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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교단일기

봄날 자전거 나들이

slowglow01 2023. 5. 29. 00:26

모든 것은 아주 단순한 사실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자전거를 좋아한다는 것.
페달을 밟으면 눈앞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복잡한 생각들은 바람과 함께 날아가는 감각을 사랑한다.

때는 3월 초, 날씨 좋은 토요일
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는데 갑자기 우리 아이들 생각이 났다.
혼자 달려도 이렇게 좋은데
아이들과 함께 달리면 얼마나 좋을까?
오로지 자전거 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햇살, 바람, 넓은 하늘과 나뭇잎의 반짝임 같은 것을
아이들에게도 나눠주고 싶었다.
게다가 우리 반의 1학기 온책읽기 도서가 바로 <불량한 자전거 여행(김남중)>이었기 때문에
교육적으로도 아주 적절할 것 같았다.

저도 연수에서 접한 책인데요, 5학년 사회 국토 단원과 연계해서 읽기 아주 좋습니다


해서 내가 처음에 떠올린 계획은 아주 안일한 것이었다.
적당히 기안 하나 올리고 안내장 하나 발송해서
여~ 주말에 쌤이랑 자전거 탈 사람~ 하고 물어본 다음
희망자들만 내 차에 태우고 강변에 가서
자전거 빌려서 한두 시간 타고 돌아와야지
학급운영비로 스무디나 아이스크림 같은 거 사주면 되겠지?
재미있겠구만~

그러나 그건 세상물정 모르는 신규의 헛소리일 뿐
학교 현장은 그렇게 대충 흘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게 맞다)
교사가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엄연히 '체험학습'이고
심지어 바퀴 달린 물건(ㅋㅋㅋ)을 사용한다면 안전교육의 문제까지 생겼다.
결코 쉽게 볼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다들 좋은 분들이셨기 때문에
뜬금없이 "저 애들이랑 자전거 타고 오려구요"라는 신규의 말을 헛소리 취급하지 않고
여러 면에서 도와주셨다.

그리하여... 신원이 특정될 수 있기에 자세히는 적을 수 없는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 학교에는 반짝거리는 새 자전거 세 대와 안전장비 세 벌이 배달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배달된 자전거를 보고 속으로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냥 충동적인 생각이었을 뿐인데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군...ㅋㅋㅋㅋㅋㅋㅋ

때는 벌써 5월 초
더 더워지기 전에 얼른 다녀와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안전교육
우리 반 학생은 15명, 안전교육 담당자는 나 하나
점심시간을 이용해 하루에 두 명씩 2주 동안 가르치기로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니 체력을 좀 생각하고 계획을 짜...


아이들에게 안내장을 나눠주며 생색을 좀 부렸다.
이건 다른 학년은 안 가고 5학년만 가는 거예요.
ㅇㅇ초에서 가라고 한 체험학습이 아니라 선생님이 직접 계획한 거예요.
선생님이 여러분이랑 자전거 타고 싶다고 ㅇㅇ초한테 떼 써서 갈 수 있게 된 거예요.
(이건 약간 거짓말이었다ㅋㅋㅋ)
아이들의 기대감을 높이기 위한 약간의 양념(?) 같은 거였는데
선생님이 떼를 썼다는 게 아이들에게는 왠지 의미가 컸던 모양이다.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렸고
그렇게 우리 반의 두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고고~!



자전거 안전교육은 번호순으로 하루에 두 명.
남는 자전거 한 대는 두발자전거를 아직 못 타는 학생의 연습용이다.
아이들은 매일 자기들끼리 "오늘 자전거 타는 거 누구야?" 하고 물으며 자기 차례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하여 화창한 5월
우리들의 점심 시간은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매일매일 그날의 럭키 학생들은 밥을 후다닥 해치우고 교실로 달려가서 안전장비를 착용한다.
손목, 팔꿈치, 무릎 보호대를 혼자 빠르게 착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친구들이 도와준다.
보호대 착용을 마치고 자전거맨으로 변신하여 운동장으로 다시 내려가면(언제나 친구들이 우르르 함께 내려간다)
그제야 점심을 다 먹은 담임선생님이 느릿느릿 걸어나온다.
(선생님의 피곤한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선생님이 체육창고에서 자전거와 헬멧을 꺼내주고
앞브레이크와 뒷브레이크 잡는 법, 넘어지는 법 등등을 알려주고 나면
그때부터는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자유롭게 탈 수 있다.
친구들은 웃으면서 자전거를 따라 달려오고
다른 학년 아이들의 부러운 눈빛도 함께 쫓아와서 더욱 달콤하다.
그러는 동안 자전거를 못 타는 학생은 선생님과 함께 개인 연습을 하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친구들이 도와주게 되었다.
"야~ 잘한다~" "ㅇㅇ이 완전 감 잡았네~" 하고 칭찬하는 말투가 선생님과 제법 비슷하다.
알림장 쓸 시간이 되면 선생님이 창고에 자전거와 헬멧을 넣어주고
땀을 뻘뻘 흘리며 교실로 돌아간다.
분명 자전거 탄 학생은 세 명인데 일고여덟 명이 다함께.

아름다운 순간
진심으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자전거를 탈수록 학급 분위기가 좋아지는 것이
그리고 아이들이 나를 더 좋아하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
나 또한 햇빛 쏟아지는 운동장과
시키지 않아도 서로 돕고 칭찬하는 아이들과
땀에 젖은 앞머리들과 웃음소리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다만... 잊고있었던 것
나의 체력...
안 그래도 3월과 4월을 지나면서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5월에는 (내가 벌인) 행사가 하나 더 있었고
거기다 매일 자전거 끌어주기 밀어주기 응원해주기 등등까지 하게 되면서
마지막 주에는 진짜 '죽겠다...' 상태가 되었다.
마음이 행복할수록 몸은 점점 죽어가는 슬픈 현실
괴로울 때마다 '하... 이런 거 시킨 놈 누구야...'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나라서 원망할 대상도 없었다.

내가 나의 진상상사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출발 당일이 찾아왔다.
정식 명칭은 자전거 나들이지만
읽고 있는 책 제목 때문인지 아이들은 꼭 '자전거 여행'이라고 부르는 그것.
인솔교사는 나,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부장선생님이었는데
이 조합에서 책임자가 나라니... 내가 무슨 짓을...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예산 문제로(ㅋㅋㅋㅠㅠㅠ) 아이들은 버스 대신 선생님들 차에 나눠 타고 가기로 했고
내 차에도 아이들 네 명이 탔다.
처음엔 담임선생님 차에 당첨(?)됐다고 좋아하던 아이들은
다른 친구들이 벤츠나 suv에 타는 모습을 보더니 반응이 미묘하게 바뀌었다.ㅋㅋㅋ
미안 얘들아 선생님 월급으로는 중고차가 한계다.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해주는 안내센터를 찾아갔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선생님들이 아이들 몫까지 자전거를 대여해야 하는데
신분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분증 안 챙겨옴........
신분증 필요한 거 몰랐던 것도 아니고 알고 있었으면서.......
오랜만에 찾아온 자괴감 타임
애들은 이미 자전거 타겠다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쩌지
x됐다.....
다행히 선생님들이 사정사정해서 신분증 없이 자전거를 빌릴 수 있었지만
교감선생님한테 혼났다.
혼나도 쌈...

그 와중에 자전거를 빌리자마자 한 학생이 체인에 쓸려 다리를 조금 다치는 바람에 2차 멘붕이 찾아왔고
내가 그 학생의 다리에 형편없는 솜씨로 거즈를 붙이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안내센터 옆 공터에서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그 공터가 '자전거 여행'의 전부인줄 알고 몹시 실망했다고 한다.ㅋㅋㅋ

블로그에 글 쓸 때마다 cxg 짤은 꼭 하나씩 쓰게 되는듯ㅋㅋㅋ 누가 내 인생 뮤지컬로 만들었냐


원래 우리 반에서 두발자전거를 못 타는 학생은 5명이었는데
열심히 가르친 결과 2명으로 줄게 되었다.
2인용 자전거를 두 개 빌려서 교장선생님과 부장선생님이 한 명씩 태우고
(정말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
나는 나머지 학생들과 드디어 출발을 했다.
자전거 여행을.

영산강을 따라 나 있는 자전거길
내가 맨 앞에서 달리고 학생들이 한 줄로 따라 달렸다.
내가 "오른쪽으로 붙으세요"라고 말하면
등 뒤로 줄줄이 "오른쪽으로 붙어" "오른쪽이래" "오른쪽" 하는 목소리들이 따라온다.
"자, 이제 조금 오르막이다"라고 하면
"얘들아 앞에 오르막 있어" "힘내자" "화이팅~"하는 목소리들이.

5월 말
하늘은 새파랬고
강물은 반짝거렸고
연두빛 바람이 불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던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푸른 강물을 따라 분홍, 파랑, 흰색 헬멧을 쓰고 줄줄이 따라오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 나는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준 적이 없고
다만 여기서 함께 달리고 있구나
사진으로는 절대 찍을 수 없는
평생 몇 번 경험한 적 없는 순정한 행복의 장면이었다.
종종 맞은편으로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는데
어린이들이 다같이 자전거 타는 모습이 좋아 보이셨는지 허허 웃으면
등뒤에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하는 소리들이 줄줄이 들렸다.
잘 키았다...
잘 키았어...



한참 달리다 커다란 다리 밑 공터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우리가 지금까지 4킬로미터 정도 달렸다고 하니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4킬로라고!!
그렇게 먼 거리를!!
진짜 우리가 4킬로나 탔어요??
귀엽다.ㅋㅋㅋ

곧 2인용 자전거 두 대도 도착하고
아이들은 단체사진을 찍고 물수제비를 던졌다. (성공하지는 못했다.)
반짝이는 강물을 보고 한 아이가 감탄하며
"와, 우리가 이거 보러 왔나 봐."라고 말했다.
그 말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10분 정도만 더 간 뒤 돌아오기로 하고 다시 출발했다.
이때부터 슬슬 힘들기 시작했음ㅋㅋㅋ
지금쯤 돌아가볼까 하고 멈췄는데 아이들이 선생님 하고 나를 부른다.
ㅇㅇ이가 넘어졌어요!
뭐??
뒤에서 달리던 ㅇㅇ이가 넘어졌는데 내가 그냥 가버리더란 것이다.
아니 말을 해줬어야지!!
자전거를 돌려서 ㅇㅇ이가 넘어져 있는 곳으로 달린다.
아이들도 다같이 달려간다.
ㅇㅇ아!!!!!
참 아름다운 우정이긴 한데 넘어지자마자 말해줄 순 없었던 거니?ㅋㅋㅋ
다행히 ㅇㅇ이는 다치지 않았고
우리는 다시 한참을 달려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왕복 10킬로미터 조금 넘게 달린 것 같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또 다시 흥분했다.
야!! 십킬로래!!!

자전거를 반납하고
다시 선생님들 차를 타고 교실로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스쿨버스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하교시켰다.
퇴근하고
기절했다.
그래도 뿌듯한 기절이었다.
해냈다... 내가 해냈어...

해낸 자들의 셀카


그때 끝장난 체력이 그 주가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내내 고생했다.
수액이라도 맞아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이번 주말이 연휴가 아니었으면 큰일이었을 것이다.

금요일 마지막 시간에는 그날의 경험을 가지고 기행문 쓰기 수업을 했다.
글쓰기 수업에 대한 글도 언제 한번 올려야 되는데...
글을 쓰면 쓸수록 아이들의 구성력이나 표현력이 점점 좋아지고
글쓰기에 재미를 붙여가는 모습이 참 기특하다.
수업시간이 끝나서 "자~ 집에 갈 시간~" 했더니
아! 하고 아쉬워하면서 조금만 더 쓰면 안 되냐고 묻기까지 했다.
두 개의 강렬한 감정
교사로서의 뿌듯함과 '안돼 이놈들아 나도 집에 갈 거라고'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ㅋㅋㅋㅋㅋ

다음 주부터는 6월
이제 정말로 더위가 찾아올 것이다.
한동안 자전거 타기는 어렵겠지
상황이 허락한다면 가을에, 억새가 한창인 강가를 따라
아이들과 한 번 더 자전거를 타고 싶다.
이번에도 역시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좋아하니까
지난 2년 동안 매달렸던 말들, 책임, 성취, 전문성, 발전... 그런 것들만큼이나
그저 '좋아함'도 가치 있다는 걸 배웠으니까
3년차
한창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