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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교단일기

교사관 잡담

slowglow01 2021. 9. 26. 19:50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아직까지도 잊을 만하면 지역신문 사회면에 등장하는, 문제가 많은 학교였다. 평준화가 되기 전에는 주로 학생들이 문제를 일으켰고, 평준화된 후-내가 입학하던 무렵-에는 교사들이 문제가 되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2010년대 중반은 이미 학생인권이 보편적 의제로 자리 잡았을 때였지만, 나와 친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발바닥을 맞고 성희롱과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학교를 다녔다. 그때의 경험은 내 교육관에 생생한 흔적을 남겨, 대학 1학년 교육심리학 강의 시간에 나는 혼자 단호한 목소리로 "교사는 서비스 제공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가 질문 세례를 받은 일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강의실을 메운 학생들은 전부 스무 살이었고 저마다 교직에 대한 연둣빛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반박에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물론 좋은 교사들도 있겠죠. 좋은 교사들은 제가 뭐라고 하든 어차피 알아서 잘할 것입니다. 하지만 교사들 중에는 정말 이상한 인간들도 있고, 그들은 자기가 서비스 제공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서비스업 종사자도 자기 고객에게 그딴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으니까요.

대학에서의 4년은 그때 혼자 잔뜩 세우고 있던 가시를 조금씩 누그러뜨리는 과정이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점차 나의 불행했던 학교생활이 별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고, 점차 나도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피어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을 받을 때쯤에는 서비스 어쩌구 하는 생각은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2021년, 지금은 일요일 오후고 여기는 우리 반 교실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수업 준비를 위해 휴일을 자진 반납하고 나왔다. 당연하지만 학교는 텅 비었고 창밖에서는 청소년들이 축구를 하면서 쩌렁쩌렁하게 웃고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흔히들 교직관에는 성직관-전문직관-노동직관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하고, 그중 나는 전문직관과 노동직관 사이 어디쯤에 있다고 줄곧 믿어왔지만,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변명할 여지도 없이 성직관 교사의 전형이다. 사랑과 죄책감을 두 바퀴 삼아 굴러간다는 점에서 사실 '엄마직관'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서비스 제공자에서 엄마가 되기까지 딱 4년이 걸린 셈이다. 원래 좀 중간이 없는 성격이기는 하지만.

빈 교실에서 오후 내내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다가, 피곤해져서 잠시 복도로 나와 창틀에 걸터앉았다. 그 자세가 기폭제가 되어 고등학교 3학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비-자율적으로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숱한 밤들 중 하루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답답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무척 불편해했기 때문에, 너무 춥거나 덥지만 않으면 야자 시간을 주로 복도에서 보내곤 했다. 교실 뒤편에 있는 키 큰 책상(잠이 올 때 서서 수업을 듣는 용도였다)을 복도로 끌고 나와서, 다리를 담요로 칭칭 두르고 창틀에 앉아 열 시까지 시간을 때웠다. 엎드려 자다가 소설책을 읽다가 이따금 감독 선생님의 눈치가 보이면 공부하는 척을 했다. 그러다 하루는 문득, 아무 생각도 없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그때 느낀 기묘한 기분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대부분의 학교가 그렇듯이 복도는 일자로 쭉 뻗어 있었고, 나는 그 한쪽 끝에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4층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4층은 적막했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있는데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미적 감각 없이 곧게 뻗은 복도, 줄줄이 배치된 똑같은 교실에 열아홉 살 여자아이들 수십 명이 말없이 책상에 코를 박고 있다. 진짜로 공부를 하고 있든, 졸고 있든, 책상 밑으로 몰래 핸드폰을 만지는 중이든, 모두 같은 자세로, 아무런 소리 없이... 나는 이 고요한 공간에서 사실 얼마나 많은 상념들이 끓고 있을 것인지 생각했고, 그 순간 학교의-교육의 비인간성과 폭력성을 마음 깊이 느꼈다.

지금 내가 일하는 초등학교 건물은 그렇게 무식한 일자 모양으로 생기지 않았고 언제나 시끌벅적한 소리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그때를 떠올린다. 매일 아침-또는 전날 저녁- 칠판에 그날의 시간표를 붙일 때마다, 나는 내가 어린이 열여덟 명의 일과를 마음대로 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작게 전율한다. 내가 교육적 이유로 음악과 수학의 수업 순서를 바꾸거나 교과 통합 수업을 넣는다고 해도 학생들에게는 거부할 권리가 없다. 내가 비교육적 이유로 그렇게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시간표에 변동을 준 날이면 학생들은 쪼르르 달려와 질문을 퍼붓는다. 왜 오늘 사회 안 해요? '추석 축제'가 뭐예요? 오늘 미술 시간에 뭐 해요? 학생들은 자신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게 될 것인지 내가 알려주지 않으면 모른다. 안다고 해도 바꿀 수 없다.

권력은 내 쪽에 있다. 나는 학급의 일을 결정하고, 학생들에게 지시를 내리며(지시에 잘 따르는지 여부는 둘째치고), 학생들의 행동을 칭찬하거나 통제한다. 물론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지만, 의견을 반영할 것인지 말 것인지, 반영한다면 언제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조차도 나의 몫이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교사의 일이 그건데 당연하지... 내가 갑자기 학생들과 완벽하게 평등해지겠다고 선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사로서 직무유기일 것이다. OO교육청이 나를 고용해 달마다 돈을 주는 것은 내가 이 권력을 적절하게 활용해서 학생들을 잘 교육시켰으면 하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시간표를 바꿀 것이고 숙제도 내줄 것이며 잘못된 행동을 하면 혼도 낼 것이다. 그러나 잊지는 않고 싶다. 교사는, 아무리 교육적 목적에 의한 것이고 선하게 활용된다고 해도,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 권력을 비교육적인 목적으로 잘못 활용한다고 해도, 그것이 학대의 선까지 나아가지 않는 이상 학생들은 어쩔 도리가 없다. 열아홉 살의 어느 날에 내가 문득 깨닫고 교사에 대한 마음을 걸어 잠갔던 것처럼.

나는 경력 7개월짜리 초짜 교사고,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은 일이 년만 지나면 한심하게 느껴질 풋내 나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어느새 해가 졌다- 황금 같은 일요일 저녁을 3학년 2반 교실에서 보내면서, 나는 묻지 않을 도리가 없다. 교사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나의 학생들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주지 말아야 할까. 나의 사랑을, 노력을, 전문성을, 서비스를, '감시와 처벌'을, 일요일 저녁의 고민을...... 지금으로부터 약 열두 시간이 지나면 학생들이 이 교실에 하나둘 들어올 것이고, 나는 지금 고민하는 것을 전부 잊은 채 평소처럼 수업도 하고 농담도 하고 어쩌면 자각하지 못한 채 권력을 잘못 휘두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어린이의 무른 마음에 손톱 자국을 낼지도-이미 냈는지도- 모른다. 두렵고 피로하다. 그러나 쉽게 편안해지지는 않기를, 내가 지금보다 경력을 좀 더 쌓은 후에도 답을 단정 짓지 않고 오래 고민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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