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이름뭘로하지

210519 근황 본문

2021 교단일기

210519 근황

slowglow01 2021. 5. 19. 14:51

1.
이제 하루하루가 전처럼 무겁지 않다. 잘하고 있는지, (나든 아이들이든) 나아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고민이 많고 여전히 월급보다 두 배쯤 일하고 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전보다 가벼워졌다. 크게 괴로워하지 않고 크게 기뻐하지도 않고,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3월처럼 크게 흔들리지도 않는다. 아이들을 보내고 일기를 쓰는 대신 그저 오늘은 좀 힘들었어, 오늘은 좀 재밌었어, 이 정도로만 생각한 뒤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한다. 퇴근하고 나서는(여전히 꼴등 퇴근이지만) 저녁을 먹고 넷플릭스를 보면서 뜨개질을 한다. 가끔 그런 생각은 한다. 적응하거나 능숙해진 게 아니라 그냥 더 긍정적으로 변한 게 아닐까? 사실 3월과 정확히 똑같은 문제와 마주하고 있는데 이제 그것 때문에 울지 않을 뿐인 거 아닐까? 하지만 그것도 어쨌든 기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2.
우리 반 아침활동은 원래 단순했다. 월수금에는 짧은 글쓰기, 화목에는 독서. 그런데 아침 시간에 아이들이 떠드는 게 너무 싫어서 아침활동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짧은 글쓰기, 시 읽기, 수학 문제 풀기, 바른 글씨 쓰기, 알파벳 쓰기 중 2~3개를 넣어 양면으로 인쇄해서, 아이들이 오기 전에 책상 위에 한 장씩 올려놓는다. 이제 아침 시간에 우리 반은 조용하다. 아이들은 바쁘고 나는 여유롭다. 매일 아침활동지를 만들면서 나는 마녀처럼 웃는다. 내일은 또 어떻게 이 녀석들의 문해력과 기초학력을 길러줄까? 낄낄낄...
그리고 일찍 오는 몇몇 아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아침 시간 안에 아침활동지를 마무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도 마음이 든든하다. 활동할 때 아이들 사이의 속도 차이가 심한데, "선생님~ 다했어요." "아침활동지 꺼내서 마무리하세요." 문제 해결!
하지만 "옆반은 좋겠다. 아침활동지 안 해서..."라는 말에는 아무래도 좀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제 아침에는 칠교판을 나눠주고 이런저런 모양들을 만들어 보게 했다.
"선생님~ 왜 오늘은 칠교놀이 해요?"
"왜? 아침활동지 하고 싶어요?"
"아니요!!!!!!!!!"
낄낄낄...

3.
월요일 음악시간, 리듬악기 세트를 꺼내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어디를 삐끗해본 적이 없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게 삐끗이구나!!! 이틀이 지나 지금은 많이 아프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괜찮지도 않다. 빨리 나아야 자전거를 타는데. 며칠만 지나면 너무 더워져서 못 탈 텐데...
원래 365일 골골거리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허리 걱정을 하려면 10년은 기다려야 하는 줄 알았다. 현실은? 발령 두 달 반 만에 교사 직업병이 문밖을 기웃거리는 게 느껴진다. 일단 목을 너무 많이 쓰고, 쉬는 시간에는 귀가 아프고, 화장실 참는 것도 일상이 됐다. 어어~ 성대결절 이명 방광염 어서오고~

4.
스승의 날 전날. "2학년 때 담임선생님에게 고마움을 담아서 편지를 보내면 반가워하시겠지요? 편지 보내고 싶은 친구들한테는 카드를 나눠줄게요." 말하자 아이들이 줄을 서서 카드를 받아갔다. 모르는 글자는 나한테 물어 가며 영차영차 편지를 쓰는 아이들을 보자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일종의 인정욕구였다. 존경하는 선배 교사들이여, 보십시오! 내가 당신의 전 제자들을 이렇게 잘 키우고 있습니다! 물론 카드를 받는 선생님들은 아무 생각 없으시겠지만 나 혼자 그랬다는 얘기다.
그리고 점심 시간. 밥을 먹고 교실로 올라가려는데, 계단에서 우리 반 어린이 얼굴이 빼꼼 보였다가 사라지더니 "야악!!!! 선생님 오신다!!!" "선생님 @%$#%$&!!!!!" 소리가 1층까지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이건 모른 척해주고 싶어도 도저히... 그리고 교실 뒷문을 열자 기다리던 아이들의 합창. "선생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리고 그 후 30분 동안 아이들은 우리가 이 깜짝이벤트(사랑해요라고 외친 게 다잖아...)를 준비하느라 진짜 조마조마했다, 선생님한테 안 들키려고 뛰어가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아프다, 선물로 내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나는 편지도 썼다, 종알종알 재잘재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선생님! OO는 편지봉투에 100원도 넣었어요!"
"뭐?"
아주 뿌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OO에게 100원을 돌려주고(편지만 받을게^^;;), 단체사진을 찍고, 아이들을 집에 보내고, 나도 진짜로 얘들을 사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5.
5.18 계기수업은 잘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내가 아직 이 수업의 목표를 뚜렷이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5.18은 내게 약한 트라우마다. 광주에서 초중고를 다녔으니 매년 이맘때면 5.18 영상을 보았는데, 어린 마음에는 전두환이며 민주주의며 하는 것보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두들겨패는 모습이 더 먼저, 더 깊게 남았다. 사람들이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그냥 죽었어. 칼에 찔려 죽고, 총에 맞아 죽고, 쓰레기처럼 쌓여 버려졌어. 그 막연한 두려움은 아직도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받은 것과는 조금 다른 교육을, 그러니까 공포와 슬픔이 아닌 다른 것을 말하고 싶었는데 그게 뭔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수업을 준비하는 내내 <소년이 온다> 작가의 말의 한 구절이 메아리쳤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 전교조에서 만든 계기교육 자료를 많이 참고했고 그것은 훌륭한 자료였지만 어쨌든 내 마음 속의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수업은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5.18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는 통로가 인터넷이나 유튜브가 아니라 내가 되었다는 데 의의를 두고 싶다. 아무튼 그 수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이것이었다.
"선생님, 그래서 전두환은 지금 어디 있어요?"
"지금... 자기 집에 있지요. 잘 살고 있어요."
"(다같이) 왜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의 왜요???를 들으며 나는 너무너무 부끄러웠다. 세월호 계기수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월호는 기준치보다 두 배나 많은 짐을 싣고 있었어요. 왜요??? 해경은 승객들을 한 명도 구하지 않았어요. 왜요???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세상을 비판하는 어린애였지만, 교실 안에서, 어린이 앞에서 나는 어른으로, 기성세대의 대표로 서 있었다. 얘들아, 왜냐면, 왜 그런 일이 있었냐면... 대답하기 너무너무 부끄럽다.
의미 있는 계기교육을 하고 싶었다. 민주주의의 의미, 국가의 의무, 시민의 역할, 공동체와 연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내 능력 부족으로 세상이 무섭고 불합리한 곳이라는 것만 가르친 것 같아서 미안하다. 계기수업을 또 하게 된다면 시수를 2차시 이상 써서 더 좋은 수업을 하고 싶다.

6.
전면등교를 하는 우리 학교. 이 학교에 발령받은 게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얘네들을 데리고 원격수업을 하라면 난 차라리 죽어 버릴 것이다. 매일매일 얼굴을 보고, 컴퓨터 대신 종이와 연필로 수업하는 전통적인(?) 하루하루가 계속되기를, 그리고 다른 초등학교에도 하루빨리 이런 일상이 돌아오기를 바란다. 올해가 가기 전에 리코더 수업을 할 수 있을까. 학급운영비로 리코더 많이 사뒀는데 차라리 리듬악기를 살 걸 그랬다. 애들한테 레인스틱 소리 들려주면 "우와아!!!" 할 텐데.

7.
내일도 재밌게 보내자 얘들아. 내일모레는 선생님 생일이야. 절대 안 알려줄 거지만.

'2021 교단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방학 숙제  (0) 2021.07.25
3월과 6월  (0) 2021.06.05
210405 오늘의 일기  (0) 2021.04.05
210403 오늘의 일기  (0) 2021.04.03
210320 3월 셋째 주  (0) 2021.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