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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도끼, 얼굴 본문
운전을 할 때마다, 특히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낼 때마다 조금 위험한 상상을 한다. 내가 지금 핸들을 확 꺾는다면 이 차는 아마 저 트럭을 들이받고 가드레일 쪽으로 밀려날 것이다. 트럭을 뒤따라오던 차들도 급브레이크를 밟다가 자기들끼리 몇 중으로 추돌할 것이다. 뼈가 부서지고 내장이 찢어지겠지. 죽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어느새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죽기도 죽이기도 싫으니까.
그리고 뉴턴에 대해 생각한다. 고전물리학의 이런저런 방정식들... 중학교 때 열심히 배웠는데 다 잊어버렸다. 아무튼 질량과 힘과 속도 같은 것을 방정식에 넣어 계산하면 물체의 궤적이나 에너지 같은 걸 구할 수 있다고, 비탈길을 굴러가는 1kg짜리 추 같은 게 나오는 문제를 풀며 배웠던 것 같다.
내가 핸들을 확 꺾는 데 필요한 힘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방금 검색해봤는데 100g짜리 물건을 드는 힘이 1뉴턴이라고 하니 3뉴턴이나 4뉴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 이 차의 질량과 속도와 질량가속도 같은 것을 더하고 곱하는 방정식을 거치면 짠. 대형사고가 탄생하는 것이다. 최소 1명(나)부터 십수 명까지 죽일 수 있는. 몇 뉴턴만 더 추가해서 엑셀까지 밟는다면 사고는 더 커질 것이다.
운전을 시작한 지 몇 달이 되었는데 내겐 아직도 이것이 몹시 이상하게 느껴진다. 행위에 비해 결과가 너무 크지 않은가. 엑셀을 밟고 핸들을 꺾는 것은 그저 손발을 조금 까딱하는 행위인데 어떻게 이렇게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운전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손발을 잘못 휘둘러서 만들 수 있는 피해는 물컵을 깬다든지 책장 모서리에 발가락을 찧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는 알지도 못하는 여러 명의 목숨을 어깨에 짊어지고 운전을 한다. 자동차란 일종의 바퀴 달린 윤리학 실험실인 것이다.
책에서 그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칼과 창을 사용하던 시절에 적을 죽이기 위해서는 적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팔을 휘둘러야 했다고. 활과 화살이 발명되면서 그 거리는 적이 저 멀리 조그맣게 보일 정도로 멀어진다. 포탄과 총이 발명되며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적을 죽이는 데 드는 힘도 점점 줄어든다. 미사일과 핵폭탄의 시대인 지금은 아예 적이 누구인지 알 필요도 없다. 버튼 하나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적을 간단히 몰살할 수 있다.
행위의 크기와 그에 따라오는 결과의 크기가 비례하던 시절은 원시 시대에 이미 끝난 지 오래인데, 인류는 아직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정식은 너무 복잡하고 어려우니까. 행위가 작았으니 결과도 그에 맞게 축소하는 편을 택한다. 오늘날 전쟁으로 죽는 수백만의 목숨값은 먼 옛날 도끼에 두개골이 부서져 죽은 어떤 부족의 전사 한 명보다 값싸다. 좀 덜 잔인한 예를 들자면 예전에는 닭 한 마리를 먹으려면 닭을 먹이고 돌보고 죽이고 손질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지금은 마트에서 닭볶음탕용으로 손질된 닭을 살 수 있다. 닭의 목숨값, 더 나아가면 축산업자들의 노동의 값은 신용카드 한 장의 무게가 되었다. 방금 검색해보니 5g이라고 한다. 0.05뉴턴.
넷플릭스 시트콤 <굿 플레이스the good place>에서 모든 사람은 죽으면 생전의 행적에 따라 '굿 플레이스'와 '배드 플레이스' 중 한 곳으로 향하는데, 일정 시점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든 전부 배드 플레이스에 간 것으로 밝혀졌다. 세상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별 의미 없는 단순한 행동들이 어김없이 비윤리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녁으로 닭볶음탕을 해 먹은 것으로 공장식 축산을 옹호하고 기후위기에 일조하게 된 것처럼. 그치만 맛있게 잘 끓였는데...
원시 시대는 끝났고, 이제 행위의 결과를 계산하는 방정식은 뉴턴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길고 복잡해졌다. 걷거나 말을 타거나 끽해야 마차 정도 타고 다녔을 시대의 철학자들은 운전자의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다. 사실 생각해보면 트롤리 문제 역시, 누군가 레버를 한 번 당기는 것으로 한 명을 죽일지 다섯 명을 죽일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 사람에게 레버 대신 도끼를 쥐어주고 무슨 일이 생길지 한번 보자고... (나 왜 이렇게 도끼에 집착하지? 죄송합니다)
읽을 수 없는 방정식은 차라리 주문이나 기도와 비슷하다. 지금 우리는 알지도 못한 채 거대한 파괴를 불러오는 천진하고 잔인한 신인 동시에 몇 뉴턴의 힘에도 날아가는 값싼 목숨이다. 매 순간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고통을 주고받고 또 책임을 떠넘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굿 플레이스>에는 굿 플레이스에 가기 위해 철저하게 자연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며 어떤 악행도 하지 않으려 애쓰는 남자가 등장하는데(달팽이 한 마리를 실수로 밟아 죽이고는 장례식을 치러 준다) 그도 결국 배드 플레이스행으로 판명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무한책임'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무한한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은 '나'에게 '타인의 얼굴'의 형식으로 부여된다.
절대적으로 이타적인 것, 타인 자, 표상 불능인 것, 파악 불능인 것, 즉 '무한' -그것에 대해 나는 무관심으로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나를,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나타나는 표상형식을 찢어놓으면서 소환한다. 그리고 타자의 얼굴을 통해, 어떤 달아날 구멍도 허용하지 않고 나를 유일무이한 선택받은 자로 지명하는 것이다. <이념으로 오는 신>
그렇지만 이 비가시적 모욕이 타인의 얼굴을 통해서 나를 응시하고 고발할 때, 그것은 심판 그 자체로서 생기한다. (...) 그러한 책임들에 대해서는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책임들로부터 누구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전체성과 무한>
도끼를 든 원시인은 적의 죽음이 자기의 책임임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가까이에서 적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기 때문에. 타인의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타인은 우리에게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이 된다. 연인에게 카카오톡으로 이별을 통보하는 것이 무책임하다고 욕을 먹는 이유도 그러하고, 치킨은 맛있게 먹는 사람에게 닭 모가지를 비틀라고 하면 못하는 이유도 그러하다. 도로를 달리는 트럭 뒤에는 눈알 스티커가 붙어 있다. 뒤에 오는 운전자에게 정신 차리고 앞을 똑바로 보라고 말하기 위해서. 당신에게는 안전하게 운전할 책임이 있다고. 눈은, 얼굴은 그런 말을 한다.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이 여기까지 오는 데 애쓴/착취당한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건물의 현판에 돈 많은 건물주가 아니라 직접 건물을 쌓아올린 노동자들의 얼굴을 새길 수 있다면. 말로든 힘으로든 아니면 자본으로든,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야 한다면. 챗봇이니 메타버스니 하는 것은 접어두고, 우리가 서로에게 오직 얼굴로써 현상할 수 있다면. 이름을 불러주고 꽃이 될 필요조차 없다. 얼굴을 마주본 순간 이미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이다.
얼굴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아직 운전이 서툴러서 실수하는 바람에 다른 운전자들에게 경적을 들었을 때, 급하게 깜빡이를 누르면서 나는 이들과 얼굴을 마주 보며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핸들을 꽉 잡고 시내 운전을 하며 잔인한 상상을 지우려 애쓸 때도, 내가 만약 이 거리를 보행자로서 걸어간다면 다른 보행자들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럼 이들을 죽일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물리 방정식이 아무리 길어도 내가 걷기를 선택한다면 방법이 있을 거라고.
우리 서로 얼굴을 많이 봅시다. 얼굴 보고 인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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