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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의 일기
지난 몇 달은 말할 수 없이 공허한 마음으로 보냈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아무나 붙들고 "실례지만 대체 무슨 재미로 사세요?"라고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삶에 의미가 있나요? 기쁨이 있나요? 아니면 다들 그런 것 없이 그냥 사는 건가요?
그러나 진짜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을 용기는 없었고, 대신 붙잡은 철학자들은 하나같이 도움이 안 되는 말만 늘어놓았다. 마치 가게에서 "○○ 있어요?"라고 물었을 때 "거기 없으면 없어요"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점원처럼. 삶의 목적이요? 가치요? 그런 거 없어요. 혹시 대자존재라고 들어보셨어요? 그냥 그 무의미를 견디며 살아야 돼요. 어떻게 견디냐구요? 그것도 알아서 하셔야 돼요.
(이런 식으로 신도 주체도 타자도 역사도...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뭐야, 그러면 책을 쓰지 마세요)
거기 없으면 없어요...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고개를 들고 세상을 둘러보면 너무 많은 것이 있다. 이를테면 나는 지금 카페에 있는데,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고, 아기 손님 하나가 칭얼거리고 있고, 이스라엘 군대는 구호품을 받으러 줄을 선 팔레스타인 민중을 학살하고 있다. 앗 방금 아기와 눈이 마주쳤다. 아기는 내 등 뒤의 벽과 나를 구분해서 나를 인식한 것 같다. 철학자들은 그걸 구분 못해서 천 페이지짜리 책을 쓰던데. 모지란 인간들.
그런데 사실 나도 구분을 못 하겠다.
벽과 나
어제와 내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있는 것과 없는 것...
정신건강을 지키고 기쁨을 되찾기 위해 나는 있는 것들을 사랑해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방금 눈이 마주친 아기, 달리기를 하고 나면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듯한 감각, 커피의 맛, 예쁜 옷, 가족과 친구들. 세상에 있는 것. 내가 가진 것. 의심의 여지 없이 사랑스럽고 귀중한 것들. 그래, 철학책만 덮으면 세상엔 기쁨이 많다. 좋은 나라에 태어나 잘살고 있으니 난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가. 에피쿠로스가 말했듯 우리의 삶에는 삶밖에 없으니.
그런데 내 마음은 자꾸 없는 것들을 들여다본다. 온 세상이 텅 빈 구멍으로만, 무언가 중요한 것이 사라지고 비어 버린 자리로만 보인다. 할머니가, 어린 시절이, 멸종된 동식물들이, 사회의 연대와 가치가, 귀중한 리추얼들이...
(거기 없으면 없어요~ 알겠다고요~)
없는 것들. 진짜 같은 꿈. 어른들에게는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아이들의 고집과 슬픔. 죽은 사람들. 또는 죽은 취급 받는 사람들. 나는 그러니까 온 세상에 (내 마음처럼) 거대한 싱크홀을 만들고 싶은 것 같다. 반짝반짝 풍요로운 세상 한가운데서 "여기 무언가 없다", "여기 누군가 없다"라고 소리치고 싶다. 또는 무언가/누군가가 상실되었다고. 그 상실을 애도하라고. 이걸 사회운동이나 행위예술로 만들어 정의와 아름다움을 창출할 수도 있겠지만(이미 그러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 일단은 그냥 구멍을 내고 싶다. 여기 뭔가 없다고. 있어야 마땅한 것이, 한때 있었던 것이 이제는, 없다고. 없다고. 없다고.
"나는 이런 상상을 해봤다. 연인이나 친구, 그리고 그밖의 사람들이 이런 병(에이즈)으로 죽을 때마다 연인과 친구, 그리고 이웃들이 차에 시체를 쌓고서, 시속 100마일로 워싱턴에 달려가 백악관 문을 부수고, 현관 앞에서 목이 째져라 소리를 지르고, 입구 계단에 시체를 던져버리면 어떨까 하고. (데이비드 워나로위츠David Wojnarowicz, 고병권 <사람을 목격한 사람>에서 재인용)"
바우만은 인간이 없음에 대한 공포 위에 사회를 건설했다고 말하고,
라캉은 무의식이 없음을 중심으로 공전한다고 말하고,
들뢰즈는 없음이 이리저리 접히고 구겨져서 있음이 된다고 말하고,
바디우는 모든 있음은 없음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하지만,
다들 벽과 사람도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들일 뿐이고, (나도 그렇고)
반면 아까 만난 아기는 아직 기지도 못했지만 단번에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저기 낯선 사람이 있네 하고. 아기의 눈빛은 아기에게 생명과 영혼이 있음을 말해준다. 나도 아기를 낳으면 아기의 있음에 집중하며 의미 있는 삶, 기쁨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러나 내 마음은 말한다. 팔레스타인에서 건물 잔해에 깔려 죽거나 굶어 죽은 수만 명의 아기들에게도 생명과 영혼이 있었을 거라고. 그 없음을 어떻게 할 거냐고.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아 기르는 현명하고 선량한 나의 이웃들, 언젠가 그들의 마당에 거대한 구멍을 낼 수 있다면. 워나로위츠가 백악관 문을 부수듯이. 거기서, 그들의 당황한 얼굴 앞에서 내 사랑하는 없는 이들, 아름다운 없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큰 소리로 불러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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