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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이름뭘로하지

하루종일 교실 한 칸 밖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교사의 삶이라지만, 교사로 살면서 출세하는 것도 의외로 가능하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중요한 것은 먼저 'ㅇㅇ쌤'이라는 닉네임을 정하는 것이다. 그 이름으로 인디스쿨, 인스타그램, 블로그를 굴리며 열심히 셀프 브랜딩을 한다. 그리고 그때그때 정부나 교육청이 좋아하는 주제를 하나 잡아서(요즘은 ai가 대세다) 연수를 열고 모임을 꾸리고 컨텐츠를 만들면 된다. 한 마디로 교육 컨텐츠를 판매하는 1인 기업이 되는 것이다. 물론 말이 쉽지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교사로 살면서 출세하지 '않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퇴근 후에는 가정에 충실하고. 좋은 선생님이자 선량한 국민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말만 쉬울 뿐 ..

#1 강당이나 급식실로 이동할 때면 내가 앞장서 걷고아이들이 줄을 서서 따라온다.평소와 같은 걸음으로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면아이들이 저만치 멀리서 따라오고 있다.내 걸음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그렇다고 선생님 좀만 천천히 가요, 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나를 따라잡으려고 걸음을 빨리하는 것도 아니고그냥 나를 앞세워 보내고 자기들 속도로 뾰장뾰장 걸어오는 아이들아... 천천히 걸어야 하는구나아이들의 걸음 속도에 익숙해지는데 이 주쯤 걸렸다.#2 우리 반은 아침 인사와 하교 인사가 똑같다."서로-존중하며 / 우정을-가꾸는 / 안전한-우리 반 / 선생님-안녕하세요(안녕히 계세요)"아이들이 첫날에 직접 고른 가치인 존중, 우정, 안전을 넣어 만든 인사다.반장이 선창을 하면 나머지 아이들이 후창을 하는데아..

20대 후반이 되면서 스스로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 이를테면, 내 천성과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아주 많은 것들이 세로토닌 부족과 저혈압과 장내 미생물의 합작품이었다는 것. 이걸 진작 알았으면 스스로를 그토록 미워할 일도 없었을텐데. 특히 저혈압은 가장 최근에 알게 된 것인데(헌혈하러 갔다가 혈압 때문에 거부당했다), 챗gpt에게 저혈압에 대해 물어봤다가 충격받아 몸져누울 뻔했다. 내 정신과 육체의 거의 모든 문제가... 실존의 문제도 구조의 문제도 아니라 혈관에서 피가 졸졸 흐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니...(갑자기 진지하게 말하자면 사실 저혈압은 실존의 문제기도 하고 구조의 문제기도 하다.)지난 주에는 사흘 동안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고, 이틀 동안 출근을 하고, 주말에는 완전..
용기는 언제나 저녁에 필요하다.잠드는 데에아침에는 용기가 필요 없다, 일어나서 씻고 일하러 나가면 된다.나머지는 습관이 알아서 해 준다.싸우러 나서는 데에도 용기는 필요하지 않다.귀를 찢어 놓는 앰프의 울림심장들의 울림을 따라서 가면 된다.다만 싸우고 돌아오는 길에는 특별한 용기가 필요하다.수험생 시절에하루에 다섯 시간 공부한 날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그러나 삼십 분 공부한 날은 죽을 만큼 괴로웠지그런 것이다.아무 것도 하지 않을 용기아무 것도 하지 않은 고통그런 마음들은 진짜로 존재하고심지어 꽤나 중대한 문제다.그에 비하면 실제로 뭔가 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고통은 오히려 사소한 수준이다.그래? 그렇다면 뭔가를 해!이런 말은 심각한 폭력이다.(심지어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해도)(아니 그런 경..

어제는 영화 '인사이드 르윈(2013)'을 보았다. 오스카 아이작이 주연한 코엔 형제의 음악 영화.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고 이동진 평론가가 별 다섯 개를 줬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중요한가? 아무튼.주인공인 르윈 데이비스는 이래저래 일이 잘 안 풀리는 포크 뮤지션이다. 앨범은 안 팔리고, 함께 앨범을 만든 동료 마이크는 자살했고, 잘 곳이 없어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고, 전 여자친구는 임신했다고 하고... 기타 등등. 영화는 르윈이 오디션을 보기 위해 시카고에 갔다가 돌아오는 며칠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침울하고 잔잔한 분위기지만 그 안에는 유머와 은유가 가득하다. 그리고 고양이도.영화는 무척 재미있는 수미상관의 구조로 되어 있다. 즉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르윈의 하루는..

며칠 전부터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오늘은 소위 천국의 계단이라 불리는 스텝밀을 처음으로 타 보았다. 타면서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 들었는데, 아니 이거 에스컬레이터와 정확히 반대되는 물건이잖아?? 오르지 않아도 저절로 올라가는 계단과, 올라도 올라도 절대 오를 수 없는 계단. 계단을 올라야 할 때는 가만히 서 있고, 전혀 오를 필요가 없을 때는 끝없이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현대인이란 정말 부조리한 존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천국의 계단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라도 해야 버틸 수 있다. 시끄러운 음악이 흐르고, 똑같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이상한 기구 위에서 끙끙대는 모습은 마치 어떤 집단 의례ritual의 한 순간처럼 보인다. 푸코가 살아서 헬스장을 보았다면 뭐라고 ..
내 취미 중 하나는 지금 이 화면(티스토리 새 글 작성)을 띄워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다. 앉아서 한두 문단 정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마음을 들여다본다. 투명하게 들여다보인 적은 한 번도 없다. 슬프다 라고 쓰면 그제서야 슬픈 사람이 된다. 그게 싫어서 지운다. 단어들이 지겹고(이렇게 씀으로써 지겨운 사람이 된다) 이름이 지겹고 이야기되는 순간 비로소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이 지겹다. 그럼에도 계속 쓰고 싶다. 투명한 것들이 좋다. 현대철학은 투명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현대철학은 웬만한 것들은 다 없다고 하기 때문에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말은 어쨌든 위로가 된다.아니, 섣불리 위로를 말하지 말자. 언제부터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는지 돌이켜보면 정확히 이 다짐을 했..

유산균을 샀다.어디서 정신건강과 위장건강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팩트체크를 해본 건 아닌데 뭔가 너무 신빙성 있게 느껴져서아이허브에서 직구로 주문해버렸다.얼른 와라진도는 끝났지만아이들을 놀릴 수는 없다한차시 한차시 알차게 보내는 중오늘은 도서관에 가서파키스탄에서 온 아이와 함께 이억배의 을 읽었다.내가 소리내서 읽으면 아이가 따라 읽고그림을 보면서 다람쥐. 여우. 호랑이 같은 동물 이름들을 알려준다.예지책방에서 이 책을 보고 정말 멋진 책이라고 생각했는데아이와 함께 읽으니 열 배로 더 멋진 책이었다.아이는 한국어를 거의 못하고 나는 우르두어를 아예 못하지만나란히 앉아 이억배 선생님의 그림을 들여다볼 때우리가 같은 마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 순간이 너무 충만해서 점심시간을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