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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1일.

slowglow01 2023. 1. 1. 22:05

보고 싶은 우리 할머니는 내가 뭔가 한심한 행동을 할 때면(무척 자주 있는 일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너는 지금쯤 시집 가서 남편과 시가족들에게 매맞고 있었을 거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요즘 이 말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비록 12~13살 아이에게 교육적으로 적절한 말은 아닐지언정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나는 게으르고 잡생각을 많이 하며 손끝이 야무지지 못한 사람이다. 이런 특성은 21세기의 초등학교 교사에게도 별로 장점은 아니지만 20세기의 아내/며느리에게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단점이었을 것이다. 반면 책을 많이 읽었고 시험을 대체로 잘 본다는 나의 장점들은 21세기에는 꽤나 괜찮은 능력으로 간주되는 것들이지만, 전근대의 평민들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넘어 아예 발견조차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백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나는 아마 평생 바보천치 취급을 받으며 (그리고 아마 두들겨 맞으면서) 살다가 죽었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철렁해진다.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전부 얼마나 순전한 우연인지.

교육이나 양육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유전 대 환경'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선택권이 없다는 점에서 내게는 둘이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랜덤한 유전자 조합을 가지고 태어나 랜덤한 환경에 던져져 살아간다. 뽑기운이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지만(그리고 보통 전자는 후자가 열등하고 무능력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서 있는 그곳까지 오로지 제 발로만 걸어온 사람은 없다. 떠밀려 왔고 또 떠밀려 갈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의 의미는 우리의 뜻대로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패배주의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우리의 운신폭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좁은지를 명확히 인식한 뒤에야만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를 거짓 없이 판단할 수 있다. 자기 발끝조차 보이지 않는 좁고 캄캄한 이곳에서, 오로지 명료한 정신으로 불가능성을 응시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여기까지가 실존주의 철학을 다룬 책을 몇 권 읽고 나서 내가 결론 내린 내용이다. 사르트르는 농non, 그런 거 아니야 라고 말할지 몰라도.



글씨를 잘 쓰는 아이가 있다. 바르고 침착하고 다정한 아이다. 점심 시간이면 옆 친구와 장난 한 번 치지 않고 또박또박 예쁜 글씨로 알림장을 꾹꾹 눌러 쓰고는 꼭 한 줄을 추가해서 검사 받으러 온다. "선생님 사랑해요." 그 문장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지만 내가 잘 가르쳤다거나 잘해줘서 이런 말을 듣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아이는 날 만나기 전에도 이미 바르고 침착하고 다정했고, 아마 내가 아닌 다른 담임을 만났더라도 똑같은 알림장을 써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담임이 아니라 내가 이 아이를 만났으니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가! "선생님도 사랑해요♡"라고 답장을 해주는 정도가 내가 이 행운에 보낼 수 있는 감사의 전부다.

그러나 하루 걸러 한 번씩 눈물바람이 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고작 여덟 살의 인생에 어쩜 저렇게 불행과 외로움이 많을 수 있는지 안쓰러워 나까지 눈물이 난다. 가정과 사회가 아이의 마음에 커다랗게 구멍을 뚫어 놨는데, 고작 한 학기 만나고 헤어지는 담임이 대체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 하루는 방긋 웃다가도 다음날이 되면 도로 슬픈 아이가 되어서 돌아오는데. 그러나 실은 바로 이 답답한 상황이야말로 내가 교사로서 의미를 가지는 이유, 내가 뭐라도 해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이 아이에게는 다른 어떤 담임이 아닌 지금 나의 행동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어쩌면 선생님이란 유전과 환경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두 마리의 거대한 몬스터 앞에서 아이 손을 잡고 캄캄한 샛길을 찾아헤매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찌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희박한 가능성을 찾아서.

아프간에서 온 아이들의 첫 등교길을 손을 잡고 함께하는 故노옥희 울산교육감


여기까지 써놓고 글을 한참 동안 버려두었다가 결국 해를 넘기고 말았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무사히 스물여섯 살이 되었다. 돌아보면 나쁘지 않은 한 해였다. 유독 새로 시작하는 것이 많은 해였는데 무엇보다 근무지를 옮기며 고향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프랑스어도 배웠고 차를 사서 운전도 시작했으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우리 할머니와는 이별을 했다. 후회가 없는 건 아니지만(특히 우리 아이들에게는 항상 더 잘해줄 수 있었을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이보다 더 열심히, 잘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잘났던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기 때문에 무사히 새해를 맞고 자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모른척할 수가 없다. 작년 한 해 발생한 모든 죽음들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던 것처럼. 할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나는 한 사람의 죽음이란 사실 하나의 세상이 전부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는데, 그러고 나니 마치 악몽처럼 매일 수십 개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에 잠을 이루기 어려워졌다. SPC 제빵공장에서 소스 배합 기계에 끼어 숨진 스물세 살 노동자, 신당역에서 순찰을 돌다 스토커에게 살해당한 20대 역무원, 그리고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목숨을 잃은 158명의 사람들. 요즘 곤경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누칼협', 즉 누가 (그런 상황이 되도록) 칼 들고 협박했냐고 비아냥거리는 것이 유행이던데 사실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정말로 사방이 칼날이다. 민영화와 행정공백이, 여성혐오와 사회적 약자 차별이, 자본의 횡포와 노조탄압이 칼날이 되어 정말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윤석열 대통령은 오늘 신년사에서 '노동, 교육, 연금' 3대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또) 말했다. 그가 말하는 교육개혁이 어떤 것인지는 2022 개정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전부 '자유민주주의'로 대체된 것, '노동'과 '성평등'이 지워지고 '기업의 자유'와 '가족 역할'이 강조된 것이 설명해 준다. 서울시의회는 올해 서울시교육청 예산을 5,688억 원 삭감했다. 삭감된 예산에는 「우리가 꿈꾸는 교실」(학생 맞춤형 교육과정) 운영비, 더불어키움(공영형)유치원 운영비, 학교밖 청소년 교육 참여 수당, 학생인권·노동인권·성인권 교육 예산 등이 있다.

우리 학교는 농어촌학교이고, 상당수의 학생들이 (나처럼)결손가정, 다문화가정, 차상위계층 중 하나 이상에 해당되어 있다. 얼마 전에는 학생복지 예산을 쓰러 아이들과 키즈카페와 대형마트에 다녀왔다. 신이 나서 두리번거리는 아이들에게 선생님 손을 꼭 잡으라고 했다. 아무리 꼭 잡아도 여덟 살 아이들의 손바닥은 말랑말랑하다. 내년에도 이런 나들이를 갈 수 있는 예산이 있을까.

칼날을 든 '몬스터'가 사방에 가득한, 자기 발끝조차 보이지 않는 좁고 캄캄한 이곳에서,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손을 잡고 나는 샛길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가 노동자든, 여성이든, 성소수자든, 장애인이든, 이주민이든, 저소득층이든, 그리고 어린이든... 하나도 두렵지 않다고. 당당하고 존엄하다고. 거짓 없이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잘난 새 교육과정을 버려야 할 것이다. 어쩌면 다른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다시,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를 떠올린다. 인간이란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우리는 2023년의 한국에 던져졌고 사르트르는 2차대전 중 점령된 파리에 던져졌다. 떠밀려온 우리. 칼을 든 상대 앞에서 가진 것은 명료한 정신뿐인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갈까. 사르트르는 참여-앙가주망(engagement)-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다. 직접 사회에 참여함으로써 조금씩 세계를 변화시키고 자기 선택의 폭, 행위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르트르는 정치에 활발하게 참여하며 스스로 대안 정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새해 첫날에는 지킬 수 있든 없든 일단 계획을 세워봐야 제맛이다. 몸무게를 5kg 늘려야지, 돈을 xxxx원 모아야지, 프랑스어 DELF B1 자격증을 따야지, 책을 xx권 읽어야지, 블로그에 글을 xx개 써야지... 그리고 계속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연약하고 존엄하고 억압 아래 있는 것들을. 말이 아닌 오로지 실존으로.

프랑스어에는 도무지 한글로 표기되지 않는 괴상한 발음이 많지만 앙가주망은 정말로 앙가주망이라고 읽는다. 새해 계획에 평화, 사랑, 그리고 앙가주망이라고 적는다. 새해,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투쟁하는 이들의 곁에 더 많은 연대의 손길이 함께하는 한 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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