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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교단일기

사랑을 발명하는 일

slowglow01 2024. 9. 25. 22:43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경로당에 다녀왔다. 오늘을 위해 아이들은 노래, 춤, 리코더 같은 장기자랑을 준비하고 나는 학급운영비로 떡을 한 상자 샀다. 도덕과 음악 교과를 재구성한 경로잔치 프로젝트 수업이었다. 미리 연락을 해둔 경로당에는 어르신들이 7~8명 정도 계셨고 모두 아이들을 귀여워해 주셨다. 아이들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칭찬과 관심을 받으니 신이 나서 원래 준비했던 것보다 훨씬 열심히 공연을 했다.

특히 내가 마음속으로 넘버원과 넘버투라고 부르는, 나와 친구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두 학생이 제일 흥분을 했다. 장기자랑을 마치고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앉아서 어르신들이 사 주신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에도, 둘은 어르신들 근처를 얼쩡거리며 이상한 행동을 했다.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든지 네 발로 걷는다든지... 나는 그만하라고는 했지만 강하게 지도하지는 않았다. 말썽을 부리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은 그저 지금 사랑을 받아서 너무나 기쁜 것이다.

이게 바로 어릴적 모두가 겪었던 애정결핍 탓이라고요! 
- 뮤지컬 '시카고' 중



한때 인터넷에 '사랑받고 자란 사람은 티가 난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어릴 때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그 사랑을 남에게 나눠줄 줄도 알고, 자존감이 높고 성격이 다정하여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뭐 그런 이야기였다. 이 말은 많은 공감을 샀지만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사랑받은 사람에게 티가 난다는 문장은 곧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사람 역시 같은 이유로 티가 난다'는 문장을 은근히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은근하지 않은 방법으로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그래... 나로 말하자면 그 비슷한 이야기를 대학생 때 오프라인에서 처음 들었는데, 나한테 한 말이 아니었음에도 그 순간 참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고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진흙탕에 머리부터 거꾸로 처박힌 것 같았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그 동안 진흙탕에서 나오지는 못했지만 대신 그 안에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인정할 수 있게 됐다.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을. 유년 시절의 애정이란 한 인간에게 너무나 중요한 자원인 동시에, 결코 스스로는 얻을 수 없는 자원이고, 그래서 어떤 어린이들은 어찌할 도리 없이 인격과 정서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그중 어떤 상처는 영구적이고, 어떤 상처는 치유가 가능하지만 치유하는 데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 (사랑을 받고 자란 이들은 그 에너지가 남아돌아서 타인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그러니, 억울하지만, 맞다 - 사랑을 못 받으면 티가 난다. 나도 티가 나고, 넘버원과 넘버투도 티가 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티가 나면 나는대로 살아야 한다. 티나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살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바로 그 티 때문에 쉽지가 않다.작년에 나를 너무 괴롭게 하는 학생(그러니까 작년의 넘버원)에 대해 동료 선생님께 하소연을 한 적이 있다. 그 선생님은 나를 위로하면서 그 아이가 얼마나 외롭고 불행한 환경에 있는지 얘기해 주셨고, 나는 그걸 듣다가 그만 울고 말았다. 아이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 아이가 미웠다. 선생님은 내 미움을 눈치챘기 때문에 그 아이의 환경을 이야기해준 것이다. 사랑이 필요한 아이니까 너무 미워하지는 말라고. 나는 그 말을 이해했지만, 동시에 눈물이 날 만큼 억울해졌다. 얘를 미워할 수조차 없다니. 얘를 사랑하며 잘 가르치려는 모든 시도가 다 실패했는데(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얘는 나와 다른 학생들에게 계속 상처를 주고 있는데. 그런데 나는 얘를 미워하면 안 되고 심지어 사랑해야 한다니. 그게 너무 억울해서 울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자 나는 넘버원을 미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랑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넘버원은 나를 미워했다. 넘버원을 뺀 나머지 아이들과의 한 해 학급살이는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 충만했지만, 나는 결국 이 아이들을 6학년까지 연이어 맡는 것을 포기했다. 래포가 망가졌으니 더 이상의 지도가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바로 이런 식으로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은 도리어 미움을 받으며 자란다. 교사들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이래서 가정환경이 중요한 거다'든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심지어 이걸 줄여 '콩콩팥팥'이라 한다)'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그런 말이 어떤 구체적인 괴로움 속에서 나왔는지는 잘 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 해도, 누군가의 삶을 진흙탕에 빠뜨리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진흙탕에서 나왔든 콩밭에서 나왔든, 너는 지금도 멋진 어린이고 앞으로 멋진 어른이 될 거라고 말하고 싶다. 비록 그걸 믿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 이영광 시 '사랑의 발명'

 
내 사랑의 타율은 5할 정도인 것 같다. 작년에는 넘버원과 그토록 반목하는 와중에 넘버투와는 아주 괜찮은 사제관계를 맺었다. 올해는 반대로 넘버원을 지도하는 건 점점 쉬워지고, 넘버투를 지도하는 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그래서 별명을 바꿀까 고민중이다). 내가 야구선수였다면 전설의 타자가 되었겠지만, 교사이기 때문에 품에 들어오지 않는 아이 하나하나가 더 아쉽고 아프다. 눈빛에, 얼굴에, '사랑 못 받고 자란 티'를 팍팍 내는... 사랑스러운, 사랑할 수 없는 아이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고, 세상의 다른 모든 중요한 자원들이 그러하듯이 사랑 또한 몹시 불공평하게 흐른다. 교사는 그 흐름을 다시 공평하게 분배하려 노력하는 사람들 중 하나이지만, 교사도 사람이기에 성공률은 5할에 불과하다. 교사에게 100프로의 사랑 성공률을 요구한다면 그는 나처럼 교실에서 혼자 울다가 결국 마음이 고장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 사회는 대체로 이런 아이들을 그냥 놔두다가, 십 년 정도 뒤에 갑자기 화들짝 놀라는 척하면서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났나' 하고 호들갑을 떤다. 이들을 어찌하면 좋냐고, 사회적인 문제라고, 뒤늦게 분석을 하고 비판을 하고 대책을 마련한다.

다른 방법은 없나. 나는 이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고 싶다. 우리 모두라는 말이 애매하다면 사회에게, 국가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요구한다. '못난' 아이들, '티나는' 아이들, '모자란' 아이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아이들을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불가능한 사랑을 발명하는 일. 어쩌면 그 일은 어려울지 모른다. 법을 만들거나, 복지 제도를 운영하거나, 지역사회를 활성화하는 것처럼. 어쩌면 그 일은 믿을 수 없이 쉽고 단순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춤추고 노래하는 넘버원과 넘버투에게 기꺼이 박수를 쳐 주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미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