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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수업일기

3학년 1학기 국어 - 시인과의 만남

slowglow01 2021. 7. 3. 20:32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시가 등장하는 것은 1단원 '재미가 톡톡톡'에서 처음. 그 뒤로 아직까지 시를 다시 보지 못했다. 분명 나는 초등학생 때 시를 엄청 읽었던 것 같은데 그동안 교육과정이 바뀐 건지 아니면 내가 재미없는 건 다 까먹은 건지... 아무튼 대신 학급문고에 시집을 몇 권 꽂아두고, 재미있는 시를 찾아 아침시간에 종종 읽기 활동을 했지만 반응은 언제나 그냥저냥이었다. (박성우 <삼행시의 달인>이 그나마 조금 인기가 있었다) 그렇다고 담임이 시 교육에 특별히 열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그동안 시는 교실 한 구석의 화분처럼 큰 존재감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동시 작가님이 우리 반으로 찾아오기 전까지는.


작가님이 우리 반에 오시게 된 과정에는 내 개인사가 너무 많이 들어 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게는 과분한 여러 분들의 선의와 도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순전히 내 잘못으로)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시집은 수요일 저녁에야 도착했고 작가님은 월요일에 오실 예정이었다. 이틀만에 책 한 권을 어떻게 읽지? 심지어 1인 1권을 주문한 것도 아닌데!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시집을 한 장 한 장 복사해서 교실 벽에 빙 둘러 붙여 놓는 것이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내친김에 '시 전시회'라고 이름도 붙였다. 아침 시간에 교실을 둘러보라고 했더니 슬렁슬렁 몇 바퀴 돌고는 소란해지길래 퀴즈를 냈다.
"'사실 난, 문방구 수호신이야'로 시작하는 시의 제목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를 찾아 교실을 우르르 달려다닌다. 순식간에 답을 찾더니 다시 우르르 뛰어와서는 "한 문제 더!!"를 외쳤다. 그렇게 우당탕탕 빙글빙글 즐거운 아침 시간을 보내긴 했는데 이걸 시를 읽었다고 할 수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사실 내가 하는 활동의 상당수가 그렇지^^...

그리고 두 차시 동안 시 감상 시간을 가졌다. 시를 두고 이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화자의 정서는 어떠하며... 이런 얘기를 하면 그나마 부족한 흥미도 우르르 떨어질 것 같아 그냥 포스트잇을 세 장 나눠주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시에 붙이라고 했다.

사전 수업. 학생 시는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의 책 <시 수업을 시작합니다>에서 가져왔다.
아이들이 와하하 웃었던 시. 신민규 시인의 시집도 교실에 한 권 놓아두고 싶다.
나와 마음이 통하는 시를 찾아보세요! 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어떤 시에 공감하고 좋아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즐거웠지만, 동시에 참... 속상했다. 손 잡아 끌고 가며 떠먹여 주는 국어 수업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심각한 문해력의 부족이 드러난 것이다. 예를 들어 <붕어빵>이라는 시는, 할머니와 엄마의 얼굴이 붕어빵이라는 말을 딱히 숨기지도 않고 대놓고 말하고 있음에도, 아이들은 "붕어빵 맛있겠다" 같은 말을 포스트잇에 적어 붙여 놓았다. <겨울방학>이 인기 시 중 하나였던 이유는 단지 제목이 겨울방학이기 때문이었다. '요즘 아이들'이라 어쩔 수 없는 건지, 열 살에게는 원래 당연한 건지, 알 수 없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혀 어려운 시가 아니야 얘들아... 그냥 읽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건데... 

얼마나 잘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시가 재미있고 좋다고 했다. 다음 주에 시인 선생님이 우리 반에 오실 거라고 말하자 몇 번이나 "진짜요? 진짜 오세요??" 물으며, 시인 선생님께 물어볼 질문을 정성들여 적었다. "시를 많이 쓰면 안 힘드신가요?", "시를 '어떡해' 잘 만드시나요?", "앞으로도 시를 계속 쓸 건가요?", 그리고 "시가 참 재미있어요.(그건 질문이 아니잖아)" 등등...

질문이 반, 그냥 자기 감상이 반이다. 선생님이 질문하라고 했잖아...


다음 날에는, 전날 고른 3편의 시를 가지고 두 차시 동안 '나만의 시집 만들기' 활동을 했다. 4절 색지를 책 모양으로 접어 시를 옮겨 적고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는 활동이었다. 제목부터 매력적인 <겨울방학>과 소파 밑에 숨겨둔 성적표를 들켜 딱밤을 맞는다는 내용의 <일요일 낮 12시>는 (특히 남학생들의) 많은 선택을 받았었는데, 하필 두 시 모두 길이가 상당해서 교실 곳곳에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울려퍼지기도 했다.

3분만에 야매로 만든 예시 작품. 요즘은 예시 작품 만들 때 색칠도 잘 안 한다. 군기가 빠진 거지...ㅋㅋㅋ

시집에서는 두 편만 옮겨 적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내가 직접 만든 시를 실어도 된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그편을 더 좋아했다. 덕분에 아이들이 지은 사랑스런 시를 실컷 보았는데 공유를 못 하는 것이 아쉽다. 언젠가 우리 반 학생 중 한 명이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그때 그의 유년기 작품을 공개하겠다.


그리고 대망의 월요일. 작가님이 우리 반에 오셨다. 작가님은 너무나!! 친절하고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해 주셨고, 우리 반 아이들은 너무나... 평소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에 내려가서 깡소주를 마시는 기분으로 믹스커피를 타 마셨다. 얘들아, 귀한 손님인데... 위선! 가식! 그런 거 모르니...? 하지만 이건 그냥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담임의 욕심이고, 아이들은 자기들 나름의 방식으로 정말 재미있어했고 좋은 공부가 되었을 거라고 믿는다. 작가님께서는 아이들이 만든 시집에 하나하나 사인을 해주시고, 내게도 격려와 칭찬을 잔뜩 해주시고 가셨다. 작가님, 그때 경황이 없어 인사를 제대로 못 드렸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들에게도 제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에요.

부끄럽지만 나 역시 시를 즐겨 읽는 사람은 아니다. 교사가 시를 사랑하지 않으니 아이들에게 시를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도 어려울지 모른다. 부족한 담임의 지도 대신 꽃처럼 새처럼 고운 말로 시를 짓고 다듬는 시인 선생님과의 한 시간이 아이들 마음에 스며들었기를, 그리하여 먼 훗날 언젠가 이날을 기억하며(또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웃으며 시집 한 권을 집어들기를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