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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교단일기

시 수업, 비일상의 문

slowglow01 2023. 3. 22. 20:50

정작 나는 시를 즐겨 읽지 않는데
왠지 시 수업만은 해마다 진심으로 하게 된다.
이유가 무엇일까, 시는 비일상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상하건 아름답건 예술은 언제나 우리를 일상 바깥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다.
어쩌면 예술 수업이란 학생들을 그곳으로 안내하는 수업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를 배우는 수업은 평소 수업과는 다른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는 편이다.
교실 바닥에 매트를 깔고 드러누워 시를 읽는다든지
날씨가 좋은 날에는 아예 시집을 들고 교실 밖으로 나간다든지

비가 내리고 교실 천장에 물이 새던 어느 날
(아이들이 너무 흥분해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수학익힘책을 덮고
다함께 천장의 물자국에 대해 시를 쓰던 한 시간은
아직까지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5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의 2단원은 <작품을 감상해요>
경험을 떠올리며 시와 동화를 감상하는 단원인데
동화는 온작품읽기로 계획하고 있으므로 이 단원에서는 시만 읽기로 했다.

마음이 하는 말, 시.pptx
1.59MB

이 자료는 첫 해 때 만든 것인데
2년만에 열어보니 흥미유발에 좋은 시들이 알맞게 들어있어서
와~ 초임교사가 이런 걸 어떻게 만들었대~ 대단하네~
라고 잠시 스스로 감탄하는 시간을 가졌다.ㅋㅋㅋ

아무튼 이렇게 시에 대한 소개를 간단하게 마치고
"그럼 이제 시를 한번 써 볼까요?"라고 묻는다.
당연히 "아니요!!"라는 대답이 돌아오고(기다렸던 바다)
5분 안에 시 한 편을 쓸 수 있게 해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여러분, 여러분은 사실 매일 시를 쓰고 있어요.
마음을 솔직하게 담으면 그대로 시가 된다고 했지요?
우리가 매일 쓰는 마음일기가 바로 시예요.

우리 반은 매일 2~3줄로 간단하게 마음일기를 쓰는데
그걸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자기 마음일기를 공유해줄 학생 한 명의 자원을 받아
그 학생의 마음일기를 그대로 모니터에 타이핑했다.

"오늘 국어시간에 칭찬을 세 개나 해서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다. 기분이 좋다.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음)

그 문장에 행갈이를 하고 제목과 시인 이름을 붙였더니 이렇게 되었다.

뿌듯해
김ㅇㅇ

오늘
국어시간에
칭찬을 세 개나 해서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다.
기분이 좋다.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

별 것 아닌데  아이들은 오오오!! 하면서 신기해한다.
반응 좋은 김에 "기분이 좋다"를 "기분이/좋다"로 행갈이를 해보며 각각의 느낌이 어떤지도 이야기해 보았다.
시 쓰기 쉽죠? 별 거 아니죠?
여러분도 한 편씩 써 봅시다.

사실 이 수업은 시에 대한 소개와 감상이 주 목적이었으므로
이 활동은 간단하게 끝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아이들이 시 쓰기를 즐거워했다.
"(마음공책에 있는 내용 말고) 그냥 내 마음으로 써도 돼요?"라고 묻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 당연히 되지~!

시가 조금씩 완성되기 시작하자 발표를 받았는데 참여율이 저조해서
"직접 읽기 민망하면 선생님이 읽어줄게요"라고 했더니 여기저기서 손이 번쩍번쩍 올라온다.
아... 자기 시가 창피한 게 아니라 그걸 읽는 게 창피한 거니?(ㅋㅋㅋ)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아무튼 다행이었다.

3학년과 수업할 때는 시도 무엇도 아닌... 그냥 써갈긴 것들이 나오곤 했는데
(물론 나는 그런 것도 좋아했다)
그래도 5년 동안 본 게 있다고 제법 시 같은 것들이 많이 나왔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반복도 하고 운율도 맞추고 짜식들...
한 학생이 <둘째의 서러움>이라는 시를 써서 폭발적 반응을 얻자
다른 학생이 그 자리에서 <막내의 서러움>이라는 시를 써서 대응(?)하기도 했다.
이게 바로 "할 말 있으면 랩으로 해"라는 것인가

이기적이고 잘 따지려 들며 분노조절을 어려워하는 학생이
형과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를 시로 써서 친구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던 것
학습부진이 심하고 adhd 약을 먹고 있다는 학생이
상당히 문학적인 색채를 지닌 시를 써서 감탄을 받았던 것이 특히 기뻤다.

이런저런 시를 읽고 쓰고 발표하다 보니 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평소라면 이대로 수업을 마치는 것이 아쉬웠겠지만
다음 시간이 체육인데 교육과정설명회 때문에 강당을 못 쓰게 되어 갈 곳이 없던 상황이라
마침 잘 됐다 하고 이어서 시 수업을 하기로 했다.

다음 시간은 시 읽기 시간
시집을 아이들 머릿수대로 빌려왔다.
모두들 마음에 드는 시집을 한 권씩 고르고
배움공책과 연필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원하는 곳에 앉아서 시집을 읽어봅시다.
그중에 내 마음에 들어오는 시 한 편을 골라서 배움공책에 옮겨 적어 보세요.
시집을 다 읽으면 친구와 바꿔 읽어보세요.

사랑스런 봄날
조금 흐려서 덥지 않아 오히려 좋다.
목련 동백 팬지 민들레 제비꽃 봄까치꽃 속에서
두셋씩 흩어져 앉아 시를 읽는다.
운동장 앞 벤치에서
흔들의자 위에서
목련나무 아래서, 이순신 장군 발치에서
아스팔트에 드러누워 읽는 학생도 있었다.
나는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동상에 올라가려는 녀석들을 말리고
마음이 자꾸 흡족해져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내가 초대하고자 했던 비일상의 세계에 아이들은 잘 왔다 갔을까
봄날의 세계, 문학의 세계
선생님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야
너희도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

사실 사진 자랑하려고 이 글 씀
멀리서 보고 화보찍니?? 라고 생각하였다. 멋지죠
대체 왜 여기 있는 거냐고... 자기들이 좋다니까 내버려뒀다ㅋㅋㅋ

아까 잠깐 말했던
따지기 좋아하고 화를 잘 내서 친구들 사이에서 좀 시한폭탄 같은 학생
내게도 무례할 때가 종종 있어 지도가 참 어려운 학생이
오늘 내게 불쑥 밤만쥬 과자를 내밀었다
이것이 오늘의 기쁨
내일은 내일의 기쁨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