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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쓰는 연습

풀배터리 검사 후기

slowglow01 2023. 5. 14. 22:02

뭘 안 쓴 지 오래되었군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요즘 아이들과의 관계도 좋고 또 아이들끼리의 관계도 좋고
수업도 잘 되고 학급운영도 원활해서
교사효능감이 꽤 높은 상태다
약 2년 3개월의 경력 중에서 지금이 가장 좋은 선생님인 것 같다
근데 구체적으로 자랑할 기운은 없음...

그리고 날씨가 좋아서 기분도 좋다
1년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5월
초록의 계절 장미의 계절
그리고 내가 세상에 나온 계절이다
생일에 별 의미를 두지는 않는데 그래도 5월에 태어났다는 건 참 기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 맞다
최근에 종합심리검사(풀배터리 검사)를 받았다
50만원
눈 딱 감고 긁었다
온갖 재미있는 퍼즐을 풀고 그림도 그리고 임상심리사 선생님이랑 이야기도 하고
즐거운 시간이었...긴 한데
난 뭘 기대했던 걸까?
나는 열쇠가 받고 싶었다
이게 당신 마음의 열쇠예요
그동안 느꼈던 모든 불편, 고통, 전부 이 열쇠가 설명해줄 거예요
여기까지 쓰고 깨달았는데
정확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레베카가 이 노래를 부를 때의 그 심정이었다
내 인생의 모든 넘버는 이 뮤지컬에 다 있군...
https://youtu.be/uic_3vlI5BE

a diagnoooooosis~~~!!!!


어떤 병명을 대면서 정신병원에 가보라고 해도 상관없었고
아뇨? 님 정상인데요? 다들 님 정도로는 힘들게 사는데 엄살 쩌시네요;; 라고 해도 상관없었고
심지어 당신은 싸이코패스입니다. 라고 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세 가지 모두 내가 속으로 의심해왔던 것들이다.
어쨌든 열쇠가 될 수 있는 간결한 문장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저는 누구죠? 정상인인가요? 병자인가요? 천재인가요? 바보인가요? 착한 사람인가요? 범죄자인가요? 저는 가끔 제가 이것들 전부인 것 같아요...

그러나 ㅋㅋㅋ 당연히 ㅋㅋㅋ
심리학 또는 정신의학.. 암튼 그것의 세계는 그렇게 간단할 리 없다
무지하게 두꺼운 검사 결과지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내가 모르는 말은 별로 없었다.

머리가 참 좋으시군요
(네.. 사실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언어 쪽 지능은 상위 0.1퍼센트네요
(아유.. 감사합니다..)
근데 처리속도는 좀 떨어집니다
(역시나 그랬군요...)
내향성이 무지무지하게 높으시네요
(어.. 진짜요? 최근 많이 외향적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완벽주의 성향이 있고요 사회적 책임감이 엄청 강하구요
(맞아요 맞아요)
근데 자율성도 떨어지고 연대감도 떨어지고... 자기와 타인에 대한 수용도도 모두 낮네요
(...성격 나쁘다는 뜻이죠? 그래도 자신과 타인에게 공평하게 나쁘네요. 내불남불)
에너지가 부족하고 많이 우울하시네요
(ㅋㅋㅋㅋㅋ)
사회적 불편감이 유의미하게 높구요.. 아이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좀 있으시네
(ㅋㅋㅋㅋㅋㅋㅋㅋ)
항상 좀 경직되어 있으시고? 타인의 감정을 알아차리기 어렵고?
(아 잠깐만요!)
애정결핍도 좀 있으시네요??
(그만!!!)

당연히 실제로 이렇게 대화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검사 결과는 대충 이러했고
이것은 전부 내가 평소에 느끼던 바와 비슷했다.
팔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팔이 아프시군요 라는 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아 물론 팔이 아프다는 감각이 엄살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 병원 가야 할까요?
아니요. 그 정도는 전혀 아니고요,
좀 즐겁게 사세요. 자기 자신을 좀 허용해주세요.
잘 해오셨잖아요. 힘든 환경에서 훌륭하게 자라서 많은 걸 성취했잖아요.
이제 여유를 좀 가지고 스스로를 좀 터놓아 보세요.
약한 모습 보여도 괜찮아요.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요 규칙적으로 생활하시고 운동하세요 라는 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알아요... 안다고요
근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강하지 않은 나 잘하지 않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요
도무지 그럴 수가 없어요...

임상심리사 선생님은 날 좀 안쓰럽게? 바라보시며
힘드셨겠어요. 힘드시겠어요. 라고 했고 나는 목이 콱 메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고
쓸데없이 똑똑한 나의 뇌는 또 분석을 했다.
거봐. 지금 눈물 참고 있지. 모르는 사람 앞에서 울기 싫으니까. 그 사람이 상담사인데도. 강하고 흔들림 없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거지. 스스로의 약한 모습을 미워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마음이 고장났지. 이럴 땐 그냥 울어야 니가 낫는 거야. 상담사님도 그렇게 말하잖아.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고
대신 음. 제가 방금 눈물이 터질 것 같은데 참았어요. 라고 이야기했다.
상담사님은 아니 왜 참아요?? 상담실만큼 울어도 되는 곳이 어디 있다고?? 라고 말했고
나는 하하 그러게요. 라고 말하고 끝까지 울지는 않았다.
나의 뇌는 '아직 멀었군...'하고 또 분석을 했다. (정말 재수없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지능이 좀더 낮았더라면 오히려 덜 괴롭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나는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편이고
그래서 아직 병원 방문이나 약물 치료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대신 활동적인 취미를 만들거나 봉사활동을 하거나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을 권유받았다.
요컨대 좀 재미있게 살라는 것이다. (ㅋㅋㅋ)
나는 그 충고를 마음속에 새기고
돌아오는 길에 조각케익을 하나 샀다.

그게 벌써 2주 전이군
나는 전과 다름없이 지내고 있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서 뭐라 쓸 내용도 없다.
맨 앞에 썼지만 요즘은 대체로 행복하다.
검사 왜 받았지?
아무튼.

열쇠는 없다.
그러나 열어야 할 문도 사실은 없다.
애초에 열려 있는 길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야 한다.

사실 얼마나 다행인가
어떤 사람들은 지금보다 강해져야 하고, 성취해야 하고, 더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데 나는 약해져야 하고, 성취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노력을 덜 해야 한다
앞으로 가는 것보다는 뒤로 가는 게 쉽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글도 대충 썼다
어 또 마침표 빼먹었네~~ 아싸~~

뒷걸음치기
주저앉아 쉬기
나 지금 주저앉았다고 인정하기
(언젠가는) 모르는 사람 앞에서 울기
이게 나의 숙제다.
울게 되는 날
자랑하러 또 올게요.
여러분도(누구든) 눈물 나면 저한테 자랑하러 오시길. 되도 않는 위로 대신 부럽다고 잘했다고 박수쳐 드릴게요.
흑흑이 화이팅!!
찔찔이 잘한다!!
엉엉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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