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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수업일기

3학년 1학기 학급임원선거 전 민주시민교육

slowglow01 2022. 3. 20. 13:56

3월 9일
그날은 새벽 두 시 반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개표율이 80퍼센트가 넘어갈 때까지 깨어 있다가 착잡한 마음으로 잠들었는데
아침에도 기적은 일어나 있지 않았다.
이제 세상은 어떤 곳이 될까. 약하고 외롭고 억울한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갈까.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무거운 마음과 눈꺼풀을 안고 출근해
1교시 전담 시간 동안 다음 수업을 준비했다.
2교시는 사회.
교과서는 펴지 말라고 했다.
오늘은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얘기를 할 거예요.
우리가 지난주에 만든 약속 있죠? 선생님이 그걸 바꾸려고 해요. 오늘부터는 새로운 약속으로 생활할 거예요.
아이들은 아직 별 반응이 없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요? 그러세요 그럼... 하는 온순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젠장 너무 착한 어린이들이잖아. 나는 새 약속을 칠판에 붙이고 하나씩 큰 소리로 읽는다.

나중에 이 수업을 다시 한다면 "5. 앞으로는 선생님만 규칙을 만들거나 없앨 수 있다."를 추가할 것이다.

아이들은 그제야 새 약속이 심상치 않은 것임을 눈치챈다. 특히 2번 약속에 대한 반발이 심하다. 그럼 밥 먹기 싫으면 시험 일부러 못 보면 되겠네요? 하고 (어쩐지 신이 난 얼굴로) 물어보는 아이들도 있다. 영리한 아이는 어제가 어떤 날이었는지 떠올리고는 아~ 이거 왜 하는지 알겠다. 라며 뿌듯하게 웃는다.

선생님! 그럼 전에 있는 약속은 다 없어지는 거니까 우리 이제 시간 안 지켜도 돼요?

(앗.. 예리한데..?) 네. 안 지켜도 돼요. 엉망진창으로 지내도 상관없어요.

선생님! (4번 약속에서) 무슨 벌 받아야 돼요?

(근엄한 표정으로) 엉덩이로 이름 쓰기 해야 돼요.

으아아 안 돼!

음... 여러분이 새 약속을 싫어하는 것 같으니, 선생님을 설득할 기회를 주겠어요. 5분의 시간을 줄 테니 그동안 모둠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 마음대로 약속을 바꾸면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해 공책에 적어 보세요. 말이 되는 이유가 많으면 약속을 바꾸지 않겠어요.

그냥 이쯤에서 사진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문제 속에 이미 답이 있지만 3학년에게는 이것도 쉽지 않다. 아이들은 진지한 목소리로 토의를 시작하고, 나는 교실을 돌아다니며, 도와주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슬쩍슬쩍 도움을 준다.

그리고 발표 시간. 나는 아이들이 하는 말을 전부 칠판에 적고는, 여러분의 말이 타당하니 약속을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아이들은 딱히 크게 기뻐하지 않는데, 이쯤 되면 이 상황이 진짜가 아니라 수업을 위한 쇼라는 것을 다들 눈치챘기 때문이다.

여러분 말이 다 맞아요. 선생님 마음대로 약속을 바꾸면 안 되는 이유는, 여러분의 동의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또 우리가 모두 함께 만든 약속이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또 선생님 혼자 약속을 마음대로 바꾸면 피해를 받는 친구도 생기겠죠. 여러분이 말해준 이런 이유들을 좀 어려운 말로는 이렇게 불러요. 공책에 같이 적어 봅시다.

그리고 나는 쓴다. 칠판의 가장 위쪽에, 가장 큰 글씨로, 일부러 느리게 또박또박,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민 주 주 의


아이들이 아아~ 하는 소리를 낸다. 들어본 적은 있는데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한 글자씩 뜻을 풀어 설명해준다. '주의'는 생각이라는 뜻. '민'은 국민. '주'는 주인.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국민주인생각'이에요. 아이들도 따라 쓴다. 국민 주인 생각 이라고.


우리 반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라고 묻자 선생님이라는 대답이 가장 처음으로 나온다. 앗, 우리 반의 주인이 선생님이면 마음대로 약속 바꿔도 되겠네? 바꿔야겠다. 안 돼요!!

교장선생님이요!

교장선생님이 우리 반 주인? 그럼 교장선생님 오시라고 해서 우리 반 규칙 바꿔달라고 해야겠네요.

안 돼요!

이런 식으로 우리 반의 주인이 우리라는 얘기를 끌어낸 뒤, 이번에는 우리 나라의 주인이 누구일까요, 라고 물었다. 대통령? 아니에요. 선생님? 음... 맞긴 한데, 아니에요. 우리 엄마 아빠? 이것도 맞아요. 맞기는 한데, 또 우리 나라의 주인이 누구냐면 말이에요,

여러분이에요.

아주 잠깐 정적이 흘렀는데, 그 순간이 아이들의 마음에 아주 작은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곧 사라질 작은 파동이라도.

여러분이 이 나라의 주인이에요. ㅇㅇ이가 주인이고, ㅁㅁ이가 주인이고, 물론 선생님도 주인이지요. 대한민국은 우리 국민들이 주인인 나라예요. 그래서 국민이 주인이라는 생각,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리고 대통령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일해달라고 주인인 우리가 직접 뽑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을 대표라고 해요.

그럼 우리 반의 대표는 누구일까요?

반장이요!

이런 식으로 임원선거 이야기로 넘어가서 설명을 계속했다. 사실 이때쯤부터는 대사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두지 않아서 많이 중언부언했다. 반장의 역할이 무엇이고~ 반장을 뽑는 우리의 자세는 어때야 하고~ 그게 민주주의랑 어떤 상관이 있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설교조로 늘어놓은 것 같아 후회가 된다. 아무튼 아이들은 선거를 한다니까 신이 났다. 벌써 출마 의지를 밝히는 아이들도 있다.

종이 칠 때가 됐다. 마무리 멘트는 이렇게 했다.

여러분 오늘 집에 갈 때는, 이렇게 어깨 쭉 펴고 으쓱으쓱 걸어 보세요. 그러다 누가 "왜 이렇게 당당하게 걷니?"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세요. "저는 우리 나라의 주인이니까요!"

아이들이 내 동작을 따라하며 웃는다. 웃었으니 됐다. 대통령이 누가 되고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아이들은 계속 웃으면서 어깨 펴고 으쓱으쓱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교실만은 그런 곳이 되었으면.


선거는 다음주 월요일이었다. 5명의 학생이 입후보했고 득표순으로 반장과 부반장이 정해졌다. 평소 모습이 의젓하고 연설도 알차게 한 학생들이 당선되었다. 아이들은 아이들이 할 일을 훌륭하게 다했다. 나머지는 어른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