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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과서 불평 본문
미술교육학자 빅터 로웬펠드가 주장한 개념 중 '도식적 표현'이라는 것이 있다. 주로 7~9세의 아동들이 그림을 그릴 때 반복해서 나타내는 표현 방법으로, 산은 세모 모양, 나무는 갈색 기둥 위에 초록색 구름이 앉은 모양으로 그리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 또래의 아이들은 실제 산과 나무가 어떻게 생겼든 상관없이 모든 산과 나무를 이렇게 그리다가, 10~11세가 되면 점차 대상과 닮은 사실적 표현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몇 달 전 방을 청소하다가 어릴 때 쓴 동시 한 편을 발견했다. 아마 학교 숙제로 썼던 것 같은 그 시에서 나는 우리 집을 엄마에 비유하고 있었다. 집은 따뜻하고, 포근하고, 언제나 날 반겨주고... 그래서 엄마 같다는 얘기. 아래쪽에는 엄마가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저 귀여운 동시로 보이겠지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시를 내가 언제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림 실력으로 보아 아마 4학년은 넘어서였던 것 같은데, 그때 나에게는 이미 엄마가 없었다. 그리고 엄마가 있었던 시절에도 나는 엄마를 별로 따뜻하다거나 포근하다고 느끼지 않았었다. 엄마가 못된 마녀였다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게 애정을 퍼붓는 성격이 아니었다는 뜻이고, 나 역시 애교쟁이 딸이 아니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동시 속의 따뜻하고 포근한 아줌마는 대체 어디서 솟아났단 말인가? 과거의 나는 싸이코패스였던 것일까?
나는 그것이 도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모든 산을 세모낳게 그리는 것처럼, 나 역시 '엄격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로 시작하는 '정상가족'만이 유일하고 바람직한 가족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나의 가족이 도식에서 밀려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도식을 충실히 따르고자 했던 것 같다. 단짝친구에게 엄마가 있는 척 거짓말했다가 망신당한 기억은 그때보다 거의 두 배나 나이를 먹은 지금도 생생하게 쓰라리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사회 교과서의 '다양한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 소단원을 보고, 나는 그때의 상처를 홱 열어젖힌 것 같은 강한 모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왜? 이 소단원은 명백히 정상가족 도식을 깨기 위해 구성되었고, 나는 기뻐해야 마땅하다. 교과서는 "오늘날의 다양한 가족 형태를 알아봅시다"라고 말하면서, 다문화 가족, 재혼 가족, 확대 가족, 입양 가족, 한부모 가족, 조손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가족'을 다루는 교과는 사회과만이 아니다. 1~2학년군의 통합교과에도 '다양한 가족'이라는 소주제가 있고, 5~6학년군의 실과에도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알아보고 공통점을 파악하라는 내용의 성취기준이 있다. 거의 6년 내내 다양한 가족에 대해 공부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 '다양한 가족'이라는 게 대관절 무슨 뜻이란 말인가? 사회 교과서가 친절하게 알려줘서 내가 그 다양한 가족에 속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넓은 운동장 한가운데에 길게 선을 긋고, 왼쪽에 엄마아빠아들딸로 이루어진 4인 '정상가족' 100팀이 선다고 하자. 그리고 잠시 뒤 우리 가족 5명이 오른쪽에 들어와 선다. 아까 400명이 서 있을 때는 전혀 '다양하지 않았던' 가족들이, 우리 5명이 들어오자 갑자기 '다양해지는' 것인가? 만약 그 400명을 전부 집으로 돌려보내고 운동장에 우리만 남는다면, 덩그러니 서 있는 우리를 보고도 '운동장에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하고 있네요'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그제서야 우리도 '다양하지 않은' 가족이 될 수 있는가? 이번에는 온 동네에 전화를 돌려서 한부모 가족 99팀을 운동장에 불러왔다고 하자. 이제 운동장에는 한부모 가족만 100팀이 있다. 이것은 다양한가, 다양하지 않은가?
물론 이것은 괜히 이죽거리기 위한 사고실험에 불과하다. 다양성이 한 개인이나 가정에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운동장 비유에는 뜻밖에 사실적인 구석이 있다. 나는 내가 만든 가상의 운동장을 눈에 보일 듯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날씨 좋은 해질녘의 운동장 한쪽에 내가 혼자 서 있다. 그리고 저 멀리 곧고 하얀 선이 있고, 반대편에는 400명의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고 피크닉을 하고 있다. 사진을 찍고 캐치볼을 하고 고기를 구워 먹는다. 저 사람들은 도식 안의 사람들, 세모 모양의 산이고 구름 모양의 나무다. 그리고 나는 도식에 맞지 않는 이상한 그림이다. 나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아주 똑똑히 알고 있다.
사회 교과서는 선 너머에 있는 나를 무시하지 않고, 이상한 가족이 아니라 다양한 가족이라고 불러주면서 교과서에 끼워준다. 그러나 결코, 선을 넘어 내 쪽으로 걸어오지는 않는다. 하은이는 두리네 집에 놀러 가서 베트남 출신인 두리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쌀국수를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엄마아빠와 남동생에게 '쌀국수가 정말 맛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다양한 가족을 주제로 하는 단원이지만, 정작 단원의 주인공은 정상가족의 아이인 하은이다. 두리의 가족은 하은이가 잠시 놀러갔다가 돌아오는 곳이다.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부모님 중 한 분이 외국인인 가족을 본 적이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라는 친절한 문장은 마치 이 교과서를 읽을 아이들은 오로지 하은이들뿐이라고 못박는 듯하다. 포용을 가장한 철저한 타자화, 바로 이것이 내가 느끼는 모욕감의 원인이다. 열 살 두리, 멀쩡하게 학교를 다니지만 주인공은 될 수 없는 두리, 방금 아침밥을 먹고 나온 우리 집을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본 적이 있는지' 이야기해야 하는 두리를 생각한다. 그 다음 페이지, 온갖 종류의 비-정상가족들이 마치 '다양한 가족 백화점'마냥 줄줄이 진열된 페이지에서 '우리 가족'을 발견하게 될 아이들을 생각한다.
장애우障礙友라는 단어가 사라진 이유는, 그 안에 '친구'라는 의미가 있어 정작 장애인 본인이 스스로를 지칭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직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부를 때만 성립하는 단어인 셈이다. '다양한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통합교과 '다양한 가족' 소주제의 내용 요소는 '배려와 존중'이다. 내가 나의 가족을 다양하다고 말할 수 없듯이, 나 자신을 배려하고 존중할 수도 없다. 다양한 가족은 오직 정상가족의 반대항으로서만, 수업 시간에 '알아보아야' 할 타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사회 교과서는 '가족의 구성과 역할 변화' 소단원과 '다양한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 소단원을 따로 제시하고 있는데, 전자의 삽화와 사진에는 오로지 정상가족만 등장한다. 마치 전자는 보편의 가족, 후자는 특수의 가족이라고 명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과서 집필진들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면 베풀수록, 운동장 중앙의 선은 점점 선명하고 두꺼워진다. 정상가족 도식은 점점 공고해진다.
로웬펠드는 아동의 도식적 미술 표현을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지만, 도식기를 지나 또래집단기에 이르면 점차 도식에서 벗어나 사실적 표현을 탐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관찰이다. 실제 산과 나무를 자세히 관찰하면 그것이 전혀 세모 모양이나 구름 모양이 아니라는 것을, 훨씬 복잡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상가족의 도식 역시 마찬가지다. 다양한 가족이라는 말에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가족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운동장 저편에 있는 400명의 가족들도 모두 다르다. 사이가 좋은 가족, 나쁜 가족, 데면데면한 가족이 있고, 생일을 챙기는 가족과 그냥 넘어가는 가족, 가정폭력이 발생하는 가족과 발생하지 않는 가족이 있다. 자세히 관찰하면 우리는 알게 된다. '엄격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로 시작하는 완벽한 정상가족 도식은 사실 세모난 산과 구름 모양 나무와 같은 허구라는 것을. 하은이네 가족도 두리네 가족도, 어느 한 쪽이 정답이 아니라 각자의 특수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따뜻하고 포근한' 모르는 아줌마를 주제로 시를 쓴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지금도 어디선가 그런 시를 쓰고 있을 아이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주고 싶다. 두리가 주인공인 교과서를 만들고 싶다. 두리 어머니가 주인공이면 더욱 좋겠다. 다양한 가족을 '다양한 가족' 단원에 가두는 대신 모든 교과서의 모든 페이지에 등장시키고 싶다. 가족의 소중함, 가족의 사랑과 더불어 가족의 미움, 가족의 슬픔, 가족의 폭력을 교과서에서 함께 다루고 싶다. 날씨 좋은 날 다 같이 스케치북을 들고 나가, 둥그런 동산 위에 자라난 소나무, 잣나무, 느티나무, 밤나무, 벚나무, 감나무를 각자의 모습대로 함께 그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