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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가 나은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이번에는 독감에 걸렸다. 시민들은 독재자와 싸우고 나는 바이러스와 싸우는 겨울이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하루하루에 아무런 색이 없다. 정신과에서 그렇게 말했지만 의사 선생님은 감기약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사는 게 항상 좋을 수는 없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고 약은 늘려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병원은 증상을 치료하는 것인데 마음이 무채색인 것은 증상으로 볼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의사 선생님의 무심한 태도는 내게 위안을 주지만 다음 진료에서는 좀더 진지하게 말해봐야겠다.
하루콩이라는 어플이 있다. 하루하루의 감정상태를 귀여운 이모티콘과 한두 줄의 문장으로 기록할 수 있는 일기 어플이다. 감정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 신기하고 좋아서 유료결제까지 하고 한 달 정도 열심히 쓰다가, 며칠 연속으로 "잘 모르겠다..."라고 쓰게 되어서 그냥 그만두었다. 일도 하고 산책도 하고 많이 웃기도 했는데 그걸 별로 돌아보고 기록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튼 마음을 위해 많은 걸 시도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처음으로 젤네일이라는 걸 받아보았다. 손가락에 초록색 조약돌 열 개가 조르르 올라왔다. 색깔보다도 둥글게 다듬은 손톱 모양이 좋아서 2주째 자르지 않고 두고 있다. (원래 일주일에 한 번씩 아주 바짝 깎는다) 이제는 손톱이 손가락보다 길어져서 뭔가 단단한 것을 두드리면 톡톡 소리가 난다.
4년차. 올해는 수업자료를 거의 만들지 않았다. 1학기 초반까지는 그래도 이것저것 활동지를 만들다가 2학기 때는 그마저도 안 했다. 정말 교과서에 충실한 진도 중심 수업이었다. 수학 시간에는 티셀파를 켜고 사회 시간에는 인디스쿨 꼬꼬쌤?이 만들어준 피피티를 켰다. 놀라운 점은 그렇게 수업준비를 대충(?) 했어도 전혀 수업의 질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과서나 활동 자료를 보고 어느 부분을 취하고 어느 부분을 버릴지 결정하는 것, 특별한 자료 없이도 배움을 일으키고 교과서를 넘어선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정말 하나도 어렵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수업자료를 열심히 만들어 쓴 것은 기존 자료에 맞춰서 수업하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질 낮은 지문, 아이들의 수준에 맞지 않는 활동, 피상적이거나 기만적인 서술이 싫어서 그냥 내가 직접 자료를 만드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매일 다섯 시 여섯 시까지 남아가며 새롭게 활동을 구상하고 활동지를 만들고...
그 과정은 몹시 즐거웠고 (진짜다) 나를 교사로서 크게 성장시켰다. 그런데 이젠 교과서의 단점이 내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 개떡 같은 교과서로도 나는 좋은 수업을 한다. 필요하면 언제든 교과서를 덮고 공책을 편다. 어떤 활동이 아이들의 마음에 들어올지, 어떤 연습 방법이 기능 숙달에 효과적일지, 미리 준비하고 애쓰지 않아도, 안다. 수업 준비 열심히 하는 교사에서 수업 준비 대충 하는 교사가 되다니. 그런데 그게 퇴화가 아니라 진화였다니.
(그런데 그냥 4학년 교육과정이 다른 학년에 비해 평이해서 그런 걸수도 있다. 내년에는 2학년을 지망했기 때문에 다시 수업준비 쌔빠지게 해야 한다...)
추워도 꽁꽁 싸매고 저녁 산책을 여러 번 다녀왔다. (그래서 독감에 걸린 것 같다) 세상은 어떻게 되려는지 내 인생은 어떻게 되려는지... 그런 생각을 하면 답답해지므로 머릿속으로 가상의 영화나 뮤직비디오 같은 걸 만들면서 걸었다. 27살이 일주일 남았구나... 아이들과도 잘 지냈고 연애도 순조로웠고 커리어(?ㅋㅋㅋ)적으로도 발전이 많았던 해였다. 성적을 매기자면 '매우잘함'을 받기 충분하다. 1정연수도 받았고 해외여행도 가봤고...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많다. 결혼도 하고 싶고 대학원도 가고 싶고 언젠가는 책도 쓰고 싶다. 그런데 마음은 아직도 어렵다.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이 쉽고 마음만 계속 어렵다. 어디로 갈까. 어디든 갈까. 광장에서 들려오는 승리와 연대의 소식들도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새해에는... 일단 윤석열 탄핵을. 그리고 미루고 있던 치과를 가자. 지금은 일단 과자를 좀 먹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