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이름뭘로하지
초등 3학년 첫날 학급세우기와 이것저것 일기 본문
교단일기를 쓰려고 노트북을 열었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좀 하자면
2026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의 해가 될 예정이다.
일단은... 그 뭐시냐... 결혼?을? 하기로 했다. 두둥!
뭐 식장 들어서기 전까지는 모르는 게 결혼이라고 하지만
암튼 올해 말로 날짜를 잡아놓고.. 상견례도 하고 플래너도 계약하며 이것저것 준비를 해나가고 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사는 곳을 옮겼다는 것인데
결혼을 하려면 둘 중 하나는 이사를 해야 했고, 그게 나인 편이 현실적으로 더 가능성 있었기 때문에,
작년 말에 큰 결심을 하고 타시도 전출을 썼다.
어쩌다 보니 벌써 세 번째 교육청이다.ㅎ 이렇게 된 김에 전국일주를 한번 해야 하나
아무튼 전출 서류를 쓰고, 결과를 기다리고, 지원청 배정을 기다리고, 학교 배정을 기다리고, 광주의 선생님들과 작별을 나누고, 새로운 동네에 자취방을 구하고, 방을 정리하고, 짐을 싸고, 짐을 옮기고, 짐을 풀고...
그러면서 겨울방학을 온통 다 보냈다.
말 그대로 인생의 한 페이지를 접어두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중대한 과정이었고
게다가 어디로 이사하게 될지, 어떤 학교에서 일하게 될지를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다 보니
몇 달 내내 정말 신경줄이 팽팽하게 곤두서 있었다. 감정 소비가 정말 심했고
그러다 보니 사실 올해 어떤 아이들을 만나게 될지, 어떤 일 년을 보낼지 같은 문제는
미안하지만 정말 안중에도 없었다... 이제 6년차라 긴장도 별로 안 되기도 하고
걍 되면됨ㅋ 하면함ㅋ 이런 정도의 생각으로 학년 배정을 받았다.
아 3학년이라구요? 알겠슴당~
...잠깐 3학년이라고요?
내 교직생활 첫 해에 만난 아이들이 바로 3학년이었고
그 해는 정말 눈물 나게 힘들었다. 이 블로그에도 그때의 고난 스토리가 그대로 담겨 있는데
이제 많이 성장해서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3학년이라는 말을 듣자 순간 그때의 괴로움이 거의 신체적으로 되살아났다.
게다가 하필 3학년 2반임 (데자뷰)
게다가 통합학급임 (데자뷰)
게다가 작년에 기피학년이었다고 함 (이건 데자뷰고 뭐고 그냥 느낌이 안 좋음)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택권이 없는데 하라면 해야지
그 정도의 어정쩡하고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새학기 준비를 했다.
첫날
매년 그랬듯이 칠판에 감정카드를 붙여놓았다.
내 마음과 가장 비슷한 카드 밑에 이름을 쓰고, 조용히 책을 읽으며 시업식을 기다립시다.
아직 2학년 티를 못 벗은 조그만 아이들이 어색한 얼굴로 들어와
교실 뒤편 책장에서 얌전히 책을 꺼내 읽는다.
1년 중 아이들이 내 말을 가장 잘 듣는 순간이다.ㅋㅋㅋ
아홉 시가 되고 종이 울렸다. 공식적으로 3학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전까지는 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종소리를 듣고 교실 앞으로 와서 섰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선생님이랑 눈을 마주쳐 볼까요?
ㄷ자 배치로 앉아 있는 열아홉 명의 아이들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친다.
어색한 눈, 쑥쓰러운 눈, 설레는 눈, 긴장한 눈,
그리고 나를 안 쳐다보다가ㅋㅋㅋ 내가 계속 보니까 마지못해 시선을 맞춰 주는 눈.
여러분 환영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눈으로 먼저 말했다. 전해질 거라고 믿으면서
그리고 칠판 쪽으로 몸을 돌린다.
선생님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과 가장 비슷한 카드에 이름을 써 달라고 했지요. 한번 볼까요? ㅇㅇ이는 '기대된다'에 이름을 썼네요. ㅇㅇ이 어디 있나요? (수줍게 손 번쩍) 뭐가 제일 기대돼요?
이런 식으로 스몰토크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아이들 이름도 익힐 수 있고 긴장도 풀어줄 수 있다.
'설렌다'에 이름을 쓴 아이들. 아주 예쁜 글씨로 또박또박. 눈을 보니 벌써 '저는 선생님이 마음에 들어요'라고 쓰여 있다.ㅠㅠ 나도 너희가 벌써 좋아...
'재미있다'에 이름을 쓴 아이 두 명. 벌써 씩 웃고 있다.(ㅋㅋㅋ) 나는 이런 꾸러기들을 아주 좋아한다. 우리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뭐가 재밌어요? 라고 묻자 키키 웃는 녀석들.
그리고 '귀찮다'에 이름을 쓴 아이 한 명. 아까 내 눈을 피한 녀석이다. 직감이 말한다. 너구나! 올해는 너와 찐한 애증을 나누겠구나!ㅋㅋㅋ
ㅁㅁ이는 귀찮았구나. ㅁㅁ이는 뭐가 제일 귀찮았어요?
ㅁㅁ이는 씩 웃기만 하고 말을 하지 않는다.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고
혹시 지금 대답하는 게 귀찮은 건가요? (아이들 웃음) 선생님은 그럴수록 대답을 들어야 하는 사람인데요. 대답해 줄래요? 어떤 점이 귀찮았어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아침에 학교 오는 게 귀찮았어요 라는 대답을 듣는 데 성공한다.ㅎㅎ 시작이 좋다.
그렇게 떠들고 있으니 9시 10분이 되고 학교 방송으로 시업식을 했다. 국민의례에서 애국가를 부를 차례가 되고, 여러분 노래하는 목소리를 한번 들어볼까요? 라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엥
애국가를 이렇게 쩌렁쩌렁 부르는 애들 처음 봄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신나서 박자 다 틀림ㅋㅋㅋㅋㅋㅋㅋ
그 순간 우리의 1년이 눈앞에 환하게 그려졌다.
아, 이 아이들은 에너지 레벨이 무척 높구나.
한 해 동안 지도하기 결코 쉽지 않겠구나.
어쩌면 복장이 터지고 화를 내게 될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난 이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게 되겠구나.
정말정말 예뻐하겠구나.
시업식이 끝나고 이제 본격적인 자기소개 시간이다. 작년에 쓴 피피티를 재탕했다.

그림을 보고 선생님이 좋아하는 게 뭔지 맞추는 것이다. 아이들은 번쩍번쩍 손을 든다. 이 과정에서 '손을 들고 선생님이 지목하면 말하기'도 연습한다.
선생님은 책을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하고, 새를 좋아하고, (난이도 하)
뜨개질을 좋아하고, 맑은 날을 좋아하고, (난이도 중하)
친구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예의바른 학생을 좋아하고, 질서를 좋아하고... (난이도 중 - 퀴즈를 빙자한 훈계 시간)
마지막 그림 하나는 끝내 맞추지 못한다.
선생님은! 그냥 말하는 게 아니라 손 들고 선생님이 손가락으로 이러케 가리키면 말하는 거를 좋아해요!
그것도 정말 중요하죠. 하지만 아니에요.
아이들이 깔깔 웃는다. "하지만 아니에요"를 말하는 내 목소리가 재미있다고 한다. 아무튼 계속 정답이 안 나오니까 내가 알려주기로 한다. 선생님은!
바로 여러분을 좋아해요!
회심의 멘트였는데 반응은 그저 그랬다.ㅠ




계속해서 자기소개를 빙자한 정신교육 시간~
중요한 내용은 첫 날에 말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연말에, 어떤 계기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반 아이들에게 2학년 첫날을 기억하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거의 그대로 기억해서 줄줄 말하는 걸 보고 정말 놀랐다.
아이들은 정말 많은 걸 잊어버리지만
어떤 것은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이라도 절대 잊지 않고
그래서 교사라는 직업이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인 것 같다.
아무튼 여기까지 했더니 1교시가 끝났다.
2교시는 교과서를 가져와서 이름을 쓰는 시간이다. 내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교과서는 4교시나 아니면 아예 둘째날에 가져왔겠지만
학년에서 정해진 거라면 따라야지 어쩌겠는가
놀라운 점은 첫날이었는데도 많은 아이들이 네임펜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게 뭐가 놀랍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사소한 지점에서 관심과 돌봄을 충분히 받는 아이들이라는 것이 실감되면서
전 학교의 아이들이 떠올라 잠깐 마음이 시렸다.
3교시는 존경하는 마중물샘의 블로그를 손민수해서 (https://m.blog.naver.com/majungteacher/224201712453)
규칙을 지키며 걷기 놀이를 하기로 했다.
근데 당연하지만 남의 교실 이야기를
자기 철학이나 고민 없이 냉큼 아이디어만 베껴오면 잘될 리가 없다.ㅋㅋㅋㅋ
아이들은 이 놀이를 규칙의 중요성보다는 그냥 재밌는 거!! 로 인식하는 듯했고
뭐... 재미가 나쁜 건 아니지
해서 나도 그냥 나중에는 개미처럼 걷기! 캥거루처럼 걷기! 할아버지처럼 걷기! 이런 연극놀이로 전환해 버렸다.
하지만 재밌었죠?
그리고 침묵 줄서기 놀이를 시도했는데
나는.... 아이들이 이 놀이를 이렇게 못할 줄 몰랐다.;;;;
2학년도 하던데;;
첫 번째 생일 순으로 줄서기도 한참 헤매더니
두 번째 손바닥 크기 순으로 줄서기를 할 때는 아예 침묵이라는 규칙을 잊어버리고 재잘재잘 떠들고 있길래
참담한 기분으로 지켜보다가
놀이를 멈추고 아이들을 자리로 돌려보냈다.
화를 낼 것은 없다.
첫날이고
우리는 서로 알아가는 중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아직 많이 산만하다는 것을 알았고
아이들은 우리 선생님이 규칙 안 지키는 것에는 얄짤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치만 몹시 피곤해졌으므로ㅋㅋㅋ 줄서기나 걷기는 포기하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라사대 놀이를 했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아이들은 학년과 상관 없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모두 가라사대 놀이를 너무너무 좋아했다.
왜지
가라사대가 뭐길래...
혹시 내가 가라사대 놀이 진행의 신인가?
아무튼 이것도 규칙과 경청이 중요하다고 잔소리를 하면서 3교시를 마쳤다.

4교시에는 우리 반의 가치를 정했다. 이것도 첫날 고정 활동이다.
원래 대화서클도 계획에 있었는데
오늘 대화서클을 시도했다가는 그냥 첫날부터 혼을 내고 말겠다는 예감이 들어 취소했다.^^
화면에 있는 가치들을 하나하나 읽어보고, 어려운 말은 뜻을 알려주고, 이 중 우리 반의 가치로 삼고 싶은 것을 정해 보자고 했다.
손은 총 두 번 들 수 있어요. 신중하게 생각하되, 친구들 눈치를 볼 필요는 없어요. 나 혼자 들어도 좋으니 내 의견을 자신 있게 표현해 봅시다.
아이들은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다.
<투표 결과>
1위 안전
2위 긍정
공동 3위 질서, 재미
아싸. 재밌는 상황이 됐다. 나는 엄숙한 얼굴로 동점이 나왔으니 결선 투표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선 투표는 익명으로 진행되고 손은 한 번만 들 수 있다. 아이들이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다른 것도 아니고 '질서'와 '재미'라니 고민될 만도 하다. 내 안의 모범생과 꾸러기 중에 과연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나도 결과가 궁금했다. 결과는...!
압도적으로 질서의 승리였다. 솔직히 놀랐다. 얘들이 이럴 수가 있다고? 나 올해 29살이지만 나한테 질서랑 재미 중에 고르라고 하면 재미 고른다. 당연한 거 아님? 아이들도 사실 재미가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더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 반의 가치를 고르는 거니까, 고심 끝에 질서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익명 투표였음에도. (자기들이 보기에도 자기들에게 질서가 좀 필요하다 싶었던 모양이다) 그 작고 진지하고 바른 마음이 예뻤다.
하지만 내가 칠판에서 '재미'를 지우자 아이들의 표정은 슬퍼졌다.ㅋㅋㅋㅋ 가치를 꼭 세 개로만 해야 돼요? 네 개로 하면 안 돼요? 제발요ㅠㅠㅠ 사정사정하는 모습이 너무 웃기고 귀여워서 들어주기로 했다. 올해 우리반의 가치는 마치 편의점 과자처럼 3+1이다. 안전, 긍정, 질서, 그리고 재미. 그래 우리 재미있는 한 해를 보내자. 정확히 말하면, 내가 긍정과 재미를 담당할 테니 너희들이 안전과 질서를 담당해줬으면 좋겠다. 1년짜리 팀플 가보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