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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의 언어

slowglow01 2020. 5. 6. 01:18

학보사를 그만둔 지 대충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동안 내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글 쓰는 방법을 홀라당 까먹었고 그 외에도 전반적으로 좀 바보가 되었고... 학보사에 있을 때는 아무래도 언어의 가능성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면 요즘은 언어의 불가능성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말할 수 없는 것들, 말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이를테면 고통이라든지. 삶이라든지.
내가 사랑하는 책,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서 주인공 니나는 자신의 소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정작 인생에는 한 가지 계산서도 없고 아무런 결말도 없는데 말이야. 결혼도 결말이 아니고, 죽음도 겉보기만 그렇지 결말이 아니고. 생은 계속 흘러가는 거야. 모든 것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아무 논리도 없으며, 모든 것은 즉흥적으로 생성되고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한 조각을 끌어내서는, 현실에는 없고 삶의 복잡함에 비하면 우스울 뿐인, 작고 깔끔한 설계에 따라 그것을 건축하고 있어.” 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레이첼 블룸의 시트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에서 조쉬 그로반이 부르는 노래 가사로 요약할 수 있다. “It’s not some carefully crafted story. It’s a mess and we’re all gonna die. (...) Life doesn’t make narrative sense.” 한 마디로, 삶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언젠가 문신을 한다면(아마 안 하겠지만) 바로 이 문장을 새기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문장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작년 여름, 제주도 삼양해수욕장에서 열린 불꽃축제를 바라보면서도 이 문장을 생각했다. 거기서 나는 이렇게 썼다. “삶은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다. 살다 보면 가끔 아주 좋거나 나쁜 일이 생길 때가 있고, 그것이 삶을 통째로 바꾸거나 때로는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전혀 인과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그냥... 그냥 일어나는 것이다. 아름다움도, 고통도, 그냥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선의도 악의도 없이. 명멸하는 불꽃처럼. 밀려와서 부서지는 파도처럼.”
하지만 그 글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쓰는 순간에도 그게 헛소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내 삶을 불꽃놀이 보듯 초연하게 바라볼 수 없다. 나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삶에서 서사와 의미를 찾으려 애썼고, 희노애락의 순간마다 (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나한테 이런 일이!!”를 외쳤다. 한때는 내가 약하기 때문에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그것 역시...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안다. 그게 됐으면 내가 여기 안 있지 진작 열반에 올랐지.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애초에 이야기가 아닌 것을 어떻게든 이야기로 이해하려고 애쓰는 시시포스인 것이다. 삶에 대해서,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다 실패하고 다시 이야기하려다 실패하고... 우리가 언어라든가 특히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부 그 실패의 기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언어는 처음부터 불가능성 위에서 지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내가 학보사에서 쓴 글을 대체로 좋아하지만, 425호에 실었던 ‘언어가 멈추는 곳’은 얼굴이 화끈거려서 잘 읽지 못한다. 그 글의 결말에서 내가 단호하게 말했던 희망을, 사실 나조차도 완전히 믿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무려 신문 1면에 실리는 글에 듣기 좋은 거짓말을 한 것 같아 부끄럽다. 그 글에서 말했듯이 나는 아마 언어가 멈추는 곳에서도 읽고 쓰는 것을 멈추지 않겠지만, 그건 내가 마르지 않는 희망의 소유자여서가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는 것처럼 나는 말과 글을 읽고 쓴다. 그렇기 때문에, 읽고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 나는 계속해서 실패할 것이다. 삶을 이해하려다 실패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려다 실패하고 세상을 언어 위에 지으려다 실패하고... 운이 좋으면 그 과정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글 역시 그 여정 속에 놓인 또 한 번의 실패의 기록이다. 다음 글은 더 나은 실패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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