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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이름뭘로하지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아직까지도 잊을 만하면 지역신문 사회면에 등장하는, 문제가 많은 학교였다. 평준화가 되기 전에는 주로 학생들이 문제를 일으켰고, 평준화된 후-내가 입학하던 무렵-에는 교사들이 문제가 되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2010년대 중반은 이미 학생인권이 보편적 의제로 자리 잡았을 때였지만, 나와 친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발바닥을 맞고 성희롱과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학교를 다녔다. 그때의 경험은 내 교육관에 생생한 흔적을 남겨, 대학 1학년 교육심리학 강의 시간에 나는 혼자 단호한 목소리로 "교사는 서비스 제공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가 질문 세례를 받은 일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강의실을 메운 학생들은 전부 스무 살이었고 저마다 교직에 대한 연둣빛 마음을..
7월 23일. 마침내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왔다. 교사 인생 첫 학기 동안 경험한 일의 기쁨과 슬픔, 학생들과의 사랑과 전쟁, 스물네 살 김 교사의 고난과 역경 그리고 성장 스토리... 구구절절 할 말은 많지만, 가장 명백하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나는 지난 5개월 동안 하루 12시간 이상 일했고 이건 뭔가 잘못됐다. 아무도 내게 사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매일 몇 시간씩 무료 초과근무를 하라고 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대체 왜 이러고 있는가?'는 내게도 한 학기 내내 미스터리였고 이 블로그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답을 내놓은 바 있다. 1)초임교사의 열정과 책임감 2)자존심과 인정욕구 3)그냥 내가 일하는 속도가 많이 느림 4)원래 다들 나만큼 해야 하는데 남들이 대충 하고 있는 ..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시가 등장하는 것은 1단원 '재미가 톡톡톡'에서 처음. 그 뒤로 아직까지 시를 다시 보지 못했다. 분명 나는 초등학생 때 시를 엄청 읽었던 것 같은데 그동안 교육과정이 바뀐 건지 아니면 내가 재미없는 건 다 까먹은 건지... 아무튼 대신 학급문고에 시집을 몇 권 꽂아두고, 재미있는 시를 찾아 아침시간에 종종 읽기 활동을 했지만 반응은 언제나 그냥저냥이었다. (박성우 이 그나마 조금 인기가 있었다) 그렇다고 담임이 시 교육에 특별히 열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그동안 시는 교실 한 구석의 화분처럼 큰 존재감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동시 작가님이 우리 반으로 찾아오기 전까지는. 작가님이 우리 반에 오시게 된 과정에는 내 개인사가 너무 많이 들어 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1. 과학 4단원 '자석의 이용'을 배우는 중이다. 이제야 조금 실험다운 실험을 하게 돼서 즐겁다. 작은 규모의 실험이라서 늘 도구들을 교실로 가져와서 실험하는데, 아이들이 자꾸 과학실 언제 가냐고 물어본다. 사실 되도록 안 가고 싶어... 선생님은 교실이 좋아... 교과서에 있는 실험은 안 빼놓고 거의 다 하지만, 실험 관찰은 이제 잘 쓰지 않는다. 실험을 하면서 동시에 결과를 기록하는 것은 열 살에게는 무리라는 사실을 눈물로 배웠다. 그냥 실험을 하고, 결과를 열심히 관찰만 한 다음에 정리는 내가 칠판에 한다. 기록하는 방법은 4학년 선생님한테 배우렴 얘들아!! (이런 식으로 너무 많은 것을 내년으로 넘기고 있기는 하지만) 이 단원에서는 유튜브가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자석이 철을 '끌어당기는' 모..
나는 도덕 교과서를 쓰지 않는다. 정말 싫어해서 아예 펴지도 않는다. 단원 이름 정도만 가져가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편이다. 3단원 '사랑이 넘치는 우리 집'은 가족다양성 수업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작년 여름에 사회 각론을 공부하면서 바로 이 '다양한 가족'이라는 말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은 지금까지도 이 블로그의 가장 인기글로 남아 있고... 어쩌다 보니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사람이 된 꼴이다. 그치만 우리 가족 사랑해요~ 효도해요~ 보다는 세상에 정상가족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우는 게 낫지 않겠는가? 게다가 나는 (무적의) 당사자성까지 있으니 이야기를 꺼내기 좀 수월했다. 먼저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소개했다. 그다음 활동은 내 발명품이 아니다. '젠더온' ..
요즘은 좀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몸은 여전히 너덜너덜하게 힘들지만 마음은 평온하다. 가끔은 교사효능감 같은 게 들기도 한다. 퇴근하다가 갑자기 '있잖아 나... 좀 잘하고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스스로 칭찬해주고는 혼자 해죽거린다는 뜻이다. 어쩌다 다른 선생님들께 칭찬이라도 들은 날에는 (그게 진심이든 빈말이든) 셀프 칭찬 역시 더욱 길고 거창해진다. 기간제도 안 해본 신규가 학급붕괴 안 겪고 지금까지 무사히 잘 지내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 아니야? 3월의 그 노답대잔치를 생각해 보면 눈부신 발전이야. 이제 수업도 잘하고(여전히 가끔 망하지만) 이런저런 실수도 줄었고, 아이들이랑 사이도 참 좋잖아. 퇴근 시간도 엄청 당겨졌어. 어쩜 좋아. 나 참교산지 들교산지 그런 건가 봐. 사실 냉정히 생각하면 그..
1. 이제 하루하루가 전처럼 무겁지 않다. 잘하고 있는지, (나든 아이들이든) 나아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고민이 많고 여전히 월급보다 두 배쯤 일하고 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전보다 가벼워졌다. 크게 괴로워하지 않고 크게 기뻐하지도 않고,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3월처럼 크게 흔들리지도 않는다. 아이들을 보내고 일기를 쓰는 대신 그저 오늘은 좀 힘들었어, 오늘은 좀 재밌었어, 이 정도로만 생각한 뒤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한다. 퇴근하고 나서는(여전히 꼴등 퇴근이지만) 저녁을 먹고 넷플릭스를 보면서 뜨개질을 한다. 가끔 그런 생각은 한다. 적응하거나 능숙해진 게 아니라 그냥 더 긍정적으로 변한 게 아닐까? 사실 3월과 정확히 똑같은 문제와 마주하고 있는데 이제 그것 때문에 울지 않을..
발령받기 전, 미술수업에 대한 책을 한 권 샀다. 꽤 유명한 책이었고, 미술시간에 활용할 수 있는 여러 활동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유용하겠다고 생각했다. 캐치프레이즈도 명쾌했다. 미술이 두려운 교사를 위한 쉽고 재미있는 미술수업! 그때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무척 꺼림직하다. 미술수업은 쉽고 재미있는 것이어야 할까? 왜? 절대 망하지 않는 수업 이 책이 불편한 이유. 이 책에 나오는 활동들은 대부분, 잘 따라하기만 한다면 모두가 반드시 아름다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일단 많은 활동이 도안을 사용한다. 도안을 잘 자르고 칠하고 붙이면 작품이 완성된다. 도안이 없는 활동이라도 대부분 처음부터 끝까지 무척 명확한 표현 방법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 가면 큰 문제 없이 멋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