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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교단일기

나의 방학 숙제

slowglow01 2021. 7. 25. 19:45

7월 23일. 마침내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왔다. 교사 인생 첫 학기 동안 경험한 일의 기쁨과 슬픔, 학생들과의 사랑과 전쟁, 스물네 살 김 교사의 고난과 역경 그리고 성장 스토리... 구구절절 할 말은 많지만, 가장 명백하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나는 지난 5개월 동안 하루 12시간 이상 일했고 이건 뭔가 잘못됐다.

아무도 내게 사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매일 몇 시간씩 무료 초과근무를 하라고 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대체 왜 이러고 있는가?'는 내게도 한 학기 내내 미스터리였고 이 블로그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답을 내놓은 바 있다. 1)초임교사의 열정과 책임감 2)자존심과 인정욕구 3)그냥 내가 일하는 속도가 많이 느림 4)원래 다들 나만큼 해야 하는데 남들이 대충 하고 있는 것임(농담입니다)

아무래도 1번이 가장 멋지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라, 그동안 남들에게 또 스스로에게 1번 버전의 나를 열심히 피력해 왔다. 가지고 있는 모든 sns 계정들과, 이 블로그와,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모든 지인들에게 끊임없이 자랑인지 불평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으면서. 아휴~ 다음 주 수업을 열심히 준비하다 보니 벌써 밤 9시가 되어버렸네~(슬픈 얼굴 이모지) 교감선생님이 일찍 퇴근하고 좀 쉬라고 하셨는데 나도 참 못 말려! 에헷 딱콩! 상당히 짜증 나는 짓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나름의 절박함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다 내가 멋진 직업인이기 때문이야! 난 불행한 게 아니라 열정적인 거야! 누구에게든 변명해야 나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물론 여기에 거짓말은 없다. 나는 정말로 내 일을 (그리고 나의 학생들을) 좋아하고, 일하면서 진심으로 즐거웠으며, 한 학기 동안 많이 배우고 성장한 것도 전부 사실이다. 하지만 학기가 마무리될 즈음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결국 다섯 번째 답을 정답으로 적어 낼 수밖에 없었다. 5)이것 말고는 달리 삶의 낙이 없어서.

힌트는 처음부터, 교사가 되기 전부터 내 옆에 있었다. 올해 1월 6일 일기에 나는 이렇게 썼다. "빠르면 바로 두 달 뒤에 선생님 소리를 듣게 될 것 같은데,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무리일 것 같아 정신건강을 회복할 방법을 모색중이다. (...)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 하는데 너무 지쳤고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출근을 앞둔 2월 27일에는 이렇게 썼다. "3학년 2반 보호자에게 뭐라고 말할까. 실은 지금 저의 가장 큰 관심사는 회복입니다. 삶의 이유를 잘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 귀댁의 자녀가 그걸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는 자녀분들에게 제 남루한 사랑을 다 드리겠어요."

이 문장은 내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현실이 된다. 교사가 되면서 정말로 삶의 이유를 다시 찾게 되었지만, 이유가 하나뿐인 삶도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퇴근하고 관사에 돌아오면 으레 외로움과 공허함 그리고 실체 없는 불안에 시달렸다. 오직 선생님일 때 나는 의미 있고 필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좋은 선생님이라는 걸 누구에게든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쏟았다. 사랑도 정성도 시간도. 달리 쓸 곳도 없는데 뭐. 아는 이 없는 낯선 시골 마을에 혼자 살고 있는 상황은 과몰입을 더욱 부추겼다.

저는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들러리를 서 줄 학생들이 필요했는데, 나중에야 그것이 잘못임을 알고 저와 학생의 위치를 바꾸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것이 저를 개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 하나에 교사로서 전 존재를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 오늘의교육 편집위원회 저


나는 쉽지 않은 상황에서 한 학기를 버텼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학생들과 사랑을 주고 받았고 열심히 가르쳤고 여러 가지 재미있는 시도도 해 보았다.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 주고 싶다. 다만 이런 생활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난해 겨울 아프게 읽었던 위의 문장처럼, 나와 학생들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학생들은 내 인생의 의미를 찾아 주거나 길 잃은 사랑의 대상이 되어 주기 위해 학교에 오는 것이 아니다.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니, 그럼 먼저 행복해져야 해. 교사가 되기 전에도 몇 번 들어본 말이지만 그때는 이런 뜻인줄 몰랐다.

헤어지는 날, 학생들에게는 책을 꾸준히 읽고 운동을 하고 리코더 연주를 연습하라는 방학숙제를 내 주었다. 선생님만 놀면 치사하니까 나에게도 숙제를 하나 내주려고 한다. 사랑할 것을, 달리 마음을 쏟을 것을, 다른 행복을 찾아 오세요. 솔직히 말하면 나도 별로 자신이 없으니 한 달 뒤에 학생들이 방학숙제를 안 해와도 너무 혼내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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