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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수업일기

미술수업 불평

slowglow01 2021. 5. 16. 01:12

발령받기 전, 미술수업에 대한 책을 한 권 샀다. 꽤 유명한 책이었고, 미술시간에 활용할 수 있는 여러 활동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유용하겠다고 생각했다. 캐치프레이즈도 명쾌했다. 미술이 두려운 교사를 위한 쉽고 재미있는 미술수업! 그때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무척 꺼림직하다. 미술수업은 쉽고 재미있는 것이어야 할까? 왜?

절대 망하지 않는 수업
이 책이 불편한 이유. 이 책에 나오는 활동들은 대부분, 잘 따라하기만 한다면 모두가 반드시 아름다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일단 많은 활동이 도안을 사용한다. 도안을 잘 자르고 칠하고 붙이면 작품이 완성된다. 도안이 없는 활동이라도 대부분 처음부터 끝까지 무척 명확한 표현 방법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 가면 큰 문제 없이 멋진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 (여기서 표현 방법이란 "모노타이프 판화는 물감이 마르기 전에 찍으세요"와 같은 표현 기법이 아니라 "여기에 동그라미를 그리세요"와 같은 구체적인 설명을 말한다.)
비단 이 책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유튜브나 sns에 올라온 미술수업들을 보면서, 나는 이런(도안을 사용하거나 명확한 틀을 제공하여 일정한 결과물을 만드는) 미술수업이 보편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꽤 널리 퍼진 경향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인디스쿨 같은 교사 커뮤니티는 들어가본 적이 없지만 이런 미술수업 자료가 많이 공유되고 있을 거라는 짐작은 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에 전시되는 교실 뒤편 게시판은 하나같이 무척 아름다운데, 예술특기생 학급 같은 것이 아닌 이상 한 반의 모든 학생이 그림을 그렇게 아름답게 그릴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레디메이드 미술수업(그냥 내가 붙인 이름이다)'에도 장점이 있다. 첫째,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여 학생들이 꼭 필요한 것에 집중하도록 해준다. 예를 들어 나는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으로 그리기 수업(https://slowglow01.tistory.com/37)을 할 때 나그네 부분은 내가 그려서 나눠주었는데, 한색과 난색의 대비를 느끼고 표현하는 데 '나그네 그리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서 아이들이 '이것은 어떻게 표현할까?'라고 고민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학습목표를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된다.

내가 그린 나그네 새삼 귀엽네

둘째, 미술에 대한 자신감을 북돋아줄 수 있다. 레디메이드 미술수업은 작품이 '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줄 수 있고, 결과물에 있어서도 소위 잘 그리는 아이와 못 그리는 아이 사이의 편차가 비교적 덜 드러나게 한다. 학업 자신감이 없는 학생에게는 쉬운 문제부터 풀어보게 하는 것처럼, 쉬운 활동으로 자신감과 성취감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고학년에게는 이런 장점이 더 두드러질 거라고 생각한다.

기억은 생각의 잔여물
그러나 나는 레디메이드 미술수업이,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아무 생각 없이 손만 열심히 움직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아름다운 결과물만을 원한다면, 이미 <스티커로 명화 만들기> 같은 책들이 서점에 깔려 있다. 조각 스티커를 뜯어서 알맞은 자리에 붙이기만 하면 고흐, 피카소, 페르메이르가 될 수 있다. 쉽고 재미있지만 미술적으로 큰 의미는 없다. 예술교육은 분명 공작 활동을 포함하지만 그보다는 넓은 범위를 다뤄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 나는 레디메이드 미술수업이 "아이들의 창의성을 제한하기 때문에 나쁘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1) (다른 교과가 그러하듯이) 미술교과 역시 학생들의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2) 창의성은 학생에게 자유를 제공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발달하지 않는다. 창의력을 기른답시고 흰 종이 한 장을 주고 "무엇이든 자유롭게 그리렴"이라고 말한다면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하다가 그냥 평소에 그리던 것을 평소에 그리던 대로 그릴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손만 열심히 움직이는' 셈이다. 창의성 교육이라는 말의 공허함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고 나는 대체로 거기에 공감한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학습목표 달성에 관한 것이다.
인지과학자 대니얼 윌링햄은 <왜 학생들은 학교를 좋아하지 않을까?>에서 "기억은 생각의 잔여물이다"라고 주장한다. 학생들은 교사가 의도하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수업 중에 실제로 생각하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는 뜻이다. (임고생 시절에는 이것을 메타-인지 이동이라고 외웠다.) 즉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로 그것에 대해 학생들이 많이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미술수업에서 그것은 10색상환일 수도 있고, 물의 양을 달리하여 먹의 농담을 조절하는 방법일 수도 있고, 니키 드 생팔의 <나나>가 아름다운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레디메이드 미술수업에서는 학생들이 '반듯하게 오려야지'나 '쌤 다 칠했어요. 다음에 뭐 해요?' 이상의 생각을 하도록 이끌기 어렵다. 의도한 학습목표가 무엇이었든 달성할 확률이 낮은 것이다.
사실 레디메이드 미술수업에 학습목표가 있는지도 나는 조금 의심스럽다. 유튜브에 올라온 이러한 수업 영상들이 대부분 'OOO 그리기/만들기 수업'라는 제목을 달고 올라온 것이 그 이유다. 'OOO 그리기/만들기 수업'에서의 OOO이 '풍경화, 고무판화, 명암을 표현한 정물화'라면 이 수업에는 학습목표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레디메이드 미술수업에서 OOO은 대부분 구체적인 결과물(예: 크리스마스 입체카드)의 이름이다. 크리스마스 입체카드를 만드는 것도 분명 어떤 의미에서 유의미한 활동일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카드를 만드는 동안 대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학생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잔여물이 남는가?

미술은 원래 재밌다
레디메이드 미술수업에서는 모두가 비슷하게 성공한다는 점 역시 비판의 여지가 있다. 수학에 비유하자면, 아무리 나눗셈을 어려워하는 아이라도 열 문제 중 다섯 문제를 교사와 함께 풀었으면 다섯 문제는 혼자 풀어보게 해야 한다. 그 다섯 문제를 다 틀렸다면? 왜 틀렸는지 생각해보고, 개념 이해가 부족하다면 설명해주고, 다시 풀어보게 한다. 그런데 레디메이드 미술수업은 자꾸 열 문제 모두 동그라미만 쳐 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을 '망하면' 왜 안 되는가? 학생은 망하는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 꼭 쉽고 재미있는 미술수업만 좋은 걸까? 좀 어려우면 안 되나? 좀 지루한 것은 미술 시간에 배울 필요가 없나? 사실 이런 생각을 하면 조금 속상해진다. 곱셈 문제는 어려워도 어쩔 수 없다. 받아쓰기는 재미가 없어도 꼭 해야 한다. 그런데 음미체는 왜 항상 쉽고 재미있어야 하는가? 예체능은 본질적으로 재미있기 때문에 굳이 흥미 위주로만 활동하지 않아도 주지교과보다 훨씬 재미있다.
요즘 나는 디자인을 주제로 미술수업을 하는 중이다. 나는 당연히 아이들이 이 수업을 재미있어하기를, 그리고 멋진 디자인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를 원한다(나도 게시판 좀 예쁘게 꾸며 보자). 하지만 그것보다 아이들이 디자인의 의미와 조건을 이해하고, 좋은 디자인을 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재미를 찾기를 바란다. 그래서 15년 뒤 올해의 젊은 디자이너 상을 받으면서 수상소감으로 내 이름을 언급...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상금 20만 달러를 전부 선생님께...

여기 있는 신발의 가격을 합치면 대충 한국의 한 해 예산 정도 규모다. 하지만 선생님한테는 공짜로 준다고 했어. 나는 이제 부자다.


이 글은 마치 비판처럼 쓰였지만 사실 통렬한 반성문에 가깝다. 내가 어쩌다 저런 책도 읽고 저런 유튜브 영상들도 보게 되었겠는가. 다 내가 미술수업을 썩 잘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교과의 수업이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수업과 성공적인 수업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학습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어떤 발문이 효과적인가? 피드백은 언제, 얼마나 하는 것이 좋은가? 항상 고민만 한가득이고 실천은 종종걸음이다. 가르치고자 하는 바로 그것에 대해 학생들이 많이 생각하도록 해라...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윌링햄 선생님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줘...
레디메이드 미술수업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쓰지 못한 것도 안타깝다. 나는 아주 명확한 모델(들)을 떠올리며 이 글을 썼지만, 혹시나 검색에 걸려 그 모델에게 욕먹고 싶지는 않았기에 언급하지는 않았다. 읽으면서 '대체 뭔 소리야' 싶었다면 용기 없는 나의 잘못이다. 하지만 누가 여기까지 읽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