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이름뭘로하지

제국과 흰발농게 본문

가볍게 쓰는 연습

제국과 흰발농게

slowglow01 2025. 8. 30. 17:19
우리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새만금신공항 백지화 공동행동


수라繡羅. 비단에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는 뜻. 간척사업으로 파괴된 새만금에 마지막으로 남은 갯벌의 이름이다. 수라갯벌은 흰발농게를 비롯한 수많은 멸종위기종의 서식지이자, 큰뒷부리도요와 같은 철새들의 핵심 기착지다. 그런데 이곳에 공항을 짓겠다고 한다. 불과 1.3km 떨어진 곳에 이미 군산공항이 있고, 그마저도 적자로 운영되고 있는데도. 대체 어떤 민간인이 비행기를 타려고 수라갯벌 같은 곳으로 찾아가겠는가? 사실상 군산 미군기지의 확장이라는 것이 시민단체의 분석이다. 한 조각 남은 생명의 땅을 아스팔트로 덮어 남의 나라 군대에 내어주겠다는 것이다.

전주에 있는 전북지방환경청 앞에서는 새만금신공항의 환경영향평가에 '부동의'할 것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천막농성이 무려 1,300일째 이어지고 있다. 나도 부동의 촉구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그곳에 몇 번 간 적이 있다. 청사가 위치한 전주혁신도시는 이름에서 연상할 수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생겼다. 넓고, 깨끗하고, 반듯하고, 모든 것이 새것이다.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우리를, 멀끔하게 입은 공무원들은 표정 없는 얼굴로 지나쳐 간다. 필사적으로 눈을 피하며.



지난 8월 12일, 서울행정법원의 새만금신공항 취소 판결을 바라는 한 달 간의 도보행진이 시작되었다. (이 날씨에 한 달을 걷겠다고!) 활동가들이 대부분 행진에 참여하느라 전주에 있는 농성장을 지킬 사람이 부족하다고 했다. 나는 '심심한데 잘 됐다'라고 생각해서 선뜻 일일 농성장 지킴이를 자원했지만, 35도 찌는 더위 속에서 아이스팩을 끌어안고 누워있으니 조금 착잡해졌다. 이 고생이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는 하루지만 다른 분들은 4년째 이러고 계시는 건데. 정말 부동의를 받아낼 수 있올까. 천막 밖에서는 사람들이 전동킥보드를 타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천막 안에는 그동안 지킴이들이 직접 만들고 쓰고 그린 그림과 글귀와 작품들이 가득하다. 모로 누워 있는 내 눈높이에는 '흰발농게와 함께 살아요.♡'라는 쪽지가 붙어 있다.

제국과 흰발농게, 라는 제목을 떠올리고 혼자 킥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한쪽에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어떤 의미로든)이 있고, 한쪽에는 몸길이 약 9mm의 멸종위기종 흰발농게가 있다. 우리는 지금 정부에게 전자 대신 후자를 선택하라고 요구하는 중이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건 메추리알로 설악산 울산바위를 치는 꼴이 아닌가. 지금 눈앞에 기후변화라는, 석유자본이라는, 식민주의라는 바위산이 서 있는데 우리에게는 허름한 천막과 손으로 쓴 팻말밖에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냥 집에 가고 싶어지는 동시에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뻗대고 싶어졌다. 작고 귀여운 흰발농게야....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천막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한숨 자고 일어나 거울을 보니 꼴이 가관이다. 얼굴 생김새가 예쁜지 못났는지는 별로 관심 없지만, 표정이 부루퉁하고 눈빛이 차가운 건 늘 신경이 쓰인다. 질문이 많고 불만이 많고 회의가 많으니 인상이 점점 사나워진다. 반면 이런저런 투쟁현장에서 만난, 환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상은 신기할 정도로 부드럽다. 화장기 없는 갈색 얼굴, 차분한 색의 천으로 만든 헐렁하고 긴 옷, 그리고 얼굴에 주름처럼 새겨진 선한 미소. 나는 왜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다 웃는 상인지, 아니면 웃는 상인 사람들만 환경운동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한 적이 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하고 불가능한 싸움을 하면서 그렇게 온화한 표정을 지을 수 있나. 

이모티콘으로라도 미소


전북환경연합 김지은 선생님이 해준 이야기가 있다. 새만금신공항을 막기 위해 매일 천막에서 서각기도(나무에 글귀를 새기며 기도하는 것)를 하시는 문정현 신부님께 '사랑한다는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런 글귀를 새겨 달라고 했더니, 신부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사랑하는 데 질문을 왜 해?"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결국 바라는 대로 만들어주기는 하셨지만 끝내 납득하지는 못하시더라고. 그 이야기를 하며 선생님도 웃고 나도 웃었다.

"사랑하는데 질문을 왜 해?" 나는 항상 질문이 많다. 강연 같은 데서 "질문 있으신 분?" 하면 내가 제일 먼저 손을 든다. 내가 쓰는 글은 절반이 의문문으로 되어 있다. 그중에는 진짜 질문도 있고, 질문의 탈을 쓴 불신이나 푸념도 있다. 세상은 왜 이렇게 이상할까? 나는 왜 이렇게 한심할까? 저 xx는 대체 왜 이럴까? 나는 질문들을 통해 지금의 내가 되었다. 영리하고 날카롭고 외로운 얼굴을 갖게 되었다. 

질문 많은 나는, 질문하지 않는 태도를 맹목과 비이성과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 왜 궁금해하지 않는 거지?(또 질문) 아무래도 좋다는 건가?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생각이 없나 봐. 그러나 어떤 질문은 세상을 풍요롭게 하지만, 어떤 질문은 세상과 영혼을 깎아 나간다. 거침없이 전진하며 지구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합리주의처럼. 또는 이것저것 의심하고 회의하다 심술궂은 얼굴이 되어 버린 나처럼. 세상 모든 것을 질문했다는 데카르트도 초상화를 보면 마치 배라도 아픈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쪽에는 제국이, 다른 한쪽에는 흰발농게가 있다. 질문: 어느 쪽이 이길까? 어쩌면 답은 빤하다. 그러나 질문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이 있다. 사랑하면 질문하게 된다지만, 어쩌면 일부러 질문하지 않는 방식으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갯벌을 사랑하니까 질문은 필요 없다. 큰뒷부리도요와 큰발농게를 사랑하니까 질문은 필요 없다. 농성장에서 만난 군산농민회 문정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환경청은 동의하기로 결심을 한 모양이야. 그래도 우린 할 것을 해야지." 나처럼 사사건건 질문해서는 1,300일 동안이나 천막농성을 이어갈 수 없다. 질문 없이 사랑하는 이들이 메추리알 하나를 들고 제국과 맞선다.

사실 난 수라에 가본 적이 없어 수라가 아름다운지 어쩐지 잘 모른다. 다만 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 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 아름답다는 건 알고 있다. 그들의 낡은 옷과 선량한 얼굴 그리고 구호를 외칠 때면 우렁우렁해지는 목소리들이. 나는 수라보다도 그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다. 그리하여 무시무시한 울산바위가 끝내 미소 앞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다. 참으로 볼만한 광경일 것이다.

다시 질문: 제국과 흰발농게 중 어느 쪽이 이길까? 어쩌면 답은 빤하지 않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동안 강력한 거대 제국들은 전부 몰락했지만 게는 수억 년째 생존하고 있다. 나는 그 사실에서 희망을 찾지만, 뭐 희망이 없어도 별로 상관없다. 게들은 원래 갯벌에서 산다. 도요들은 원래 갯벌에서 쉬어간다. 갯벌은 공항 부지가 아니라 게와 도요들의 집이다. 원래 그런 거니까 질문하지 말고 받아들이길.

함께해욥

 

'가볍게 쓰는 연습'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 유령 계엄  (0) 2025.12.04
없는 이름  (2) 2025.07.31
바다로  (0) 2025.07.07
음주/가무/파묘/글에서 술냄새 나요/좀비떼  (0) 2025.06.24
출세, 투쟁, 외로움  (0) 2025.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