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 교단일기 (17)
블로그이름뭘로하지
학기말 종합의견은 명사형 어미로 끝맺도록,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음슴체'로 쓰도록 되어있다. 정이 많고 쾌활한 성격으로 교우 관계가 두루 원만함. 책임감이 강해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학급의 일에 항상 협조적으로 참여함. 하지만 이런 공식적인 말투로는 도저히 적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ㅇㅇ이 아빠 엄마에게는 아마 들려주지 못할. 하지만 내게는 가장 중요한 그런 이야기들. 모모는 늘 숙제를 안 해온다. 왜 안 했냐고 물으면 늘 아! 깜빡했다! 라고 한다. 그 모습은 낯설지가 않다. 바로 내가 초중고 12년 동안 그런 어린이였던 것이다. 아빠는 진저리를 치면서 그놈의 '아 맞다' 좀 그만 하라고 말하곤 했다. 아니, 과거형으로 쓰면 안 된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나서 11월 월세 내는 걸..
어제는 술을 조금 마셨다 술을 마시고 친구와 두 시간 동안 통화를 하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어떻게 단 하루도 안 쉬고 매일 아침이 꼬박꼬박 찾아올 수가 있고 어떻게 남은 평생 어른 노릇을 하며 살아야 하고 어떻게 마음 둘 곳 하나가 없을 수가 있냐 뭐 이런 이야기를 하다 잠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모습을 계속 바꾸며 도망쳤지만 결국 따라잡혀 살해당하는 꿈을 꾸다 눈을 뜨니 관사 수도관이 동파되어 물이 끊겨 있었다 세수도 못하고 눈곱만 떼고 출근했다 요즘은 아침에도 별로 웃지 않는다 아침부터 조금 굳은 얼굴 낮은 에너지로 시작해야 마칠 즈음에도 비슷하게 굳은 얼굴과 낮은 에너지로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아침을 활기차게 시작했다가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리고 결국 안 좋은 모습으로 마무리하는 것보다 낫다..
오늘은 하루종일 붕붕 뜬 날이었다. 수업 준비도 부족했고 어린이들도 집중을 못하고 나도 집중을 못하고 수업은 삐그덕삐그덕 굴러가다 자주 멈추고 결국 하교 전에 혼을 냈고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핑계 대려는 건 아니지만 이게 다 비 때문이다. 다는 아니라도 적어도 50% 이상... 창가 쪽 벽에 머리를 기대고 이 일기를 쓰고 있다. 그치지 않는 끔찍한 빗소리 내일은 또 어찌 보내나 그래도 시 수업은 기본적으로 즐겁다. 학생들은 몰라도 일단 내가 즐겁다. 아직 행과 연의 구조에 익숙지 않고 자기 내키는 데서 줄을 마구 바꾸며 화제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법도 잘 모르는 어린이들의 시는 본의 아니게 가끔 훌륭한 현대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맞춤법을 고치고 행을 적당히 나누어 타이핑해서 간만에 에 ..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이미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비가 오면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완전히 녹아 버린다. 즐거움, 활력, 삶의 의지 같은 것들 안 그래도 내게 부족한 것들이 모조리 빗물에 씻겨 사라진다. 게다가 오늘은 생리 첫 날이었고 어제는 마음이 너무 우울하고 괴로워서 혼자 맥주 한 캔과 심술 3/4병을 혼자 비우고 잠들었다. (당연하지, 생리 전날이고 비 오기 전날인데 우울할 수밖에. 인간의 자유의지란 없다 모든 것은 날씨와 호르몬이 결정한다.) 그리하여 비+생리+숙취의 트리플 디버프 콤보를 안고 출근하게 되었는데 심지어 오늘은 우리 학년 스포츠 데이였다. 코로나 때문에 대운동회를 못하게 되자 그럼 학년끼리라도 조촐하게 해보자 하고 만든 날이 스포츠 데이다. 3학년 전체래봤자 고..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아직까지도 잊을 만하면 지역신문 사회면에 등장하는, 문제가 많은 학교였다. 평준화가 되기 전에는 주로 학생들이 문제를 일으켰고, 평준화된 후-내가 입학하던 무렵-에는 교사들이 문제가 되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2010년대 중반은 이미 학생인권이 보편적 의제로 자리 잡았을 때였지만, 나와 친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발바닥을 맞고 성희롱과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학교를 다녔다. 그때의 경험은 내 교육관에 생생한 흔적을 남겨, 대학 1학년 교육심리학 강의 시간에 나는 혼자 단호한 목소리로 "교사는 서비스 제공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가 질문 세례를 받은 일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강의실을 메운 학생들은 전부 스무 살이었고 저마다 교직에 대한 연둣빛 마음을..
7월 23일. 마침내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왔다. 교사 인생 첫 학기 동안 경험한 일의 기쁨과 슬픔, 학생들과의 사랑과 전쟁, 스물네 살 김 교사의 고난과 역경 그리고 성장 스토리... 구구절절 할 말은 많지만, 가장 명백하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나는 지난 5개월 동안 하루 12시간 이상 일했고 이건 뭔가 잘못됐다. 아무도 내게 사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매일 몇 시간씩 무료 초과근무를 하라고 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대체 왜 이러고 있는가?'는 내게도 한 학기 내내 미스터리였고 이 블로그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답을 내놓은 바 있다. 1)초임교사의 열정과 책임감 2)자존심과 인정욕구 3)그냥 내가 일하는 속도가 많이 느림 4)원래 다들 나만큼 해야 하는데 남들이 대충 하고 있는 ..
요즘은 좀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몸은 여전히 너덜너덜하게 힘들지만 마음은 평온하다. 가끔은 교사효능감 같은 게 들기도 한다. 퇴근하다가 갑자기 '있잖아 나... 좀 잘하고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스스로 칭찬해주고는 혼자 해죽거린다는 뜻이다. 어쩌다 다른 선생님들께 칭찬이라도 들은 날에는 (그게 진심이든 빈말이든) 셀프 칭찬 역시 더욱 길고 거창해진다. 기간제도 안 해본 신규가 학급붕괴 안 겪고 지금까지 무사히 잘 지내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 아니야? 3월의 그 노답대잔치를 생각해 보면 눈부신 발전이야. 이제 수업도 잘하고(여전히 가끔 망하지만) 이런저런 실수도 줄었고, 아이들이랑 사이도 참 좋잖아. 퇴근 시간도 엄청 당겨졌어. 어쩜 좋아. 나 참교산지 들교산지 그런 건가 봐. 사실 냉정히 생각하면 그..
1. 이제 하루하루가 전처럼 무겁지 않다. 잘하고 있는지, (나든 아이들이든) 나아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고민이 많고 여전히 월급보다 두 배쯤 일하고 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전보다 가벼워졌다. 크게 괴로워하지 않고 크게 기뻐하지도 않고,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3월처럼 크게 흔들리지도 않는다. 아이들을 보내고 일기를 쓰는 대신 그저 오늘은 좀 힘들었어, 오늘은 좀 재밌었어, 이 정도로만 생각한 뒤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한다. 퇴근하고 나서는(여전히 꼴등 퇴근이지만) 저녁을 먹고 넷플릭스를 보면서 뜨개질을 한다. 가끔 그런 생각은 한다. 적응하거나 능숙해진 게 아니라 그냥 더 긍정적으로 변한 게 아닐까? 사실 3월과 정확히 똑같은 문제와 마주하고 있는데 이제 그것 때문에 울지 않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