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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쓰는 연습

230311 봄 오는 소리

slowglow01 2023. 3. 11. 22:07

2020년 (아마) 여름에 기숙사 내 방 책상에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기"라고 써서 붙여놓았던 적이 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웬만한 일에서는 나를 그냥 봐주면서 살고 있다.
마음의 힘에도 용량(?) 같은 것이 있고 나는 그 용량이 남들보다 몹시 부족한 편인데 자책은 용량을 꽤 많이 차지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 공부를 손에서 아예 놓은지 한 달 정도 되었는데 나는 나를 전혀 탓하지도 재촉하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은 마음의 힘이 부족할 뿐이고
채근하지 않아도 언젠가 다시 공부가 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때 하면 된다.
이대로 영영 공부를 멈춰서 그동안 익혔던 걸 다 잊어버리게 되더라도 괜찮다. 공부하는 순간에는 즐거웠으니까.

2020년 이래 내 최대의 관심사는 언제나 나 자신의 정신건강이고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즘은 꽤 건강한 정신으로 지내고 있다.
대충 십대 초반 이후로 지금 가장 정신이 건강한 듯함

이대로 살다간 언젠가
명상. 이너피스. 내면의 힘. 영혼(?)의 자유로움(?) 같은 소리를 달고 살며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다니는 수상할 정도로 평온한 얼굴의 중년이 되거나 (이미 요가를 시작했으니 발을 들인 거나 마찬가지)
프로필사진을 직접 찍은 야생화 사진으로 해놓고 "오늘도 웃자~*^^* 긍정의힘!!" 같은 멘트를 일삼는 등산복 차림의 중년이 되거나 (역시 이미 등산에 조금 관심이 가기 시작했으며 ~^^ 없이는 메신저를 못 쓰고 있다)
그것도 아니면 연하의 인간들에게 서슴없이 "딸~" "아들~"이라고 부르고 남편을 신랑이라고 부르며 퀼트공예를 하고 허브차를 마시는 중년이 되거나 (이미 뜨개질이 취미이며 허브차도 좋아한다)
아무튼 그 셋 사이의 무언가가 될 것만 같다.

언제나 아주 성격 더러운 할머니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런 내 눈 앞에 새로운 미래로 펼쳐진 중년의 스테레오타입들이 제법 싫지 않다.

사실 젊음을 건너뛰고 싶다는 생각을 옛날부터 자주 했다.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마흔 살이 되어 있으면 안 되나?
나이를 먹는다고 사는 게 쉬워지지는 않겠지만.

가끔은 삶 전체를 건너뛰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랑은 많이 다른데
존재하는 것이 고단하여 불교적 용어로 열반? 해탈?을 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가깝다.
(불교 잘 모름)
(그치만 관심은 있음)


광대나물 꽃. 방금 검색해서 알아낸 이름.

나는 봄에 태어났고
봄을 가장 좋아한다.
매년 찾아와도 매년 어여쁘고 반가운 손님
사방이 초록으로 바뀌고
색깔들이 태어나기 시작하는데 불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어제는 점심시간에 흔들의자에 누워 봄바람을 맞았다.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꽤 오래 달렸다.
봄까치꽃, 민들레, 광대나물꽃, 매화, 산수유, 연두색 버드나무
니체는 생성하는 것, 변화하는 것, 가볍고 명랑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니체... 그렇게 안 생겨서는 봄의 철학자인 것이다.

"모든 좋은 것은 본능이고 - 따라서 경쾌하고 필연적이며 자유롭다." (우상의 황혼)
자전거를 타면서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과도 자전거를 함께 타고 싶어졌다.
학교 밖 나들이를 가려면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겠지만...

이번 주는 즐거웠지만 그만큼 지독하게 피곤했고
개인적인 이유로 많이 힘들어서 울기도 했다.
그래도 좋다. 난 이제 너그러우니까
좀 체력이 딸려도 성격 좋은 할머니가 되고 싶으니까
내일은 자전거 나들이 계획서를 쓰자.
봄을 맞으러 나가자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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