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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쓰는 연습

Deal with it

slowglow01 2023. 8. 4. 22:44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수십 번 했던 얘기를 또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항상 똑같은 얘기를 별의별 방식으로 말하고 또 말해서 이젠 더 돌려 말할 방법도 없다. 너무 절망스럽다!!! 사람들이, 사회가, 지구가 너무 많이 아파서 도저히 나 혼자 웃을 수가 없다. 내 깜냥 안에서 열심히 듣고 말하고 읽고 쓰면서, 사람들에게서, 또는 언어와 이론에게서, 또는 그저 도도히 흐르는 시간의 법칙 안에서라도 어떻게든 희망을 찾으려는 그 모든 시도들... 다 수포로 돌아갔다. 오늘은 또 마음이 힘들어서 대학생 때 쓰던 노트를 들춰보았다.

2020년 7월 12일.
(...) 너무 많은 것이 나를 아프게 한다.
세상이 너무 폭력적이고 수치를 모른다고 느낀다.
나로 사는 것마저도 자주 힘겹고 고단하여 두렵다.
그런데 어린이를 가르치라고.

어린이가 태어날 자격이 없는 사회에서
그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그 논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어린이에게 선하고 총명하라고 가르치고 싶지 않다.
자격이 없다고 느낀다.

이 부분을 읽고는 그저 허허 웃음만 나왔다. 그러니까 3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빙빙 돌았단 말이지... 이 3년 동안 나는 임용시험에 수석으로 두 번 합격했고 교직생활에 성공적으로 적응했고 새로운 연인과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났고 즐거운 취미나 관심사도 많이 만들었다. '훌륭한 20대 상' 같은 게 있으면 받아야 한다. 근데... 근데 나를 둘러싼 세상이 매 분 매 초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가는 중이라 도저히 혼자 행복할 수가 없다. 모든 게 너무 끔찍하고 사실 우리 편이라 하는 사람들의 말도 역하게 느껴진 지가 오래되어서...... 한 발짝도 앞으로 못 갔다. 여태 주저앉아 있었다.

과거에 더 나빴던 시기가 많다는 건 알고 있다. 더 심각했던 전쟁, 전염병, 재난들. 그때도 다들 세상이 끝나는 줄 알고 아우성이었지만 결국 어찌어찌 지나갔다는 것도.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머릿속에 사는 누군가가 왼쪽 귓가에 조용히 속삭인다. '그땐 기후위기가 없었잖아... 비극을 수습하고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 있었지... 하지만 이제 문명은 진짜 끝이야...' 오른쪽 귓가에는 좀더 서늘한 목소리. '어떻게 죽게 될까? 기후재난? 식량난? 전쟁?' 또는 칼부림. 이제 정말 길을 걷다가 칼에 찔려 죽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그냥 포기해, 받아들여, "Deal with it"이라고 온 세상이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도, 세상을 구하는 건 놔두고 내 정신건강이라도 구해보려고 나름 최선을 다해봤다. 여태껏 deal with it 하기 위해 내가 시도해본 방법들은 다음과 같다.

1. 걷기, 달리기, 요가하기
2. 음악 듣기, 영화 보기, 뜨개질하기
3. 국민신문고에 민원 20개씩 넣기
4. 눈에 띄는 단체마다 후원금 보내기
5. 글을 쓰고, 쓰고, 또 써보기

그러나 전혀 deal이 되지 않는다. 2020년 7월 12일에 우울한 일기를 썼던 그 노트에 이어서 오늘의 일기를 썼다.

2023년 8월 4일.
(...) 세상이 너무 아프고... 밉고 싫고 괴롭고. 그런데 거기 사랑하는 것들이 같이 있다. 파란 여름 하늘이나 배롱나무꽃이나 우리 속없는 열두 살 꼬맹이들이나.

희망이 필요하다.

연대가 필요하다.

이렇게 써놓고 이번에도 혼자 허허 웃었다. 우스워서. 3년 동안 그렇게 빙빙 돌았는데도!! 그 수많은 헛고생과 마음고생들!!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같은 결론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 왜냐하면, 아직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들이 아직 여기 있는데 놓고 갈 수 없으니까. 결국 오늘도 또 같은 이야기. 연대의 불가능성을 지금처럼 절절하게 느끼는 때가 없는데도. 지난주 광화문 집회에서, 폭염 속에서 검은 옷을 입고 도로에 앉아 땀을 줄줄 흘리면서, 오늘날 연대라는 건 사실상 끝장이고 내가 바랐던 건설적인 논의나 단결된 투쟁 같은 건 앞으로도 없으리라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또 같은 이야기. 연대가 필요하다. 연 대 가  필 요 하 다.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힘껏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갖고 있는 것은 이 맨손밖에 없기 때문에. 나머지는 전부 무의미하다. 특히나 이 전지구적 비상사태 상황에서는.

내가 파악하기로 이 블로그의 고정 독자는 3~4명 정도다. 내 성격에는 딱 적당한 숫자다. 티스토리 방문 통계는 그것보다 더 된다고 하지만 사실 별로 믿어지지는 않는다. 아무튼 나는 지금 바로 당신에게 손을 뻗는 중이다. 당신도 나도 피차 큰 희망은 없는 처지에 그냥 손 한번만 잡아달라고. 우리 손 잡고 같이 슬퍼하자고. 내 손이 싫으면(이해한다) 옆에 있는 다른 사람 손을 잡아주시라. 맨날 똑같은 소리, 눈치 없고 입바른 소리만 해서 핀잔받고 미움받는 내가 나도 싫다. 그치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과 세상과 지구와 우리 꼬맹이들을, 아직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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