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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1학기 국어 1단원 시에 나타난 감각적 표현 알기 본문

2022 수업일기

3학년 1학기 국어 1단원 시에 나타난 감각적 표현 알기

slowglow01 2022. 3. 11. 22:57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 정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신이 아니라 몸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가 정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아주 많은 일이 실은 몸의 일이다. 사랑도 고뇌도 이상도 절망도 전부 몸의 일. 그리고 공부도 몸의 일. 그래서 3학년 국어는 몸의 말, 감각적 표현을 익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를 읽어보기 전에 먼저 시를 바라보고, 맡아보고, 맛보고, 들어보고, 만져보는 것이다.

몸의 말을 배우려면 무엇보다 몸을 움직여야 한다. '시에서 말하는 이는 무엇을 하고 있나요?'라고 묻는 교과서는 덮어 두고, 김기택의 동시집 <빗방울 거미줄>에서 시 두 편을 빌려 왔다.

뜨거운 호두과자

오른손이 뜨거워 왼손
왼손이 뜨거워 오른손
두 손 다 뜨거워, 후딱, 입에 넣은 호두과자

놀라 통통 튀는 호두과자
헉헉거리는 입 구불거리는 혀
이빨로 입천장으로 펄쩍 뛰는 호두과자
뜨거운 김을 뿜느라 벌름거리는 콧구멍

왼 혀가 뜨거워 오른 혀
오른 혀가 뜨거워 왼 혀
혀가 다 뜨거워, 꿀꺽, 삼켜 버린 호두과자

쥐지도 펴지도 못하는 손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엉덩이
감지도 뜨지도 못해 껌벅거리는 눈
벌리지도 다물지도 못해 뻐끔거리는 입

시를 읽기 전에 먼저 아주 뜨거운 상상의 호두과자 하나를 손에 쥐어 보자고 한다. 앗 뜨거 앗 뜨거 하면서 난리법석이다. 자 이제 호두과자를 입에 넣어 보세요! 하 흐거! 분명 오만상을 쓰고 있을 표정들을 마스크 때문에 보지 못해 아쉽다. 이제 호두과자를 삼켜 보세요! 아이들이 뜨겁다며 목을 움켜쥔다. 그 느낌을 잘 기억하라고 말한 뒤, 활동지(래봤자 그냥 시를 타이핑한 종이. 나는 이제 요란한 활동지를 만드는 데 힘을 덜 쏟기로 했다)를 나눠주고 시를 읽어주었다. 그런 다음 재미있는 표현, 감각이 잘 나타난 표현에 밑줄을 그어 보라고 한 뒤, 어떤 표현에 밑줄을 그었는지 물어보고 아이들의 대답을 칠판에 한가득 적었다.

ㅇㅇ이는 "펄쩍 뛰는 호두과자"가 재미있구나. 그런데 호두과자가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왜 펄쩍 뛰었다고 썼을까요?

혀로 호두과자를 튕겼으니까요.

맞아요. 내가 호두과자를 튕겼는데, 호두과자가 펄쩍 뛰었다고 썼어요. 시인들은 가끔 이런 거짓말을 해요. 이렇게 쓰면 내 마음이나 감각을 더 잘 나타낼 수 있거든요.

다음으로는 교실을 반으로 나누고, 반쪽이 시를 소리 내어 읽는 동안 나머지 반쪽은 시에 맞춰 연기를 해 보았다. 그런 다음 역할을 바꿔서 다시. 아이고 뜨거워! 하고 신이 난 아이도 있고 수줍은 아이도 있지만, '후딱'에서는 모두 호두과자를 홀딱 입에 넣는 동작을 하고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엉덩이'에서는 다같이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물론 가장 혼신의 연기를 하는 사람은 나다. 저학년 담임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호들갑을 잘 떠는 줄 처음 알았다. 아이들 앞에서 혼자 일인극을 하고 씰룩씰룩 율동을 해도 전혀 민망하지 않다. 관객들이 웃어만 준다면.

가을에 은행나무 길을 걸으면

뒤꿈치를 들고
살살 피하며 걸었는데도
은행은 신발 밑에서 으스러지며
기어이 똥 냄새를 터뜨린다.

신발에 달라붙어
자꾸만 따라오는 똥 냄새.
아무리 빨리 달려도
내 뒤에 붙어 따라오는 똥 냄새.

똥 냄새가 눈치채지 못하게
얼른 버스를 탔지만
똥 냄새는 어느새
버스 안까지 따라와 있다.

갑자기 동그래지고 커지는
승객들의 눈알.
벌름거리는 콧구멍.

나 똥 싼 거 아니에요.

고개를 저어도 손사래를 쳐도
눈썹 사이를 찌푸리며
사람들은 자꾸 힐끔거린다.

이번에도 시를 읽고 감각적 표현에 밑줄을 그은 뒤, 선생님을 도와줄 친구 두 명을 뽑았다. 한 명은 '나' 역할, 한 명은 '똥 냄새' 역할이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벌써 웃는다. 여기(교실 앞)는 은행나무 길이고요, 여러분은 버스에 탄 승객들이에요. 라고 말하자 손잡이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동작을 한다. 예뻐 죽겠다.

내가 시를 읽는 동안 두 학생들은 거기에 맞게 연기를 한다. '나'는 도망치고 '똥 냄새'는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쫓아간다. 관객들은 배우들의 열연에 깔깔 웃다가, '나'가 버스에 타자마자 승객들로 돌변해 짜증스런 얼굴로 코를 싸쥐고 손부채를 부쳐댄다. 표정이 너무 실감나서 정말로 누가 방귀라도 뀐 줄 알았다.

같은 연극을 서너 번 정도 더 했다. 두 번째부터는 세 명을 뽑아서 시를 읽는 역할도 학생에게 맡겼다. 연극이 거듭될 수록 시나리오도 조금씩 바뀐다. '나'를 따라가는 '똥 냄새'의 몸짓은 어느새 헐리우드 액션 뺨치게 역동적으로 변해 있고, 승객들은 '나'를 힐끔거리는 게 아니라 "똥쟁이래요~" 하고 노래를 부르며 놀리기 시작한다. 마지막 시도에는 손을 든 아이들 전부에게 역할을 주었더니, 겁에 질린 '나'들을 추격하는 똥 냄새 브라더스의 습격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의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나도 그냥 깔깔 웃었다.


기분 좋은 수업이었다. 수업이 끝나고도 한참 혼자 히죽거렸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너무 훌륭하게 잘해서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일단 수업 내내 아무도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는 게 놀랍다. 똥 얘기를 했는데도! 그리고 누구 하나 빼지 않고 협조적으로 참여해 주었다. 이렇게 기특할 데가... 이 학생들과 함께라면 해보고 싶은 수업 다 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하다가 수업의 성패에 있어 교사 변인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실감했다. 배움은 아이들에게 달려 있다. 교사는 최선의 환경과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 애쓸 뿐이고. 수업이 잘되었다고 으쓱할 것도 없고 안되었다고 필요 이상으로 좌절할 것도 없다. 물론 나는 엄청 으쓱해서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지만...^^

앞으로 재미있고 아름다운 시를 몇 편 더 함께 읽고 싶다. 그러다 날씨가 더 따뜻해지고 꽃이 피기 시작하면, 공책을 들고 다 같이 시를 쓰러 나가고 싶다. 그 시들을 잘 모아서 (작년에는 결국 못 만들었던) 학급문집을 만들어주고 싶다. 하고 싶은 게 많은 3월이라 기쁘다. 같이 재미있는 것들을 잔뜩 하자 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