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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학년 학급세우기 첫 날 본문
교직인생 삼년차
올해는 5학년 담임이 되었다.
새학년을 준비하면서 조금 기묘한 경험을 하였는데
난 분명 하나도 긴장 안 되고? 오히려 설레고 기분 좋고? ㅎㅎ올해도 잘해보장~!>< 이런 마음인데
자꾸 밤마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뒤숭숭한 악몽을 꾸는 것이다.
왜지...
무의식아... 스트레스 받으면 받는다고 말을 해... 왜 숨기니...
암튼 2월 28일 새벽까지도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지만
다행히 어젯밤에는 악몽 없이 잘 잘 수 있었다.
새학년 첫 날 힘차게 시작~
첫날 아침활동은 늘 이것이다.
감정출석부라고 이 활동을 매일 할 수 있는 교실환경물품도 있는데
난 그걸 만드신 선생님의 그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어차피 매일 마음일기를 쓸 것이기 때문에
이 활동은 학기 첫 날 아이스브레이킹 용으로만 한다.
암튼 이렇게 감정카드를 붙여놓고 하루를 시작했는데
피곤하다를 선택한 아이들이 가장 많은 것을 보며
이것이 고학년인가..! 라고 생각했다.
1학년은 무조건 설레다 기쁘다 행복하다 였다고ㅠㅠ
이곳은 6학급 학교이기 때문에
학생들도 선생님들을 다 알고 선생님들도 온 학교 학생들을 많이 안다.
우리 반에도 작년 우리 반 학생들의 언니와 형이 한 명씩 있었다.
내 착각일수도 있지만 올해 담임이 나인 것을 발견한 아이들의 표정이 나쁘지 않아서 기뻤다.
그래서 기쁘다 카드 아래에 '선생님'이라고 적었다.
선생님들은 2월에 어떤 학년이 하고 싶은지 신청서를 써요. 선생님은 5학년이 하고 싶어서 5학년을 일순위로 적었어요.(사실) 5학년이 ㅇㅇ초에서 가장 훌륭하고 멋지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거짓)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서 정말 기뻐요.(사실)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밝아지는 아이들의 눈빛이 좋다.
선생님의 자기소개 시간
고학년의 눈높이에 맞추고 싶어서 이모지를 활용해 보았다.
화면에 나타난 이모지가 무슨 뜻인지 맞추면 된다.
생각보다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음..
그러나 너무 재미있어도 불필요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ㅋㅋㅋ) 만족한다.
무난하고 깔끔한 소개였다~
그런 다음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선생님은 작년에 1학년 담임이었어요. 매일 1학년 동생들에게 예쁘다~ 사랑해~ 하다가 왔지요. 올해는 5학년이 되었지만 올해도 똑같이 할 거예요. 선생님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좋아하고 듣는 것도 좋아해요.(사실은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우리 1학년 꼬마들이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일 년 동안 여러분과 서로 많이 사랑하면서 지내고 싶어요.
학교는 잘못하고 실수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와요. 친구와 매일매일 사이좋게만 지내기 위해 오는 게 아니라, 다퉈도 보고 화해도 해보고 그러면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맞아서 100점 맞기 위해 오는 게 아니라, 틀려보고 고쳐보면서 발전하기 위해서 와요. 여기서는 실수해도 되고 잘못해도 돼요. 5학년이 되면 공부도 어려워지고, 사춘기도 오면서 점점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을 거예요. 그래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은 다 용서해 줄 거예요. 여러분이 열 번 잘못해도 열 번 다 용서해줄 거예요.
여기서 아이들의 눈빛이 '헐.. 진짜?'로 바뀐다. 열두 살이 되어도 눈빛이 투명한 것은 똑같구나. 귀엽다.
그게 봐준다는 뜻은 아니에요. 선생님은 봐주지 않아요. 혼낼 거예요. (다시 어두워지는 아이들의 눈빛ㅋㅋㅋ) 여러분이 열 번 잘못하면 열 번 다 혼낼 거예요. 그리고 열 번 다 용서해 주겠어요.
누군가 엥? 하고 혼잣말을 했다.
선생님은 절대로 여러분을 미워하게 되거나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에요.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이들을 믿자고, 무슨 일이 있든 얘들을 미워하게 되지는 말자고.
잘 되겠지?
다음은 작년에 내가 만든 <나만의 우주 만들기> 활동 시간이다.
https://slowglow01.tistory.com/77
소규모 학교는 이미 자기들끼리 다 알고 있어서 자기소개를 할 거리가 별로 없는데
이 활동을 하면 쉽고 재미있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친구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어서 좋다.
작년엔 그냥 했지만 올해는 고학년이니까
여러분은 모두 하나의 우주예요... 이런 밑밥을 좀 깐 뒤 활동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다들 재미있게 집중해서 잘 한다.
근데 그림을 잘 그리는 것 같지는 않음
사실 작년 1학기 때 가르쳤던 3학년 아이들이 더 잘 그리는 것 같음ㅋㅋㅋㅋ
아무튼 아이들이 활동하는 동안 나는 돌아다니며 스몰토크 겸 이름 외우기를 했다.
한 시간 만에 완성 가능! 뒷판에 나란히 붙여놓기만 해도 제법 예쁨!
셀프 홍보합니다.ㅋㅋㅋ
여기까지 하고 나니 중간놀이 시간이 되었다.
한두 명 빼고 다들 운동장에서 논다며 뛰어나갔는데
"50분까지 오세요"라고 말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 낯설었다.
아이들이 시계를 볼 줄 안다니
심지어 시간 약속을 할 수도 있다니
이렇게 감동적일 수가...
3교시는 대화서클이었다.
재작년 초임 때 해보려다 장렬히 망했던... 서클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해보자! 해보고 싶으니까!
(서클이 뭔지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에 회복적생활교육을 검색해 보세요)
책상을 교실 양옆으로 밀고 의자를 동그랗게 두라고 한 뒤 가운데 센터피스를 두었다.
집에 있던 돗자리
어제 다이소에서 사온 조화꽃병
그리고 서클약속카드
이게 뭐냐면 말 그대로 서클의 약속을 담아둔 카드로
인터넷에서 이렇게 팔지만
난 돈도 없고 저 카드도 없기 때문에
그냥 에이포용지에 두쪽모아찍기로 인쇄했다.(ㅋㅋㅋ)
아무튼 이렇게 세팅을 하고 있으니 아이들이 관심을 보인다.
"돗자리 보니까 소풍 가는 것 같다~"
"(카드를 읽으며) 진실게임 하나 봐!"
거기다 토킹피스(알파카 인형, 어제 다이소에서 삼천원에 구입)까지 들고 오자 기대하는 소리가 더 커진다.
너희 인형 좋아하는구나?ㅋㅋㅋ
"자, 우리가 이렇게 동그랗게 앉아 있어요. 동그라미를 영어로 뭐라고 하죠?"
"(자신만만하게, 한목소리로)원~"
아. 덕분에 오늘 하루 중에서 가장 크게 웃었다.
"ㅋㅋㅋㅋㅋ원은 한자고... 영어로는 서클이라고 해요. 지금부터 대화서클이라는 걸 한 번 해볼 거예요. 여러분의 앞에 서클의 규칙이 놓여 있는데요, 함께 읽어봅시다."
서클의 규칙을 모두 읽은 뒤 토킹피스를 소개한다.
"이 친구의 이름은 평화예요. 평화를 가진 사람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말하고 싶은 사람은 조용히 손을 들고 친구가 평화를 줄 때까지 기다립시다."
어쩐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말...(노렸음)
규칙을 알려줬으니 워밍업으로 릴레이 박수 게임을 한 뒤 서클을 시작했다.
여는 질문은 세계여행을 가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첫 번째 질문은 5학년이 되어 기대되는 것과 걱정되는 것.
여는 질문은 잘 대답한 아이들이 첫 번째 질문이 되자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평화를 옆으로 옆으로 돌리기만 한다.
벌써 진지한 질문은 조금 무리였나, 라고 (별로 실망하지는 않은 채) 생각했는데
한 바퀴를 돌고 난 뒤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친구 있나요?" 라고 묻자
하나둘씩 손을 들고 평화를 받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대되는 것은 수련활동.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
걱정되는 것은 5학년 공부가 어려워지는 것. 개학을 해서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것.
쑥쓰러운 얼굴로 진심을 조금씩 꺼내 보여주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이야기할 때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다들 평화를 무릎에 올려두고 소중히 쓰다듬으면서 말하는 게 너무 귀여웠다.ㅠㅠ
한두 명쯤 좀 과격하게(목을 잡는다든가) 들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내가 "어허~ 평화를 소중히 다뤄줘"라고 하자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킥킥거리며
다음부터는 자기들끼리 "평화를 소중히 여겨야지" 하고 평화지키기 활동을 했다.
사실 이 인형을 산 이유가 토킹피스로 쓰려는 목적도 있지만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친구(ㅋㅋㅋ)가 되어줬으면 하는 의도도 있었는데
비슷한 활동 몇 번 더 하면 진짜 그렇게도 활용 가능할 것 같다.
두 번째 질문은 우리 반의 가치 세 가지를 정하는 것으로 했다.
칠판에 여러 가지 가치를 쓰고 한 번 읽어본 뒤
우선 내가 중요시하는 가치를 이야기해 보자고 했다.
3학년들은 재미! 즐거움! 같은 걸 가장 좋아했는데
협동, 인내, 나눔 같은 것들이 많이 나와서 조금 놀랐다.
녀석들... 의젓하잖아...!
눈을 감고 자신이 선택한 가치 두 개에 손을 드는 투표 시간.
놀랍게도... 놀랍게도...
'안전'이 1등이었다.
이럴 수가...
심지어 2등과 3등은 '질서'와 '우정'이었다.
이래도 되는거냐? 초등학생이 안전과 질서가 중요하다고 (가식일지라도) 해도 되는 거냐고
고학년은 원래 이래?
괜히 내가 안절부절한 마음이 되어 "뽑히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가치가 있나요?"라고 묻자
배려, 웃음, 예의가 안 뽑힌 게 아쉽다고 한다.
이 녀석들아...!!!(눈물)
마지막으로 이 세 가치를 모두 합쳐 우리 반의 인사를 만들자고 했다.
안즐우, 정서안.. 하고 이런저런 낱말들을 만들다가 '안우서'가 나왔다.
오~ 근데 이건 '안 웃어' 같아서 좀 그렇다~
그럼 '전우서'는요?
오!!
그래서 우리 반의 인사는 전우서가 되었다. 반장이 전! 우! 서!를 선창하면 안전! 우정! 질서!를 외친 뒤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면 된다. 작년에는 배움정(배려 즐거움 우정)이었는데 올해 인사도 참 마음에 든다.
4교시는 알림장 쓰기
알림장은 점심시간에 쓸 계획이지만 오늘은 안내할 양도 많고 첫날이라 수업 시간에 쓰기로 했다.
달리 할 게 없기도 하고ㅋㅋㅋ
그런데 1학년의 속도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아이들이 알림장을 예상보다 너무 빨리 써 버려서 시간이 좀 남았다.
어쩌겠어 놀아야지
시간 남을 때 자주 하는 게임 레파토리 몇 가지를 해봤는데
아이들이 게임을 많이 몰라서 조금 당황했다.
가라사대 게임을 반밖에 모르고 인간제로 게임은 거의 다 모른다.
너희 얼마나 팍팍한 학교생활을 보냈던 거니!
점심시간까지 더해 30분 정도 게임을 했는데 재미는 있었지만 아이들이 아직 긴장이 덜 풀려서 충분히 흥분하지 않아(?) 아쉬웠다.
그치만 이것도 3월 초에만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이겠지
긴장 풀지 말아주라... 나를 계속 어려워해주라....
시업식 날은 4교시로 끝
인사를 하며 오늘 어땠냐고 묻자 재밌었어요~라고 답한다.
업계표준 같은 대답이지만 기쁘다.
선생님도 재미있었어
지금의 멋진 모습이 너희의 본모습일 거라 기대하지 않을 정도로는 경력이 있지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기에는 아직 경력이 부족하단다
우리 재미있고 멋진 일을 아주 많이 해 보자
잘못하고 실수하고 혼내고 용서하고
공부하고 책을 읽고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고 숨이 차도록 달리고
그리고 많이 사랑하며 일 년을 보내자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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