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이름뭘로하지

20220803 여름방학 본문

기타

20220803 여름방학

slowglow01 2022. 8. 3. 20:33

방학식은 목요일이었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정확히 일주일이 되었구나

스텐실(공판화) 수업 결과물

그동안 마음이 많이 지쳐 있었다. 학기를 마무리하고 관사를 정리하고 짐을 택배로 보내고... 학기의 마지막 2주일쯤은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는 데 온 정신을 다 쏟아야 했다. 웃어주자, 만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사랑과 관심을 바닥까지 닥닥 긁어서 다 주고 오자. 힘들어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전교조에서 받은 케이크

방학식 날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안아주고 있으려니 한없이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거지? 첫 해였던 작년과 비교해 보면 올해는 (당연하지만) 수업도 학급운영도 훨씬 잘했고 내 삶의 질도 훨씬 높았다. 내 마음에 여유가 있으니 생활지도도 일관성 있게 할 수 있었고 아이들도 더 안정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쩐지 작년보다 올해 아이들을 훨씬 덜 사랑하고 덜 사랑받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아이들을 대하는 내 태도가 다 관성과 가식처럼 느껴졌고, 내 말과 행동이 아이들의 마음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략 5월 중순쯤부터 그런 느낌이었는데 이것을 의식하자 갑자기 하루하루가 신나지 않고 몹시 피로해졌다. 어쩌면 순서가 반대일지도 모르겠다.

전주 덕진공원 앞 멋진 카페

내가 직무유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열심히 하고 있는데(심지어 작년보다 잘하고 있는데) 주관적인 느낌 때문에 힘들다는 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작년의 기억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작년에는 학생들과 나를 정서적으로 분리하지 못해서 힘들어했으며 매일 저녁 늦게까지 초과근무를 했다. 확실히 열정이든 사랑이든 그때 더 많이 주기는 했겠지만 올해도 작년처럼 살았다면 나는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 (농담도 과장도 아니다) 그리고 그때의 불행한 나는 별로 좋은 교사도 아니었다.

죽지 않고 불행하지 않으면서 진심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어떤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굳이 진심을 줄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직업윤리와 전문성으로 친절하게 가르치면 되는 것이라고. 동의한다. 그렇지만 나는 에너지도 전문성도 다른 선생님들보다 한참 모자라므로 다른 것이라도 많이 주고 싶다. 기왕이면 진심을 주고 싶고 또 받고 싶다... 이번 학기는 그것이 어려웠다. 다음 학기에 만회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자꾸 미안하게 한다.

J'étudie le français.

방학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프랑스어 인강을 결제한 것이었다. 방학 내내 아무 데도 안 나가고 괜히 불안해만 하고 있을 게 뻔하니 뭐라도 배우자 싶어서 시작했는데 아직까지는 무척 만족하고 있다. 발음 때문에 좀 고생하고 있긴 하지만(가끔씩 내가 외국어를 말하는 건지 구역질을 하는 건지 헷갈린다... 그리고 r과 u 발음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정말로 구역질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기왕 삼십만원이나 일시불로 긁은 거 꾸준히 해서 언젠가 아프리카 여행을 가보고 싶다. 그런데 그런 장거리 여행을 해도 괜찮은 시기가 과연 내가 살아있는 동안 올까. 감염병도 그렇지만 기후위기가... 해외여행 못 가 봤는데 평생 못 갈 수도 있겠다(안 가는 게 맞겠다) 이런 생각이 슬프다.

군산 옥구향교

개학하고 나서도 일주일 정도는 지금 학교에서 일하다가(다음 담임선생님께 인수인계를 꼼꼼하게 해주고 학급 분위기를 잘 잡아놓고 가려고 한다...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다) 9월 1일부터는 다른 학교로 발령받게 된다. 어떤 학교 몇 학년으로 가게 될지 아직은 모른다. 서류 준비하다가 짧은 방학 다 가겠네... 도시 학교는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많을텐데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먼 학교로 발령이 나면 출퇴근도 걱정이고 아무튼 이것저것 신경쓸 일이 많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꽤 오래 전부터 하고 있다.

서천 국립생태원 사막관

오늘은 김치찌개를 끓이고 애호박전과 버섯전을 부쳤다. 화장실 청소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다. 집안일을 열심히 할수록 할머니가 없다는 사실이 실감이 난다. 텅 빈 거실 썰렁해진 냉장고 탁자 위에 놓인 영정사진

뭘 해도 볼 수가 없나 잠깐만이라도 돌아올 수는 없나

이제 울지는 않는데 다만 이따금씩 불쑥불쑥 생각이 떠오른다. 오늘 점심에 끓인 김치찌개는 처음 치고 꽤 괜찮은 맛이 났다. 할머니도 그걸 맛봤으면 좋아했을 것이다. 아니 너무 달다고 혼났을지도.

왠지 좋은 사진

아무튼 방학은 짧고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으니 지금 열심히 놀아야 한다. 오늘은 영화 헤어스프레이를 보고 자야지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천원 쓰러 갔다가 2만원 쓰고 온 이야기  (0) 2022.10.24
죽음에 대해 말하기  (0) 2022.08.11
220610 요즘 생각들  (0) 2022.06.12
코로나에 걸렸다  (0) 2022.03.18
220122 오늘의 일기  (0) 2022.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