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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장소의 문제다

slowglow01 2022. 1. 8. 01:00

종업식은 월요일이었다. 아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하교시킨 뒤, 남은 서류를 처리하고 관사를 청소하고 드디어 본가로 가는 저녁 버스를 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기쁨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해냈다! 진짜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첫 해 치고 훌륭하게 잘한 것 같다! 이제는 3월까지 자유다!!!...... 라고 생각하는데, 놀랄 만큼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후련하거나 아쉽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지쳐 있어서, 너무 오랫동안 외로워해서 마음이 몽땅 닳아 없어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분노가, 다음에는 슬픔이, 마지막으로 행복이. 남은 것은 내가 뼈와 심장이라고 부르는 것들, 고독과 불안뿐이었다. 문득 이것이 나의 전부라는 생각, 남은 평생 동안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무엇도 기대하지 않으며 살아가게 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할 무렵 여행 숙소를 예약했다. 여수. 2박 3일.

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장소가 필요했다. 지난 일 년은 내 인생에서 버스를 가장 많이 탄 시기였다. 본가와 직장, 시외버스로 두 시간 반쯤 걸리는 거리를 거의 매주 주말마다 오갔다. 엄청나게 긴 시간을 버스에서 보냈는데 결국 도착하는 곳은 늘 같은 곳이라는 게 신기했다. ○○군 ○○면, 작은 시골 마을. 이곳에서 학교와 관사만을 오가는 것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관사는 학교에서 도보로 십오 분 정도 거리에 있고, 방 하나에 부엌과 화장실, 작은 베란다가 딸려 있다. 방에는 작은 옷장과 식탁으로 쓰는 앉은뱅이책상과 이부자리가 있고, 나머지 공간은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옷가지와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 쓰레기는 주로 편의점 가공식품의 포장지들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돌보는 데 소질이 없었다. 무기력해서 청소를 못 했는데 엉망이 된 방 꼬라지를 보고 있으면 더더욱 무기력해졌다. 우울을 시각화해 둔 것 같은 모습의 방에 혼자 누워서, 매일 생각했다. 이건 장소의 문제라고. 이곳이 나를 조금씩 말려 죽이고 있다고.

일찍 퇴근하는 날은 천변을 따라 걷거나 달리기도 했다. 어떤 주말에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혼자 버스를 타고 읍내에 간 적도 있다. 읍내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아무 식당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누가 들어오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왠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바보 같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 이곳이 나를 적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쫄쫄 굶으며 터미널 근처를 빙빙 돌다가, 결국 딱 하나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가 구정물 같은 맛의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며 나는 다시 생각했다. 이것은 장소의 문제다. 새로운 장소가 필요하다. 쓸쓸하지 않은 곳, 탁 트인 바다가 있는 곳, 익명의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이. 그리고 이제 떠나도 될 때가 왔다.

사실 제주도에 가고 싶었는데, 항공편을 예약하고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는 그 과정들이 귀찮아서 가까운 곳으로 타협했다. 모로 가든 바다만 있으면 되니까... 바다를 보면서 마음을 잘 주워담아 깨끗이 깁고 오는 것이 여행 계획의 전부였다. 이 사실을 알리려고 친구에게 연락했는데, 마침 친구도 나와 같은 날짜에 같은 이유로 홀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해서 깔깔 웃었다. 스물넷은 모두에게 쉬운 나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첫날 여수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세시 반쯤이었다. 유명하다는 바게트 버거를 사 먹고, 숙소에 짐을 풀고, 공용 자전거 여수랑을 빌려 타고 해안공원 근처를 빙빙 돌다가 오동도로 향했다. 사실 오동도는 다음 날에 가려고 했는데, 페달을 밟다 보니 나도 모르게 도착해 있더라. 이렇게 가까울 줄 몰랐지... 아무튼 시간이 조금 늦었기 때문에 섬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방파제를 따라 달렸다.

여수 종포해양공원
이게... 돌산대교던가?


오동도로 들어가는 길에는 관광객이 꽤 있었지만, 바다 쪽으로 나 있는 방파제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늘은 흐렸고 벌써 어두워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먼바다에는 해무인지 아니면 그냥 미세먼지인지 모를 것이 자욱했다. 보이느니 회색 바다뿐이고 들리느니 파도 소리뿐이구나... 적막하고 이상한 세계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으로, 자전거를 대 놓고 천천히 걸었다. 듣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소리 내어 노래도 불렀다. 9와 숫자들의 '방공호'. 들어와요 어서 들어와요, 내가 만든 작은 세상으로...

소실점
테트라포드


방파제에 흔히 있는 그것, 의자 같기도 하고 계단 같기도 한 것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풍경은 수묵화가가 한 가지 색의 엷은 먹으로 그린 그림 같았다. 회색 시멘트와 회색 바다와 회색 하늘. 찬바람과 파도 소리. 멀리 점점이 배들이 떠 있었는데 불만 밝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엄청나게 행복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조금 고요해지면서 '이것을 보러 왔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바로 이걸 보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이 춥고 삭막한 바다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바다는 넓었고 내게 무신경해 보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이곳에 낡고 해진 마음을 두고 돌아가고 싶었다.

앉아서, 달리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아까 부르던 노래를 계속 흥얼거리다가, 이 역시 장소에 대한 곡임을 깨달았다. 들어와요 들어와요, 초라하지만 여기만은 안전해요... '방공호'는 제목 그대로 숨을 곳에 대한 곡이다. 추운 겨울이 오자 9는 연인을 위해 작은 방공호를 만든다. 졸린 곰도 길을 잃은 다람쥐도 들어올 수 없는, 연인과 9가 들어가면 가득 차는 아주 좁은 피신처를. 9는 그곳으로 연인을 초대하며, 매일 밤 연인이 곤히 잠들 때까지 깨어 있을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말한다. 봄이 오면 함께 떠나요, 모든 슬픔 여기 가둬 두고서.

9의 떨리는 목소리와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조금 눈물이 날 뻔했다. 내게도 그 방공호가 몹시 필요했다. 찬바람을 피하고, 내가 잠들 때까지 지켜봐줄 누군가가 있는 곳이. 사실 오래 전부터 그곳에 대한 꽤 구체적인 이미지도 가지고 있었다. 그곳은 아주 좁고 따뜻한 다락, 바닥은 포근한 쿠션과 손뜨개로 만든 담요로 덮여 있고 벽면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전부 호두나무 책장으로 되어 있는 곳이다. 창에 달린 모직 커튼은 아주 두껍고 묵직해서 밖에서 아무리 큰비가 내려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 곳에서 겨울을 나고 싶었다.

해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 오동도의 방파제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갈까. 나는 그곳에서 이 글의 제목을 정했다. 정말로 모든 것은 장소의 문제라고, 한 사람에게는 넓은 바다와 좁은 다락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누구에게든 외부와 내부가, 모험할 곳과 돌아올 곳이, 익명의 타인으로 존재할 곳과 친밀한 연인으로 존재할 곳이 모두 필요하다. 문학적으로도 그렇지만 물리적으로도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내가 사는 곳은, 그리고 아마 이 땅의 많은 이들이 사는 곳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관사, 교실, 원룸, 기숙사, 아파트, 고시원, 사무실, 그리고 이보다 훨씬 나쁜 곳들에서 사람들은 지내고 있다. 한국에는 공원과 벤치 같은 앉아서 쉴 곳이 없어서 카페가 유행이라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읍내에서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한 내가 쫓기듯 들어간 곳도 카페였다. 전국에 7만 개가 넘는다는 카페들은 사실 누군가에게 작은 바다나 다락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출처: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4823

평형 맞는 사진 대체 어떻게 찍는 거냐


30분쯤 앉아 있다가, 가로등에 불이 켜지기 시작할 때쯤 돌아 나왔다. 겨울 해는 순식간에 떨어져서 이순신광장에 도착하자 벌써 캄캄해져 있었다. 아니, 어두운 건 하늘뿐이고 바다 위에는 조명이 휘황했다. 이게 '그' 여수밤바다인가... 반짝반짝 예뻤지만 큰 감흥은 없었다. 사람들 보기 좋으라고 일부러 켠 조명에는 마음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해가 질 때까지 먼바다에서 꼼짝 않고 떠 있던 어선들의 불빛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멀리서 가물가물 반짝여서 내 마음도 왠지 애가 탔다. 얘들아, 집에 가자. 추워지고 캄캄해지잖아. 저기 환하게 불 켜진 육지로 같이 가자. 뭐가 그렇게 외로워 보였는지 나도 모르겠다.

터빈과 가로등
여수 해상 케이블카


손님 없는 작은 카페에서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를 조금 읽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여행 와서 읽으려고 일부러 고른 책 맞다) 늘 그랬듯 잠드는 데는 오래 걸렸지만, 깨끗한 방과 새하얗고 바삭바삭한 이불이 좋아서 많이 우울해지지는 않았다. 그래, 역시 모든 것이 장소의 문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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