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20200828

slowglow01 2020. 8. 28. 20:41

나는 요즘 자꾸 두들겨 맞는 것 같은 기분이다. 들려오는 모든 소식들이 암담한데, 무엇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다름 아닌 과거의 내가 쓴 글이다. 1년 전, 학보사에서 마지막으로 쓴 칼럼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오늘 망하지 않을 것이고, 어린이가 미래의 사회를 책임지고 계승해 나갈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에서 교육의 필요성이 태어나고, 교육자를 향한 사회의 기대 역시 생겨난다."

그런데 지금 나는 자꾸 세상이 오늘 망할 것만 같다. 아니 이미 망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모래성처럼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데, 손쓸 도리 없이 그 붕괴를 바라만 보고 있는 기분이다. 살면서 큰 위기를 겪어본 적 없는 젊은애의 엄살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 마음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 나는 공동체 어쩌구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치면서 스스로 철저한 개인주의자라고 믿어 왔는데, 알고 보니 극렬 공동체주의자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니까 내게는 공동체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이 있었다는 뜻이다. 여성과 어린이에게 흉악범죄를 저지른 자는 국가가 벌할 것이라는 믿음, 사회에 위기가 닥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을 다할 것이라는 믿음, 나쁜 사람들이 존재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만, 어쨌거나 세상은 수치심을 알고 선한 마음을 가치 있게 여기는 '척'이라도 할 것이라는 믿음... 또는 환경이 파괴되고 있긴 하지만, 전 지구적 재앙은 적어도 나의 사후에 올 것이라는 믿음. 순진한 믿음들이 차례대로 무너지고,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분노와 절망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나는 스물세 살이면 아직 애기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당장 내년에 선생님 소리를 들을 것을 생각하면 이미 어른인 것도 같다. 그렇다면 나는 어른들을 원망하고 분노해야 하는가, 아니면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해야 하는가.

이 마음은 코로나 블루이기도 하고, 단순히 공부하기 싫은 수험생의 스트레스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이 생각이 마뜩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니거든? 이건 좀 더 심각하고, 세계의 미래를 걱정하는 우울이거든? 하지만 그렇다면 남들은 심각하지도 않고 세계를 걱정하지도 않는 생각 없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나는 자꾸 나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세상의 못남을 미워하면서 오히려 나는 나 자신의 못난 마음, 철없고 이기적이고 음습한 마음들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됐다. 나는 모나고 뾰족한 사람이고 지금까지는 그 모서리로 주로 주변 사람들을 찌르면서 살아왔는데, 이제야 내 손가락도 베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세상에서 내 아픔이 제일 중하고 그것이 부끄럽다.

1년 전의 내가 맞다. 교육이 존재하는 것은 세상이 당장 망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어린이들은 대부분 어른이 될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좋은 어른으로 자라기를 바라기에(그 좋은 어른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사회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천박하고 악의에 찬 세상에서, 어린이를 보호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폭력적인 세상에서 어떤 어린이가 무사히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선생 한 명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 하물며 아직 선생조차 아닌 못나고 게으른 수험생 한 명의 힘은.

 

 

그러나 비겁해지고 싶지는 않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 어쩔 수 있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드라마퀸처럼 슬픔에 빠져 있는 동안, 선하고 용감한 사람들은 침착하게 어쩔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하나씩 해나가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내게는 어쩔 수 있는 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다. 왜냐하면 우선 내가 여러 가지 면에서 운이 좋았기 때문이고, 또 아직 어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이 90년대생더러 화석이라고 약을 팔아도 스물세 살은 애기다. 응애.

나는 내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는 별로 개의치 않지만, 외계인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몹시 외로워진다. 요즘은 외계인 역사학자에 대해 자주 상상한다. 성실하고 학구열 넘치는 역사학자들은 외계생명체의 존재가 확인되자마자 즉시 우주선을 타고 가서 그들의 역사를 몰래 기록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것은 육아일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 아이들이 처음으로 국가를 건설했다! 오늘 우리 아이 하나가 진화의 비밀을 밝혀냈다! 하지만 아이들은 끝내 걸음마를 떼고 부모에게로 걸어오지는 못한다. 역사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그들은 이렇게 적는다. 오늘 우리 아이들이 멸망했다. 그 과정은 전혀 아름답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선하고 용감한 이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