. 저는 사실 오래 전부터 학교 밖의 사람들에게 제 직업을 드러내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부터 미용실 원장님, 택시 기사님까지, 제가 교사인 걸 알았을 때 제게 편견이나 적대를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선생님들 너무 고생하시죠", "요즘 많이 힘들다는데 괜찮아요?"라며 걱정의 말을 건네 주십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제가 그 걱정이 감사해서 힘들었던 일을 꺼내놓으면, 대화는 자연스럽게 "요즘 엄마들이 교양이 없다", "우리 때는 다 맞으면서 자랐다"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지금 온/오프라인을 주도하는 정동의 정체는 교사에 대한 존중과 연대가 결코 아닙니다. 교육 걱정의 탈을 써 새로워 보이는 그것은 결국 구태의연한 아동혐오와 여성혐오입니다. SNS를 통해 반복되고 확산되는 교권침해 '썰'들과 거기에 달리는 댓글들도 가만 읽어보면 교육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가 얼마나 건방지고 '엄마'가 얼마나 진상인지 구경하고 조롱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전부입니다. 교사의 고통은 이 '썰'을 소비하는 것이 자신의 흥미가 아닌 사회정의를 위한 것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해줄 뿐입니다. 그것을 알고 나니 "선생님들 요즘 힘드시죠?"라던 사람들의 묘하게 반짝이던 눈동자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털어놓은 고충들은 또 다른 '맘충, 유충 썰'이 되어 떠돌며 혐오의 땔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드라마'가 불러온 열풍에, 심지어 전교조까지도 탑승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폭력에 동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만..." 하고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이때다 하고 교사들이 얼마나 힘든지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어진 스포트라이트는 결코 연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지금, 사소한 실수나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교사 쪽으로 혐오가 옮겨갈지 모르는 일입니다. 혐오가 얼마나 재빠르게 대상을 바꾸며 번져가는지 적어도 전교조라면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진상 학부모'를 욕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중의 상당수가 사실 본인들도 학부모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결코 경계를 늦출 순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끼리니까 터놓고 말하는 건데요, 지금 쏟아지는 것이 설령 진짜 연대라고 할지라도 혐오로 가득한 연대를 전교조가 덥석 받아도 됩니까?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궁합니까? 쪽팔려서 살 수가 없습니다...

지금 전교조는 전교조의 가치를 스스로 낡은 것으로 만드는 중입니다. 시대가 변했고 이제 학생인권이나 "참교육" 같은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또는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 그런 얘기는 할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와 전쟁 중이라는 것입니까? 적이 그은 전선, 작은 기쁨조차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피해호소와 방어만이 가득한 전선, 나 아닌 모든 이들을 배제하며 갈수록 좁아지고 깊어지는 전선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까?

전교조를 공포에 빠뜨리고 있는 지혜복이라는 유령을 다시 볼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유령치고는 눈빛이 너무 형형하고 몸짓과 목소리에는 힘이 있습니다. 어쩌면 지혜복 교사는 멀쩡하게 살아 있고, 죽은 쪽은 전교조인 것이 아닐까요? 지혜복의 연대자들 중에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목소리로 학창시절에 겪은, 또는 지금 학교에서 겪고 있는 성폭력을 증언합니다. 일베문화와 극우화로 무너진 교실을, 점점 목을 조여오는 입시경쟁을, 그리고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혐오발언들을 이야기합니다. 누가 감히 이것을 낡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이것을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A학교 투쟁은 매일 전선을 다시 그립니다. 그리면 그릴수록 전선은 더 넓어집니다. 피/가해의 이분법을 넘어, 교사/학생/학부모라는 인정투쟁을 넘어, 차별을 가로지르고 연대의 폭을 넓히며 학교를 넘어 사회로 뻗어나갑니다.

전교조와 A학교 투쟁의 관계는 단순히 노동조합과 조합원 한 명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교조의 방향성 전체를, 주요 투쟁 전선을 다시 설정하는 일입니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조직에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구성원 사이에서 합의된 것이 아닙니까? 이름을 바꾼다고 혁신이 된다는 말은 어떤 정당을 떠올리게 할 뿐이고요. 이길 수 없는 전선에서 방어에만 급급하며 웅크리고 지낸 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전선을 새로, 다시 그려야 합니다. 우리가 해왔고, 우리가 가장 잘하고, 또 우리밖에는 할 사람이 없는. 우리의 싸움을 이제는 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