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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돼지의 행성 본문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한 광고 만화를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된 적이 있다. 아이를 기르는 여성 작가가 그린 만화였는데 "아기를 낳으면 나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걸 전에는 몰랐다. 내 이름을 잊고, 내 시간을 포기하고, 건강을 잃고..." 같은 이야기를 하더니 별안간 "그런 나의 고민을 해결해준 ㅇㅇ영양제!"라며 영양제 광고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광고 만화가 광고를 열심히 하는 건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지만, 아니 누가 봐도 앞뒤가 안 맞잖아요. 엄마가 된 여성이 자기 이름/커리어/건강을 포기하는 이유가 좋은 영양제가 없어서...겠냐? 겠냐고... 작가님 그래서 영양제 드시고 본인 이름 되찾으셨나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분은 그런 만화를 그리면서 작가로서 자기 이름을 찾아가고 있는 중일 테니까.
그런데 요즘은 이 만화에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한다. 육아하는 여성의 건강 문제를 ㅇㅇ영양제가 정말로 해결해준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이 사회가 작동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 소비. 더 많은 소비.
물신주의라는 말로 현대 사회를 설명할 수 있을까? 난 비록 지금은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을 믿는 것이 언제나 즐겁고 편안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은 기억한다. 가끔은 귀찮고 가끔은 유혹이나 회의가 찾아오기도 했다. 신은 신도들에게 교리, 헌금, 시간 등을 요구했다. 중세 시대에는 서슬퍼런 종교재판과 목이 잘린 신성모독자들 그리고 마녀들이 있었다. 현대 사회에서 소비의 위상에는 그러한 불편, 강제, 반역자들이 없다. 소비는 언제나 아름답고 편안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소비가 아름답고 편안하다는 인식조차 없다. 숨쉬는 매 순간마다 산소가 달콤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처럼. 소비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 되었고 소비의 바깥이란 없다.
그러니 저 만화는 정확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자기 생을 잃어버리고 건강이 망가졌다면 영양제를 사먹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영양제 회사는 작가에게 돈을 주고 그 만화의 독자들은 영양제 회사에게 돈을 준다. 육아하는 여성의 사회적 고립을 방지하고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이 있지만 그들을 돕고 후원하는 건 아름답지도 재미있지도 않기 때문에 애초에 시야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 외에도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소비가 해결해준다. 아픔 불편함 심심함 외로움 억울함 모두. 어떤 공간에 가거나 어떤 서비스와 물건을 사면 해결된다.(고들 한다. 진짜요? 작가님, 영양제 사먹고 나 자신을 찾으셨어요?) 이렇게 소비만 하면서 살다 보면 이따금 허전하고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데(마르크스는 이것을 소외라고 불렀다) 그런 느낌도 "힐링" 도서나 제품들이 다 해결해준다.
의류 쓰레기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이후로 내 눈에는 세상 모든 옷이 예비 쓰레기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마네킹이 걸친 옷들 대부분이 5년도 가기 전에 쓰레기통으로 버려질테니 틀린 말도 아니다. 잠깐 충격받고 말 줄 알았는데 점차 세상 모든 물건들이 곧-쓰레기라는 사실만이 명백해졌다. 과격한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이젠 대형마트나 백화점 같은 곳에 가면 과도한 풍요가 역하다는 느낌이 든다. 거리마다 상점마다 산더미처럼 쓰레기가 쌓여 있고 사람들은 미친 듯이 쓰레기를 사들였다가 버리고 또 새로운 쓰레기를 사들였다가 버리고 숲을 없애고 바다를 메우고 과학자들은 이 미친놈들아 너네 여분으로 지구 하나씩 더 갖고 있냐?? 라고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쓰레기를 만들고 버리고 만들고 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은 소비의 축복으로 가득 넘친다. (정말? 작가님, 이름 찾으셨어요?)
기업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두 가지 감각을 이용하는데 하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매끄러움'의 감각이다. 더 많은 물건을 팔기 위해 기업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광고는 그 일부일 뿐이다) 사람들에게 당신은 지금 결핍되었다는, 불편하고 부족한 상태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너는 너무 뚱뚱해. 그 나이에 그런 가방 메고 다니면 창피해. 네 친구들은 너만 빼고 다 여기 놀러가서 사진 찍었더라. 자기계발 안 하면 뒤처져. 그 물건 아직도 쓰고 있다고? 요즘은 이거 모르면 대화에 낄 수 없대. 피곤하다고? 건강관리도 능력이야. 너 그 동네에서 평생 살 거야? 쉬는 것도 제대로 잘 쉬어야지. 다들 잘 적응했는데 너만 힘들어하는거야... 부족해 부족해 부족해... 사람 많은 번화가나, 아니면 인터넷 아무 커뮤니티에 들어가 있으면 한 시간 안에 이 모든 메시지를 (은근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다 들을 수 있다. 기업은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야금야금 깎아서 물건을 팔고, 물건으로 (당연히) 채워지지 않은 마음은 "당신은 있는 그대로 소중한 사람입니다" 뭐 이런 힐링 강연을 팔아서 달래준다. 전에도 한번 쓴 적이 있는데 어떤 손이 자기를 토닥토닥해주는 것 같다면 잘 생각해봐라 바로 그 손이 오 분 전에 당신 명치를 세게 때렸으니까. '보이지 않는 손',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소비지상주의, 뭐라고 부르든 바로 그 손.
아무튼 그렇게 충분하지 않게 된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결핍을 해소하려고 하는데(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작동하는 감각이 바로 매끄러움이다. 매끄러움에 대해서는 여러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바 있고 나는 한병철의 책에서 그것을 처음 접했는데, 지금은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이 도시에 대해 쓴 책 <짓기와 거주하기>에서 문장을 빌리려고 한다. 저자는 매끄러움(마찰 없음)을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측면에서 설명하는데 다른 모든 분야에도 해당한다.
빌 게이츠는 "마찰 없음fraction-free"이라는 용어로 사용자 친화적 기술을 설명한다. (...) 그것은 대중화한 취향의 출현이며, 이 경우에는 사람들이 테크놀로지를 소비하고 싶어하는 기준, 즉 쉽게 구할 수 있고 모두가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 대체로 사용자가 '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을 때, 마찰 없음이 사용자 친화적인 것이 된다. (...) 테크놀로지의 특정한 경험이 지속적이고 질문을 던지는 종류의 인지를 불능으로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마찰 없는 컴퓨터 문화는 신체적 자극을, 특정한 억제 상태에서 받는 불편한 자극을 줄이는 마약 같은 것일 수 있다.
소비는 매끄럽다-소비는 쉽고, 편안하고, 쾌적하다. 내 취향에 맞는 콘텐츠만 쏙쏙 골라 보여주는 알고리즘이 매끄러움의 가장 쉬운 예시고, 카카오 계정 하나만 있으면 은행업무부터 미용실 예약까지 다 되는 것도 매끄럽다. 매끄러운 세상에서는 내가 잘 알고 있고 편안한 영역에서 한 발짝도 나갈 필요가 없다. 소비의 시대에는 예술도 매끄럽다. 얼마 전 가족여행에서 아르떼뮤지엄이라는 곳에 갔는데 거대한 흰 벽에 보티첼리, 르누아르, 모네의 그림이 빔프로젝터로 영사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림을 배경으로 즐겁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물론 즐거웠다. 누구도 울거나 충격 받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한때는 예술이 그런 것이었다고 하지만 이젠 예쁜 포토존 역할로 충분한 것이다.
소비와 매끄러움의 결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1970년에 쓴 책 <소비의 사회>에서 이미 이렇게 말한다.
노동, 여가, 자연, 문화 등 예전에는 우리의 '무정부적이고 고풍스러운' 도시에서의 현실생활 속에 분산되고 또 고민과 복잡함을 만들어낸 이 모든 것, 서로 분열되었으며 조금이라도 서로에게로 환원될 수 없는 이 모든 활동들이 끝없는 쇼핑의 이동촬영필름의 한 장면 속에 혼합되고 조정되며 균질화되어, 양성적인 유행의 분위기 속에서 결국 수성화가 되어버렸다! 모든 것이 소화되어 균질한 똥이 되었다.
철학자가 똥 얘기 하는 것도 물론 웃기지만, 요점은 그 앞에 있는 '균질하다'는 말에 있다. 매끄럽다는 것, 마찰이 없다는 것은 즉 불편한 것/이질적인 것의 추방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익숙하거나, 아니면 딱 기분 상하지 않을 만큼만 새롭다. 내 계정으로 유튜브에 로그인하면 차분한 음악 플레이리스트, 케이팝 아이돌 무대 영상, 철학 강연 영상들이 추천되는데 왜냐하면 내가 그런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매끄러운 세상이란 타자 없이 오직 나만이 끝없이 반사되는 거울을 보고 있는 것과 같다. 낯선 것과의 만남, "왜?"라는 질문, '고민과 복잡함을 만들어낸 이 모든 것'은 제거된다. 요약하면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물건이나 사라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소비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가상의 결핍을 강요하고, 매끄러움을 통해 우리가 생각할 기회를 빼앗는다. 배부른 돼지(행복)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지혜)가 낫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배고픈 돼지인 것이다...... 좀 거칠게 말하면 우리는 멍청하고 불행해져서 쓰레기더미에 파묻힌 채로 우리가 사는 지구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 바로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지금까지 4500자를 썼다. 그래 우린 지금 다 불행한 바보가 되어서, 여성의 가정 내 불평등을 영양제가 해결해준다거나 운동복 쇼핑몰에서 휴식과 회복도 같이 판다는 헛소리를 믿고 있는 거라고.
이렇게 말하는 나도 물론 매일 장을 보고 가끔 새 옷을 사고 친구들과 예쁜 곳에 가면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올리곤 한다. 좋은 물건을 사면 기분이 좋고, 특히 책을 사고 싶은 욕구를 참는 게 힘들다.(사놓고 안 읽는 거 나도 알아. 도서관에 같은 책이 있다는 것도 알아. 그치만 택배상자를 열고 종이 냄새가 나는 새 책을 꺼내고 싶다고) 그러나 소비가 인간의 유일한 존재 방식이라는 생각만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싶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많은 물건과 경험이 필요하지 않다. 가짜 욕망, 가짜 결핍, 가짜 매끄러움 바깥에도 생은 존재한다. 자본이 필사적으로 밀어내고 지우려 하는 생의 다른 방식들. 별로 편안하지도 쾌적하지도 않은, 진짜 용기와 고민이 필요한 일들. 모험, 연대, 사랑.
빌 게이츠는 마찰 없는 기술을 추구한다고 했지만, 바이올린 소리가 그러하듯이 생의 모든 아름다운 장면은 마찰에서 시작된다. 타자와의, 자연과의, 그리고 사실은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던 나 자신과의 마찰-만남. 마찰이 빚는 세상, 공기처럼 익숙한 소비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는 궁금하다. 지난 이십몇 년 간 나 자신만을 가엾이 여기고 사랑하고 또 미워하며 지내왔는데(그게 자본이 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는 세상을 사랑하고 싶어졌다. 쓰레기더미로 가득한 이 세상을... 나는 제니 오델의 책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법>에서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는데, 혹시 이 책이 궁금하다면.... 댓글을 남기면.... 제가 사줄게요... 농담 아님.... 저랑 아는 사이 아니어도 됨..... 갑자기 책 광고가 된 것 같긴 한데 어차피 계획 같은 거 없이 쭉 써내려가는 중이었고 의도치 않게 처음의 인스타툰과 수미상관을 이루게 된 것 같아 마음에 든다.ㅋㅋㅋ
아무튼.
엉망진창으로 썼지만.
자본주의 척결하자 단결 투쟁.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이제 잘게요. 사랑 가득한 하루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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