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이름뭘로하지
20200717 본문
아주 오래 전부터 내 꿈은 오로지 고요와 평화뿐이었다. 고요와 평화. 내가 즐겨 꾸는 백일몽이 두 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아주 길고 가느다란 바늘을 귓속에 넣어 내 손으로 고막을 펑 터뜨리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의 아오마메가 쓰던 것 같은 아주 섬세하고 예리한 바늘로... 그 소설을 읽은 건 고등학교 때였고 이제는 줄거리도 결말도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왠지 그 바늘만은 뇌리에 아주 깊숙히 남아 내 공상 드라마의 일등 소품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좀 덜 폭력적이고 더 비현실적인 버전으로, 어느 날 갑자기 일확천금이 생겨 지금까지의 삶을 모두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변호사인지 해결사인지를 고용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입힌, 그리고 이제 사라지면서 입힐 모든 유무형의 피해를 모두 막대한 돈으로 보상하도록 하고 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먼 나라로 떠날 것이다. 어차피 가상의 나라니까 기후는 환상적이고 경치는 그림처럼 아름다우며 전기 및 상하수도 시설은 완벽한 곳으로.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인터넷과 전화선은 전부 끊고 평생 혼자 살아갈 것이다. 책을 읽고 정원을 가꾸면서 고요하고 평화롭게.
그런데 어쩐지 이 두 번째 공상이 지금 현실로 이루어진 것 같다. 비록 상상 속의 아름다운 나라는 다락리 산골짜기로, 철학과 예술에 대한 우아한 양장본은 2015 개정 초등교육과정으로 다운그레이드되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지금 더할 수 없이 고요하게 사는 중이다. 약속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매일 학교와 도서관을 오가는 것만이 할 일의 전부다. 그마저도 가끔 귀찮으면 안 간다. 오랜 꿈을 이뤘으니 행복할까요. 아니니까 이렇게 글을 쓰고 있겠지. 소음이 외부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깨달았다'는 말은 사실 적절한 단어가 아닌데, 그동안 내 머릿속은 조용했던 적이 한 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나는 정말...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 이렇게 쓰니까 대단히 지적인 사람 같지만 그 생각들의 99.9%는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는 정말 잡생각들이다. 내 머리는 마치 백만 개의 악기가 전부 다른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 같고, 성실한 단원들은 밤에도 쉬는 법이 없어 스무 살 이후로는 꿈 없이 잠든 밤이 드물다. 자려고 누울 때마다 롤러코스터 좌석에 앉는 기분이다. 신나는 모험이 될지 끔찍한 악몽이 될지 출발하기 전에는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에는 이런 내 정신상태에 큰 불만이 없었다. 시끄러운 생각들에는 진작에 익숙해졌고, 가끔은 소음과 불협화음 사이에서 꽤 재미있는 멜로디가 들려오기도 했으므로. 그러면 나는 그 멜로디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댄스 버전 어쿠스틱 버전 트로트 버전 국악 버전으로 편곡하며 놀았고, 그러는 동안 현실에서는 우산을 잃어버리고 친구 생일을 깜빡하고 과제를 제때 안 내고 공지를 못 읽고 약속에 늦곤 했지만, 어쨌거나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생존방식이기도 했다. 바깥 세상이 너무 시끄럽다고 느낄 때 나는 내 안의 볼륨을 더욱 키워 그 안에 숨을 수 있었다. 써본 적은 없지만 에어팟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그렇게 작동한다고 했던가.
그러나 이제 나의 생각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많다. 최근 나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유튜브에서 짧고 무의미한 영상들을 많이 찾아 보았는데, 그것들은 별 영양가도 없으면서 휘발되지 않고 머릿속을 날파리 떼처럼 앵앵거리며 날아다녔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 아이돌의 음악방송 교차편집 영상, 좋아하지도 않는 마카롱을 굽는 영상, 아무 관심도 없는 슬라임을 만지는 영상... 머릿속에 쓸데없는 정보값을 추가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내용이 없는 영상들만 보았는데 차라리 묵직한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볼 걸 그랬다. 가벼운 먼지가 가라앉지 않는 것처럼 머릿속이 혼탁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래서 유튜브가 문제라고들 하는가! 자라나는 아이들을 어쩌면 좋은가! 라고 혼자 걱정도 하고 그랬더란다.
그리고 세상의 말들이 나를 너무 아프게 한다.
원래 나는 예전부터 이 구역의 분노대장이었고, 알고 화내는 것이 모르고 마음 편한 것보다 낫다고 늘 생각해왔다. 말하고 싸우고 행동해야만 잘못된 것이 변하니까, 나는 세상이 조금 더 나은 곳이 되기를 바라니까...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다만 마음이 너무나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n번방이 그 시작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20만 명은 너무 큰 숫자였다. 저런 일이 어떻게 실제로 일어날 수 있나...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인간들이. 그리고 세상은 어떻게 이렇게 평온할 수가 있나. 뻔뻔할 수가 있나. 사회를 향한 가장 근본적인 믿음이, 그러니까 법이, 정의가, 윤리가 어떻게...... 오만 가지 주제에 대해 글을 써 왔지만 이것에 대한 언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사명감 같은 건 별로 없는 노동직관이지만 아무튼 선생이 되겠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곳에서 어떻게...... 이것은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지난 몇 달 간 나를 가장 괴롭게 한 것 역시 자칭 페미니스트들이었으므로. 숙명여대 사건은 내게는 커다란 절망이었다. 그들의 말은 역했고 악취가 났다. 지치고 슬퍼도 함께 걸을 사람들이 있다면 멀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들과는 함께 걸을 수 없다. 그럴 수 없다. 이 문장을 쓰는 데 오래 걸렸다.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뒷머리가 묵직했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거기 들어 있었다. 너무 시끄럽고 아픈 생각들이 바글바글바글바글. 코로나 시대의 임고생이 되어, 그토록 원하던 조용함을 잠시 얻었는데, 왜 고요와 평화는 얻지 못하는 걸까. 문제는 여기, 내 머릿속에 있었다. 이래서는 고막을 터뜨려도 먼 나라로 망명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백일몽의 내용이 두개골을 깨고 뇌수를 강물에 흘려보내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을 때(그것은 무척 명랑하고 홀가분한 상상이었다) 나는 명상 어플을 다운받았다.
월 4400원을 받아먹는 것치고 어플의 컨텐츠는 단순했다.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세요. 들숨에 지금, 날숨에 여기. 지금 여기, 지금 여기, 되풀이하세요. 지금 여기. 지금 여기. 저기요 제 4400원 돌려주세요. 하지만 그 네 글자가 정말로 내게 짧은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지금 여기'를 중얼거리는 동안에는 세상이 잠시 투명하고 고요했다. 몰랐는데, 지금 여기는 좋은 곳이었구나. 하지만 열 번을 넘겨본 적은 없다.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는 순간 곧바로 딴생각이 몰려왔고 나는 '다른 어디'로 순식간에 끌려갔다. 생각에 휩쓸려 10분쯤 지나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지금 여기, 지금 여기...... 그리고 다시 딴생각. 시작한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으니 점점 나아질 거라 생각한다.
이야기가 너무 깊은 데로 샜다. 원래 쓰려던 글은 독서의 부작용에 대한 실없는 불평이었다. 내가 자꾸만 '다른 어디'로 끌려가는 것은 다 책을 너무 많이 읽었기 때문이라고.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이제 나는 생각도 텍스트로 하게 되었는데, 애초에 문자의 탄생 이유가 바로 '지금 여기가 아닌 곳'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냐고. 책을 읽는 사람이 어떻게 지금 여기에 살 수가 있냐고 아무튼 이건 다 책 때문이라고... 이런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전혀 다른 글이 나왔다. 아마 내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생각의 파편이 아닌 정리된 한 편의 글의 형태로.
나는 늘 글의 마무리를 잘했다. 지금도 그럴 수 있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쉽게 쓴 문장, 나조차 믿지 못하고 쓴 그럴 듯한 문장으로 글을 끝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글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다. 물에 떠오르는 가벼운 말, 일부러 곱게 꾸며 쓴 말, 남의 옷을 입은 말들을 다 흘려 보내고 남은 말들로 글을 쓰고 싶다. 남은 것이 볼품없는 말뿐이라도 오로지 그것으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