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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교단일기

3월과 6월

slowglow01 2021. 6. 5. 17:56

요즘은 좀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몸은 여전히 너덜너덜하게 힘들지만 마음은 평온하다. 가끔은 교사효능감 같은 게 들기도 한다. 퇴근하다가 갑자기 '있잖아 나... 좀 잘하고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스스로 칭찬해주고는 혼자 해죽거린다는 뜻이다. 어쩌다 다른 선생님들께 칭찬이라도 들은 날에는 (그게 진심이든 빈말이든) 셀프 칭찬 역시 더욱 길고 거창해진다. 기간제도 안 해본 신규가 학급붕괴 안 겪고 지금까지 무사히 잘 지내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 아니야? 3월의 그 노답대잔치를 생각해 보면 눈부신 발전이야. 이제 수업도 잘하고(여전히 가끔 망하지만) 이런저런 실수도 줄었고, 아이들이랑 사이도 참 좋잖아. 퇴근 시간도 엄청 당겨졌어. 어쩜 좋아. 나 참교산지 들교산지 그런 건가 봐.

사실 냉정히 생각하면 그저 망가지는 것만 면한 채 평범하게 덜그럭덜그럭 굴러가고 있을 뿐일 우리 반(과 그 담임)이 이렇게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3월과 4월이 워낙 버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만에 3월에 썼던 글을 열어 봤다가 그때의 감정들, 피로와 자책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몰려와서 잠시 괴로웠다. 그때 나는 밤 10시에 퇴근했고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가서 울었으며 매 순간 아이들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4년 동안 대학에서 배운 모든 것, 그리고 수업실연도 곧잘 하고 임용시험도 잘 쳤던 나의 모든 것이 열 살 아이들 열일곱 명 앞에서 산산이 무너졌다. 내가 대체 어떻게 해야 되겠니??? 아냐... 다 내 능력 부족이야. 아이들 탓 하지 말자. 아니 근데 애들이 너무....!!! 아수라백작처럼 내적 갈등을 반복할수록 나만 점점 한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5월쯤부터 천천히 마음이 잔잔해졌다. 우리 반도 함께. 3월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반 말하기 신호등'을 만들었는데(얘들아! 빨간불에서는 말하지 마! 내가 말할 거니까!!) 요즘은 거의 쓰지 않는다. 서로 때렸니 밀쳤니 하고 내게 찾아오는 빈도도 줄었다(이건 차마 많이 줄었다고는 못 쓰겠다. 여전히 일름보들이다). 가끔 수업 분위기가 과열될 때 말고는 손 들고 잘 말하고 잘 듣는다. 우리 반 금쪽이도 이제 의자를 괴상하게 눕혀 놓고 앉거나 시도 때도 없이 큰 소리로 떠들어서 수업을 못 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땐 참 힘들었어. 어떻게 버텼는지 몰라. 시간이 약이었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한 학생의 편지를 받고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요? 선생님이 퀴즈 내주셨잖아요. 그때 재미있었어요! (...) 수학 시간에도 코알라 게임 재미있었어요."

아이들을 처음 만나 퀴즈를 내주었던 것은 3월. 수학 시간에 '잠자는 코알라 게임'을 한 것도 3월의 일이다. 재미는 있었지만 드는 시간에 비해 효율이 너무 떨어져서 '텔레파시 게임'으로 종목을 바꿨고 이제는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학습 목표 달성에는 게임보다는 차라리 설명 줄줄 문제 달달이 낫다는 슬픈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아무튼 내가 자책하고,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던 그때를 아이가 '재미있었다'라고 말해주어서 나는 무척 놀랐다. 엉망진창이었던 시기, 아무튼 지나가서 다행인 시기, 나는 3월을 그렇게만 기억했지만 아이들은 그때도 재미를 찾고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수선하고 불안정한 학급 분위기, 자꾸 깜빡하고 이랬다저랬다하는 선생님, 아이들이라고 이런 것들이 편안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와 다르게 그 시기를 그저 엉망으로만 기억하지는 않았다. 그때 우리는 만났고, 비록 잘되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재미있는 것들을 같이 해 보았다. 내가 '망했다...' 생각하는 동안에도 어떤 것들은 즐거운 기억으로 아이들에게 남았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초근도 못 쓰고 밤 10시까지 다음 날을 준비하면서 간절히 바랐던 것이었다.

편지를 받고 알게 됐다. 3월과 6월 사이의 변화,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준 것이 아니다. 내가 한 일이다. 자꾸 잘못만 하고 있는 것 같아 전전긍긍하던 3월의 내가 한 일이다. 나의 6월이 3월보다 평안해진 것은, 내가 매일 밤 고민을 한 바가지 끌어안고 잠들고, 계속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또 실패하고, 아침에는 출근하기 싫어 천장만 쳐다보다가도 교실에 들어가면 있는 힘을 다해 씩씩함을 짜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물론, 이렇게 못미덥고 심약한 인간도 담임이라고 계속 믿고 따라 준 2반 아이들이 한 일이기도 하다.

3월의 나에게 달려가서 이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다. 네가 해냈어. 아니 사실 이제 겨우 6월이라 해냈다는 말은 좀 민망하지만, 아직 갈 길이 구만 리지만, 그래도 네 불안과 피로는 분명 가치가 있었어. 너는 끔찍한 교사가 되지 않아. 아이들을 미워하게 되지 않아. 네가 해낸 거야. 이 말을 듣는다면 3월의 나는 기뻐서 또 펑펑 울겠지만.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해낸 거야. 앞으로도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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