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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결정> 함께 읽기

slowglow01 2023. 10. 22. 17:11

1. 자기인식과 자기결정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봅시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나요. 저는 갤럭시 버즈 이어폰과 카라멜 사탕 한 개와 (당연하지만) 페터 비에리의 <자기 결정> 한 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린 거니까 엄밀히 말하면 제 것은 아니에요. 아무튼 이런 질문은 대답하기 무척 쉽지요. 쌤들도 대답해 보세요.

하지만 어떤 것들은 내가 가지고 있다고 자각하는 것부터 좀 더 까다롭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지금 입석 표를 끊고 기차 칸 사이 통로에 앉아 있는데요, 가끔 이 통로를 지나가려는 승객이 있으면 일어나서 자리를 비켜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타인(지나가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또 그렇게 바닥에 앉고 일어날 때마다 치마가 흐트러지지 않게 신경을 쓰는데, 그건 제가 친밀하지 않은 타인에게 맨다리나 속옷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문화적 금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갤럭시 버즈나 카라멜사탕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도덕법칙, 사회적•문화적 관습, 각종 습관, 취향, 편견.. 같은 것들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자는 전자에 비해 스스로 알아채기 어려워요.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 자기인식의 시작이라고 페터 비에리는 말합니다.

후자와 같은 것들은 내면 깊은 곳에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마치 심장이나 폐처럼 당연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심장이 피를 뿜어내고 폐가 숨을 쉬는 것처럼, 사람이 좁은 통로를 지나가면 비켜줘야 하고 치마를 입었으면 팬티가 안 보이게 조심해야 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해서 굳이 질문할 필요조차 없어 보이지요. '안 그런 사람도 있어?'

하지만, 음... 전근대 시대의 가장 착한 사람을 떠올려 볼까요. 세종대왕님이라고 합시다. 세종대왕님이 서책을 읽으시느라 친히 통로에 앉아 계시는데 궁녀 한 명이 거기를 지나가야 해요. 세종대왕님이 궁녀에게 길을 비켜줄까요? 아마 궁녀가 절하고 길을 돌아가겠죠. 그럼 세종대왕님보다 제가 윤리적으로 우월한 인간일까요? 이런 말을 쓰는 것만으로 불경해지는 기분이네요. 그럴 리가 없지요. 다만 세종대왕님은 15세기의 왕이었고 저는 21세기의 공화국 시민이니 서로 다른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뿐 아니라 국가, 지역, 종교, 문화 등 내가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우리의 상식은 다른 모양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습관, 정치적 입장, 미적 취향 등은 심장이나 폐처럼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당연히 갖고 있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제 주머니 속의 갤럭시 버즈나 카라멜사탕과 더 비슷합니다. 에어팟과 청포도사탕을 갖게 될 수도 있었죠. 그랬으면 더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버즈는 생일선물로 받은 것이고, 카라멜사탕은.. 기억도 안 나요. 그냥 주머니 안에 들어있더라고요. 내적인 신념이나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모두 우연이에요.

페터 비에리는 이처럼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을 모두 꺼내 놓고 그 뿌리를 살펴보자고 이야기합니다. 태초부터 갖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됩니다. 그중에는 심지어 나를 괴롭히고 착취하는 세력이 집어넣은 것도 있을 거예요. "원래 선거는 무조건 A당만 찍는 거야" 하던 사람이 "아, 내가 A당에 우호적인 지역에서 자라서 그렇게 생각하는구나"라는 걸 알게 된다면, "난 살을 좀 빼야 해" 하던 사람이 "마른 몸만을 선망하도록 강요하는 미디어가 나를 괴롭게 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면,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던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 자신에게 올바르다고 느껴지는 신념으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주머니에 들어있던 카라멜 사탕을 버리고 청포도 사탕으로 바꾸듯이요. 그러다 당 수치가 걱정되면 청포도사탕도 버리고 브로콜리 같은 걸 넣을 수도 있고요.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을 몇 번 바꾸든 내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똑바로 알고 있다면 이것이 '자기 결정'입니다.

구조주의라는 철학 사조가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구조'가 우리가 누구인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21세기, 한국인, 20대, 여성, 초등교사, 광주 시민, 비장애인...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삶의 조건이 우리의 내면을 만들어요. 그걸 모른다면 그저 만들어진 대로 살아가야 하지만, 그게 모두 우연임을 안다면 자신의 결정대로 바꿔나갈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요. (이게 페터 비에리의 입장입니다. 구조주의자들 중에는 구조로부터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양반들도 많구요.. 암튼)


쨘ㅋㅋ


2. 자신의 서사를 직접 작성하기
그러면서 페터 비에리는 언어의 역할을 무척 강조합니다. 언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우선 언어는 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제 눈 앞에 사과가 있고, 저는 "여기 사과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한국의 수도는 서울입니다."라든지 "저는 스물여섯 살입니다." 하는 것도 세계의 반영이죠. 간단하지요?

하지만 언어와 세계가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제 눈 앞에 사과가 없는데 제가 "여기 사과가 있다"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배고파서 헛것을 본 걸 수도 있고, 친구를 속이려고 거짓말한 걸 수도 있고, 또는 제가 비밀요원이고 "여기 사과가 있다"는 암호일 수도 있죠.

언어와 세계가 일치하더라도 그 의미는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교직원 업무분장 회의에서 제가 울먹이며 "저는 스물여섯살인데요..."라고 한다면 그건 제가 어리니까 좀 봐주라는 뜻이겠지요. 그런다고 봐줄 것 같진 않지만요. 같은 말을 편의점 계산대에서 한다면 제가 신분증을 놓고 오긴 했지만 맥주를 꼭 사고 싶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거 엄청 재밌는 얘기지만 <자기 결정>과는 별 상관 없으니 여기까지만 할까요.

언어에 대한 또 다른 입장은 언어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세계를 건설하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서술하는 것이 먼저이고, 서술되는 것은 그 서술로 인해 만들어진다는 입장이지요.

좀 간지러운 예를 들어보자면,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가 어느 날 '나 쟤 좋아하네' 라고 자각하고 난 뒤 갑자기 사랑의 감정이 불쑥 커지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거예요.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해봤을 수도 있고요. 이때 주인공은 이미 마음 속에 존재하던 사랑을 발견해서 '나 쟤 좋아하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예요. 주인공이 '나 쟤 좋아하네'라고 언어로 표현한 순간, 주인공은 '쟤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정의되고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언어가 세상을 구성하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언어는 우리 마음 밖의 실제 세상도 구성합니다. 혐오표현이 그 예가 되겠지요. 최대한 덜 잔인한 예를 들어보면, 예전에는 뭘 먹고 있을 때 친구가 한 입만 달라고 하면 그냥 주거나 짜증내면서 주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어느 쪽이든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었죠. 그런데 요즘은 그걸 '한입충'이라 부르더라고요. 이제 한 입만 달라고 하는 행위는 비굴하고 뻔뻔한 행위로 여겨집니다. '한입충'이라는 말이 그렇게 만들었죠. '진지충'이라는 말은 진지한 성찰과 비판을 한심한 행위로 만들었고요. 희망찬 예도 들어보자면 '길고양이' '반려동물' 같은 말 역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꿔 놓았습니다.

세상을 만드는 것이 언어라면 우리의 내면세계를 만드는 것도 언어겠지요. 이것이 페터 비에리가 자기 결정에 있어 언어의 역할을 이토록 강조한 이유입니다. 나 자신을 구체적으로 알고, 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우리는 그에 기초해 바르게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인생은 사실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사건의 연속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우리는 오직 언어로써 그 안에서 의미와 서사를 찾아내고, 스스로 그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자기인식의 문제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가 머릿속에 넣어준 남의 말로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인생 역시 남의 서사에 맞게 재단되겠지요. 남들이 하는 "대학이 인생을 결정한다"라는 언어를 그대로 반복한다면 "대학 못 간 나는 실패자"가 되지만, 그 언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삶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면 개척자가 될 수 있어요.

붕어빵이냐 빵뎅이냐


3. 문화적 정체성과 잔인성
지금까지 제가 했던 얘기가 극단적 상대주의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나는 나 너는 너"라는 거지요. 하지만 같은 집단 안에 속해있는 개인들은 사고체제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세 명만 놓고 봐도,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차이점이 많이 보이지만 만약 우리 옆에 외국인이 함께 있다면 우리가 서로 얼마나 비슷하게 생각하고 말하는지 한눈에 보일 거예요. 그 이유는 우리의 뿌리가 되는 문화적 정체성이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친밀하게 여기고 무엇을 적대하는지,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고 무엇을 숨겨야 하는지 문화적 정체성이 이미 정해주고 있지요. 특히 한국의 경우 좀... 기형적으로 보이는 문화들이 많고요. 예를 들어 전 "말 편하게 해"라는 말이 정말 불편합니다...


페터 비에리는 그 문화적 정체성을 싹 갖다버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는 결국 한국인이지요. 다만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투명하게" 바라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원래 그래" 대신 그 정체성의 뿌리를 탐구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익숙했던 정체성이 낯설게 보이고, 그것만으로 우리는 더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대화함으로써 타인의 문화적 정체성 역시 이해할 수 있게 되고요.

그러나 어떤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폭력과 살인을 좋은 것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 할까요? 서로 다른 문화나 신념이 충돌할 때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굴욕'과 '잔인성'입니다. 누군가의 언어가, 행동이 타인에게 굴욕을 안겨주는 잔인한 행동일 때 우리는 그것에 단호하게 반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화나 신념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계급주의자에 성차별주의자라서 저와 철천지원수 사이인 사람이라도, 부당한 이유로 모욕이나 고문을 받고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이 당하는 고통에 단호히 반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나면 다시 원수로 돌아가면 되지요. 참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4. 마무리
저는 철학 전공자도 아니고 페터 비에리의 다른 저작에 대해서도 하나도 모릅니다. 다만 얼마 전에 읽은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와 이 책의 내용이 많이 겹쳐 보여서, 이 교차점을 쌤들에게도 소개해 주고 싶어서 썼습니다. 반박 시 쌤들 말이 무조건 맞음... 혹시 이 책이 재미있으셨다면 쉬운 철학 교양서부터 하나씩 시작해보아요 해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