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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발견하기

slowglow01 2022. 1. 9. 22:37

여행 둘째 날은 전날과 날씨가 딴판이었다. 바다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고 나는 롱패딩을 벗어 한 손에 들고 돌아다녔다. 전날에 오동도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파제만 다녀온 것이 아쉬워서, 다시 자전거를 빌려 타고 오동도로 향했다. 푸른 바다 위의 오동도는 전날과는 다른 섬 같았다.

반짝반짝


아직 동백철이 아니었음에도 오동도는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그래서 오히려 할 말이 별로 없다. 사이 좋은 가족 친구 커플 여행객들 사이에서 혼자, 생각보다 가파른 오르막을 헉헉거리며 올라가면서, '우와 짱이다 진짜 예쁘고 기분 좋다 역시 사람이 나무와 흙을 봐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이나 할 뿐이었다. 행복했다. (역시 사람은 생각을 안 하고 글을 안 쓸수록 행복한 법이다...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워? 혹시 블로그 같은 거 해?) 멀리 바다 위에는 갈매기가, 머리 위 소나무 가지에는 직박구리가, 그리고 땅에는 멧비둘기들이 등산객들처럼 태연하게 내 옆을 걸어다니고 있었다. 모두 오랜만에 보는 새들이라 반가웠다.


작년, 아니 벌써 재작년이 된 2020년에는 하루 종일 하늘만 쳐다보면서 걸어다녔다. 기숙사에서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멧비둘기를, 도서관에서 잠시 바람 쐬러 밖으로 나와서 물까치와 어치를, 저녁을 먹으러 기숙사 식당으로 돌아가면서 박새와 직박구리를 찾아다녔다. 꾀꼬리나 딱따구리, 딱새 같은 새를 발견하는 날이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후투티를 꽤 가까이에서 본 적도, 진짜 파랑새를 먼발치에서 잠깐 본 적도 있다. 윤무부 박사가 쓴 얇은 새 도감을 한 권 샀고, 물까치의 포악한 울음소리와 꾀꼬리의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이어폰을 꽂고 대운동장을 달렸다. 휴대폰으로 스텔라리움 프로그램을 켜고 목성과 토성을 찾았고 붉은 화성의 사진을 찍었다. 쌍둥이자리와 마차부자리를 찾았고, 시리우스가 '정말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고, 텅 빈 밤하늘을 눈을 부릅뜨고 노려본 후 플라이아데스 성단을 잠깐 본 것 같다고 우기기도 했다. 더는 달리지 못할 만큼 날씨가 추워진 뒤에는 운동장 옆 벤치에 앉아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원래 그렇게 서정적인 성격은 아니다. 그런데 왜 그때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환생이라도 된 것처럼 별과 새를 찾아다녔는가. 그야 임용시험 공부가 외롭고 지루하기 때문이었다. 맛없는 기숙사 식당 밥도 싫었고, 재미있는 책이 가득한 도서관에서 지도서만 들여다봐야 하는 것도 싫었다. 그리고 그때는 마음이 무척 시끄럽고 아팠다. 세상의 말들이, 내가 듣거나 했던 말들이 백만 개의 쇠구슬이 되어 머릿속을 굴러다니는 기분이었다. 숨쉴 때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싫어서, 평온해지고 싶어서 일부러 말 없는 것들을 찾았다. 꽃과 별과 새. 이름 부르는 것만으로 벌써 눈물겨운, 연약하고 가벼운 한 음절의 낱말들. 단순하고 번민 없고 어여쁜 것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는 백석의 시처럼, 다른 것들은 입에 담지도 쳐다보지도 않고, 영영 아름다운 것들만 붙잡고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 무렵에 트위터에 이런 글을 썼었다.

어떤 선생이 되고 싶냐는 질문은 입시를 준비하던 고등학생 때부터 수도 없이 들어 왔다. 그 대답은 지금까지 여러 번 바뀌었고 사실 본심은 늘 '모르겠는데요...' 였다. 요즘의 내 대답은 이렇다. 언제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탄할 줄 아는 교사가 되고 싶어요. 학생들과 함께 감탄하고 싶어요.

방금 내 방 창문 앞에서 직박구리 한 마리가 꺅! 꺅! 꺅! 세 번 소리를 지르고 날아갔다. 언제까지나 이런 것들을 반갑게 눈치채는 사람이고 싶다. (2020.8.6.)
오동도 전망대


그러나 '언제까지나'라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나는, 고작 6개월 만에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조차 몽땅 잊어버리고 만다. 무슨 일이 있었냐, 발령을 받았다. 교육청에서 전화 한 통이 왔고, 3학년 2반 선생님이 되었고, 꽃이고 별이고 아름다움이고 나발이고 얘들아!! 선생님 말 좀 하자!! 지금은 말하기 신호등 빨간불이에요!! 초록불이 되면 말하세요!!!

나의 근무지도 대학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시골이었으므로 아마 대학보다 훨씬 많은 꽃과 별과 새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도 감탄하지도 못했다. 놀이터 옆 벚나무에 벚꽃이 만개한 것도, 밤하늘에 별이 총총한 것도 보기는 전부 보았지만 그 풍경들은 눈앞에서 힘없이 미끄러졌다. 그렇게 계절 없는 1년을 보냈는데 갑자기 직박구리를 다시 마주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전과 똑같은 모습과 울음소리로. 한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잘 지냈니? 여전히 아름답구나. 아마 너를 만나러 오동도에 다시 왔나 봐.

혹시 사람들은 이래서 여행을 좋아하고 그렇게 자주 가고 싶어하나. 새로운 것을 찾으러가 아니라, 잊어버렸던 것을 되찾으려고. 아마 돌아가는 순간 다시 잊어버리겠지만 그래도.

자세히 보면 동백꽃이 보인다. 활짝 핀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좋아... 꽃이 만개하면 관광객들이 몰려올테고 나는 인간을 싫어하니까...^^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방파제


오동도에서 나온 뒤에는 택시를 타고 돌산도로 향했다. 바다가 보이는 멋진 카페에서 몽돌라떼인가 하는 것을 한 잔 마시고 무슬포해변에 갔다. 원래 해양수산과학관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휴관 중이었다. 조금 속상했는데, 무슬포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

기울어진 거 나도 알아요..
기우뚱

내가 그곳에서 본 풍경을 열심히 묘사해 보려다 전부 지웠다. 이런 것을 글로 설명하는 데는 소질이 없다. 그리고 보다시피 사진 찍는 데도 소질이 없다(이런 색이 아니었다고요). 그래서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였던 무슬포해변의 해 지는 모습은 영원히 나 혼자만 알고 있게 되었다. 딱히 아무도 안 부러워 하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30분 동안 꼼짝 않고 서서 해 지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했다. 어떻게 살긴, 열심히 공부해서 선생이 되었으니 선생으로 살아야지. 계속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좋은 수업을 하고, 더 좋은 생활지도를, 더 좋은 상담을 더 좋은 업무를 하려고 노력해야지... 여기에는 정말 아무런 불만도 없다. 나는 나의 일이 좋다. 그리고 이제 빼도 박도 못할 20대 중반이 되었으니 스스로를 좀 잘 챙겨 먹이며 살아야 할 테고, 언제까지 관사에서 살 수는 없고 독립을 해야 할 테니 월급을 성실하게 모아야 할 테고, 하고 싶은 공부도 많고, 친구들과 계속 잘 지내고 싶고 운이 좋으면 연애를 할 수도 있고... 반박할 이유가 없고 반박하고 싶지도 않은 답이 바로 눈앞에 있다. 그런데 자꾸만 조급하고 길 잃은 기분이 든다면, 무언가 아주 중요한 숙제를 깜빡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그건 내가 젊고 성급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보편적인 현대인의 불안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지난번 글에도 나왔던, 나와 같은 날짜에 다른 곳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던 친구였다. 나는 수화기 너머로 파도소리를 들려주었고 친구는 마음 정리는 좀 했어? 라고 물었다.
"아니.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정리되는 게 아닌가 봐. 그냥 여행만 재밌게 했어."
친구는 자기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고 우리는 같이 와하학 웃었다. 정말 그런가 봐! 고작 2박3일 여행으로 마음이 정리될 거라는 건 너무 양아치 심보였나 봐. 그냥 어수선한 마음을 이고 지고 끝까지 살아야 되는 건가 봐. 그래도 재밌게 놀았으니까 그걸로 됐어. 다음에는 꼭 같이 가자.

다시 택시를 타고 육지로 돌아와서, 저녁으로 전복 리조또와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전날 마시다 남은 소주를 비우며 아즈마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을 읽었다(역시 여행하며 읽으려고 일부러 산 책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은 숙소에서 나와서 바로 집으로 돌아갔으므로, 여행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이제 남은 건 죄책감 없이 최대한 오래 침대에서 뒹구는 것. 방학은 짧고, 한 달 반 뒤에는 다시 몇 학년인지 모를 아이들의 선생님이 되어야 하니까, 스스로에게 최대한 잘해주면서 보내려고 한다. 되도록 많이, 되도록 소리 내어 웃으면서. 그리하여 꽃과 새와 별들을 다시 기꺼운 마음으로 발견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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