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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쓰는 연습

개학 전날의 마음

slowglow01 2025. 3. 3. 17:50

20대 후반이 되면서 스스로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 이를테면, 내 천성과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아주 많은 것들이 세로토닌 부족과 저혈압과 장내 미생물의 합작품이었다는 것. 이걸 진작 알았으면 스스로를 그토록 미워할 일도 없었을텐데. 특히 저혈압은 가장 최근에 알게 된 것인데(헌혈하러 갔다가 혈압 때문에 거부당했다), 챗gpt에게 저혈압에 대해 물어봤다가 충격받아 몸져누울 뻔했다. 내 정신과 육체의 거의 모든 문제가... 실존의 문제도 구조의 문제도 아니라 혈관에서 피가 졸졸 흐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니...

(갑자기 진지하게 말하자면 사실 저혈압은 실존의 문제기도 하고 구조의 문제기도 하다.)

지난 주에는 사흘 동안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고, 이틀 동안 출근을 하고, 주말에는 완전히 뻗은 채로 보냈다. 그토록 기운차에 하루에 이만 보씩 걷다가 갑자기 침대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오게 되었다. 오르막이 가파르면 내리막도 그렇지. 이렇게 사는 데 익숙해져서 이제 하강 곡선의 파도는 제법 익숙하게 타는데(ㅋ) 오히려 상승 곡선이 어렵다. 갑자기 내가 천재인 것 같고 세상의 모든 멋진 일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지는 때. 그때 좀 진정을 하고, 나대고 싶은 마음을 참고 곧 다가올 하강에 대비해 안전벨트를 매는 것이 항상 쉽지 않다.

침대에서 보내는 이틀 동안에는 책도 못 보고 영화도 못 보고, 심지어 트위터 타임라인마저도 필사적으로 피하면서 보냈다. 읽기 어려운 소식들이 많았다. 서울시교육청에서 지혜복 선생님의 복직을 요구하던 연대자들이 전원 연행되고, 그중 두 명에게는 구속영장마저 청구되었다(다행히 기각되었지만). 부러진 깃대, 경찰에게 끌려가는 사람들, 죄책감이 들어서 사진은 차마 못 봤다. 내가 잡아가는 것도 아닌데 왜 죄책감이 들었을까? 아무튼 힘들었다. 남자친구는 전교조의 무책임한 대응에 항의하며 주말을 다 보냈다. 외롭고 힘든 싸움인 것을 알면서도 도와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전교조가 학생인권법 반대 성명을 냈을 때 이미 불같이 화를 내며 대화방을 다 나가버려서 따질 데가 없었고... 아니 사실 그냥 ㅈㄴ 힘들기 때문이었다... 교육청 앞에서 찬바람 맞으며 구호 외치는 남자친구보다 포근한 침대에 누워있는 내가 더 힘들었음... 미안했다. 내가 전교조 집행부도 아닌데 왜 미안했을까? 아무튼 미안했다.

그러니까 여기 삼중의 어려움이 있다. 한쪽에서는 민주진보 진영 단일후보였던 정근식 교육감이 시민들을 잡아가고 전교조는 이 부정의를 외면하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내 혈액이 물레방아 하나도 돌리지 못할 힘으로 졸졸졸... 흐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한쪽. 내일부터 나는 2학년 1반의 담임이 된다.



초등학교 교사가 된 것은 내게 무척 희귀한 행운이었다. 삶, 노동, 투쟁, 이 셋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라지만,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이 셋이 일치하는 순간이 이따금 찾아온다. 그러니까 아이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칠 때, 색종이와 수채물감을 가지런히 정리할 때, 깔깔 웃으며 운동장을 달릴 때 나는 사유하는 인간이면서 내 일을 잘하는 직업인이고 동시에 참여하는 시민이 된다. 그 순간 나는 그 어떤 가치로도 교환되지 않고 셈해질 수 없다.

2학년 담임이 되었으니 내 주특기인 민주시민교육은 잠시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5학년을 가르칠 때는 리틀록 나인 사건부터 성소수자 해방운동까지 사회운동의 역사를 알려주었다. 4학년을 가르칠 때는 툰베리와 유사프자이 그리고 이호진 군까지 어린이 사회운동가들을 소개해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림책을 읽어주고 구구단을 외우고 손을 잡아줘야 한다(마지막은 내 희망사항이다. 사실 아이들 손이 잡고 싶어서 저학년으로 왔다). 그럼 나는 덜 참여하는 시민이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기력만 좀 회복되면 나도 서울시교육청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러나 기력이 없어 주말에는 집에서 쉬면서 평일에는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는 나도 투쟁하는 시민이다. 기만도 아니고 타협도 아니고 정말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음의 어려움이지만.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 없어 빙고)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 사실 2학년이 얼마나 아기인지 잘 짐작이 안 된다. 2년 전 잠시 1학년 담임을 맡을 때 10초에 한 번씩 '하 너무 귀여워... 근데 너무 골때려...!' 라고 생각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그래... 잔뜩 귀여워해주마! 웃다가 숨 넘어갈 때까지 놀아주마! 그리고 구구단도 마스터시켜주마! 딱 기다려!!! (안전벨트 매는 것 잊지 말고)

그리고 혹시나 이 글이 검색으로 걸린다면. 정근식 서울시교육감. 그리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부끄러운 줄 아세요.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투쟁!

그냥 사진이 한장쯤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넣은 뜨개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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