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이름뭘로하지
210403 오늘의 일기 본문
2주 동안 일기를 쓰지 못한 것은, 회고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이런 말이 있는데, 나는 그동안 내 생활에서 한 발자국도 멀리 떨어지지 못하고 이번 시간에서 다음 시간으로, 하루에서 또 다음 하루로, 그저 발끝만 보며 건너가기 급급하며 지냈다. 어떤 순간은 행복했다. 어떤 순간은 괴로웠다. 어떤 하루는 괜찮았고 다른 하루는 피로했다. 한두 줄의 짧은 상념은 기록할 수 있었지만, 한 편의 글이 될 만큼 긴 호흡의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금 내 최대 관심사는 바로 다음 주 수업이다. 출퇴근을 편하게 하시려면 운전면허를 따셔야죠? 이 지역에서 계속 일할 건지, 아니면 공부를 다시 해서 내년에 고향으로 시험을 볼지 생각하셔야죠? 월급을 받기 시작했으니 돈 관리를 하셔야죠? 전부 의식 밖의 멀고 흐릿한 이야기다. 두클래스 학습지가 도착했으니 월요일 5교시 수학 시간에는 식목일 계기수업을 하고, 2단원 평면도형은 화요일에 시작해야겠다. 그럼 2단원 활동지를 완성할 시간이 하루 더 생기고......
발밑만 쳐다보면서 가는 사람은 자기 눈 앞에 먼 길과 너른 땅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시야가 좁아지고 마음이 강퍅해질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려면 쉼이 필요하다. 스물네 살에 과로사로 죽지 않기 위해서도 쉼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나는 진심으로, 덜 일하는 법을 모르겠다.
매일 네시 반이 되면 메신저의 주황불이 우르르 회색으로 꺼진다. 여섯 시쯤 되면 남은 주황불은 두세 개 뿐이다. 나, 옆반 선생님, 또는 특수 선생님. 일곱 시가 넘어가면 남은 한 분마저도 "선생님, 일찍 들어가 보세요..."라는 걱정을 남기고 떠나신다(이때가 가장 외롭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면 다들 멋진 저녁을 먹고 있다. 나는 물음표 백만 개와 함께 회색 메신저에 혼자 남는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 빨리 하시나요???
내 주간 시수는 20시간이다. 매일 평균 4시간 동안 수업을 해야 한다. 교육과정 재구성처럼 아름다운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더라도, 아주 충실하게 지도서에 입각한 수업만 하더라도, 아무튼 내가 160분 동안 뭐라고 떠들어야 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지도서를 펴고, 파워포인트를 켠다. 아이스크림도 함께 켜지만 이걸 토씨 하나 안 고치고 그대로 하면? 처참히 망한 노잼 수업이 될 것이 뻔하다. 자료들을 덜고, 더하고, 만들고, 수정해서 수업 준비를 대강 마치고 나면 밤 아홉 시가 된다. 나도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여기에 수학 익힘책 숙제 검사, 아침글쓰기 글감 찾기, 그리고 업무를 조금 하고 나면? '아, 이렇게 일하다가는 나는 죽는다. 진짜로 죽는다.'라는 엄정한 깨달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특히 수업이 많은 수요일과 목요일은,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기력이 쭉 빠져서 적어도 한 시간은 꼼짝 않고 핸드폰만 쳐다보게 된다. 그러면 퇴근 시간도 그만큼 늦어지고 피로도 더해진다.
대충 할 수는 없다. 열일곱 명 아이들의 1년이 나에게 걸려 있다. 나는 수업 준비를 대충 할지 열심히 할지를 선택할 수 있지만, 이 아이들은 어떤 수업을 들을지 선택할 수 없다. 이 생각을 하면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지 못하다는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 굳이 구글 검색 한 번 더 해서 피피티에 이미지 한 장 더 집어넣고, 굳이 퀴즈 하나 더 만들고 게임 하나 더 고민하는 것이다. 아니, 사실은 다 핑계다. 실은 재미 없는 수업을 하는 나를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다. 솔직히 내가 수업 하나를 성공하든 망하든 아이들의 인생이 그렇게 크게 바뀌겠는가. 하지만 그전에 이건 내 직업이고, 나는 '일 못하는 나' 같은 건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수업이 잘 굴러가지 않으면 나는 불행해진다. 그런데 대충 하기 싫어서 열심히 해도 너무 힘들어서 불행해진다. 내가 불행해지면 아이들에게 관심 하나를 못 주고,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부적절하게 하게 된다. 결국 나쁜 교사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일을 못한다는 것이므로......(반복) 지금 나는 대충과 열심 사이 불행의 늪에 빠져 있다. 그리고 여기 좀더 오래 있다가는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이 위험해질 것이다.
진심으로 궁금하다. 다들 어떻게 하시는지. 경력이 쌓이면 좀더 수월해지리라는 것은 예측 가능하다. 그런데 저경력 교사들은 대체 어떻게 일찍 퇴근해서 멋진 저녁을 드시나요??? 어떻게 수업 준비를 그렇게 빨리 마치고도 망하지 않는 수업을 하시나요??? 아니면 망한 수업을 하고도 괜찮으신 건가요??? 나는 정말이지 알아야겠다. 알아서 나도 좀 배워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일 년 만에 병가를 쓰거나, 아니면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하여튼 요즘 것들은... 떼잉...!!' 이런 못난 마음에 잠식당할 지도 모른다. 여기 들어오신 분 중에 워라밸을 사수하고 있는 저경력교사가 있다면 댓글로 좀 알려주세요. 메시지 보내셔도 됩니다. 저 진심이에요...

여기까지가 우는 소리였다면, 사실 웃는 소리도 할 얘기가 만만치 않게 많다. 요즘 나는 교사가 아닌 사람만 만나면 오늘 우리 반 어린이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나와 우리 반이 서로 얼마나 좋아하게 되었는지 말하고 싶어 안달을 한다(다행?히도 교사가 아닌 사람을 만날 일이 요즘은 거의 없다). 3월 첫 주의 내 바람이 맞았다. 시간이 지나며 우리는 점점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고 있고, 그럴수록 서로 익숙해지고 있고, 그럴수록 서로 안정을 찾고 있다. 나는 여전히 혼을 내고, 실망하고,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매일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내가 그럭저럭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내가 이 일을, 이 아이들을 비록 (매우) 힘겨워할지언정 결코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아이들은 늘 웃으면서 나에게 온다. 그러면 나도 행복하게 웃을 수밖에 없다. 물론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이들이 인사하고 집에 가는 순간이지만. 전라남도 내 고향은 벚꽃이 지기 시작했지만 전라북도 내 직장은 이제 막 한창이다. 다음 주면 개나리, 민들레, 제비꽃도 만발할 것이다. 죽어도 수업 준비 하기 싫은 날이 오면, 교실을 나와서 아이들과 봄꽃을 보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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