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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약봉투

slowglow01 2023. 11. 24. 22:05

얼마 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신과에 갔다. 병원에 갈 정도로 정신이 괴롭고 힘들었나? 사실 살면서 지금보다 불행했던 순간은 많았다. 밤마다 펑펑 울던 날도 있었고 혼자 술을 마시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병원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직은 괜찮다고. 더 아프면, 더 슬프면 병원에 가자고.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버티다 보면 괜찮아졌다. 그렇게 스물다섯 해를 살았다.

요즘은 그렇게 힘들 일이 없다. 나는 젊고 건강하다. 이른 나이에 정규직 일자리를 얻었고, 심지어 그 일이 적성에 맞아서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며 일하고 있다. 내겐 (더 이상 고성과 욕설이 오가지 않는) 가족과 친구와 연인과 동료들이 있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일상을 성실하게 영위하고 수입은 착실하게 저축하며 그러는 사이에 취미나 자기계발이나 연애 같은 것도 틈틈이 해나가고 있다. 울지도 않고 요즘은 술도 거의 안 마신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지 혼자 수렁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간다. 자꾸 피곤하다면서 깊은 데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다. 왜 그래? 요즘은 딱히 힘들 일도 없는데 뭐가 문제야? 라고 마음에게 묻자 마음은 사춘기 소녀처럼 꽥 소리를 지른다. 그렇게 말하지 마! 바로 그 자기검열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대체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살면서 지금보다 괴로웠던 순간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아주 강했고 언제나 나를 일으켜 세워 내일로 끌고 갈 힘이 있었다. 나는 그런 내 마음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이젠 마음이 그러기 싫다고 한다. 버티기 싫다고. 힘내기 싫다고. 기분이 완만하게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다가, 9월 즈음부터 시작된 우울감과 무기력이 두 달 가까이 지속되자 나는 그냥 병원을 가기로 했다. 막상 결심을 하자 모든 게 단순하게 느껴졌다. 그래. 어차피 동네 병원인데 그냥 가면 되지.

첫 방문 때는 몇 가지 간단한 검사를 했는데 결과는 그다지 심각하게 나오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너무나 멀쩡한 얼굴로 우울하다고 말하는 나를 아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고, 나는 그래서 더 그분에게 신뢰가 갔다. ㅇㅇ씨는 지금까지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혼자 잘 견뎠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젠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이게 ㅇㅇ씨가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일 수 있어요. 라고 말하면서 의사 선생님은 항우울제와 안정제를 처방해 주었다. 아주 작은 알약 한 개. 더 작은 알약 반 개. 하루에 한 번, 저녁 먹고 복용할 것.

첫 주에는 별로 큰 변화는 없었다. 의사 선생님도 약이 효과를 보이려면 적어도 2주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문득 편하게 누워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전에는 자려고 눈을 감으면, 이내 두려움이라기엔 좀 사소하고 심심함이라기엔 좀 커다란 무언가가 자꾸 다시 눈을 뜨게 만들곤 했다. 졸린데! 자고 싶은데! 눈을 감을 순 없어서 껌뻑껌뻑 버티던 밤들... 그런데 이젠 '자야지' 하면 눈을 감을 수 있다. 심지어 '숙면의 세계로 고고~' 하는 긍정적인 마음까지 들었다. 그 쌀알만 한 알약들이 정말로 내 뇌를 바꾸고 있었다.

밈이 없으면 생각을 못하는 사람


두 번째 방문에서는 이런 얘기를 했다. 한 주 동안 크게 바뀐 건 없고 여전히 무기력하긴 하지만, 잠을 잘 잤다고. 그리고 방금 깨달았는데, 저번 주에는 땅 파고 들어가는 우울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고. 나는 약의 효과가 신기해서 눈을 반짝거렸지만 의사 선생님은 여전히 아주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한참 고민하더니 그럼 약을 좀 더 먹어봅시다, 하고 처방전을 써 주었다.

그다음 주도 별일은 없었다. 담임이 정신과 약을 먹든 안 먹든 학기말은 다가오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5학년 역사 동아리 예산이 있는데 뭘 하지? 아! 역사탐방을 다녀와야겠다. 고려인마을에 가서 강제이주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러시아 음식을 먹어봐야지. 그리고 문화체험 예산으로는 작가와의 만남을 예약했다. 그리고 국어 시간에 쓴 글을 모아서 학급문집을 만들어야지... 잠깐. 내가 일을 의욕적으로 하고 있다???

어느 날 밤에는 구글에 '항우울제'를 검색해서 나무위키랑 여러 뉴스 기사를 열심히 읽어보았다. 세로토닌이 어쩌구 도파민이 저쩌구...하는 것들이 내 마음을 수렁에서 조금씩 건져올리고 있다. 이제는 퇴근하면 집안일도 한다. 신비하다 현대 의학! 위대하다 현대 의학! 세 번째 방문에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의사 선생님은 원래 항우울제 한 알+안정제 반 알이었던 약 용량을 항우울제 반 알+안정제 반 알로 줄여 주었다. 사실 난 계속 한 알씩 먹으면서 활력의 기쁨을 더 느끼고 싶었지만 뭐 전문가의 결정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정해야겠다. 내 마음의 힘은 대략 스물세 살 즈음에 똑 떨어졌다. 아주 용감하게 삶을 살아나가느라 다 쓴 것이기 때문에 전혀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럽다. 마음의 힘이 다 바닥났고 이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삼 년이 걸렸다. 약의 도움, 운동의 도움, 주변 사람들의 도움, 받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다 받아 마음의 힘을 조금씩 채울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나의 마음이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워 내일로 데려다 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내일, 평생 두려워했으나 어쩌면 아름다울지도 모르는 내일로.

"항우울제는 진짜 별 거 아니야"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