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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교단일기

211108 오늘의 일기

slowglow01 2021. 11. 8. 23:12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이미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비가 오면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완전히 녹아 버린다.
즐거움, 활력, 삶의 의지 같은 것들
안 그래도 내게 부족한 것들이 모조리 빗물에 씻겨 사라진다.
게다가 오늘은 생리 첫 날이었고
어제는 마음이 너무 우울하고 괴로워서 혼자 맥주 한 캔과 심술 3/4병을 혼자 비우고 잠들었다.
(당연하지, 생리 전날이고 비 오기 전날인데 우울할 수밖에. 인간의 자유의지란 없다 모든 것은 날씨와 호르몬이 결정한다.)

그리하여 비+생리+숙취의 트리플 디버프 콤보를 안고 출근하게 되었는데
심지어 오늘은 우리 학년 스포츠 데이였다.
코로나 때문에 대운동회를 못하게 되자 그럼 학년끼리라도 조촐하게 해보자 하고 만든 날이 스포츠 데이다.
3학년 전체래봤자 고작 서른여섯 명이서 하는 운동회인데도
우리 반 꼬맹이들은 지난 주부터 그렇게 기대를 했더랬다.
아무튼 이런 상태에 운동회까지 해야 한다니 두려웠지만
비랑 생리는 그렇다 쳐도 술 퍼마신 것은 명백히 내 업보이므로
컨디션 나쁜 티 내지 말고 열심히 하고 오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웬일
스포츠 데이는 예상 외로 너무 재미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옆반 선생님과 체육 선생님이 너무나도 노련하게 매끄럽게 착착 진행을 하셨기 때문에
나는 교사라기보다는 행사 보조...? 좀 나이 많은 반장...? 정도 역할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나랑 있을 때는 자유분방한 우리 반 학생들도 옆반쌤 체육쌤 말은 또 얼마나 착하게 잘 듣던지!
이것은 내 무능이 아니다 경력 차이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학생이었을 때는 운동회 체육대회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던 내가
교사가 되자 그런 걸 즐기게 되다니 이상한 일이다.
제기차기
4인5각경기
큰 공 튕기기
그리고 침묵 속에서 거리를 두고 간식 먹기
나는 밑천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절대 시범은 보이지 않으면서 이론적인 피드백만 남발했다. 발 안쪽으로 차야지. 공을 너무 높이 띄우지 마. 그리고 학생들과 같이 웃고 응원하고 기뻐했다. 야 이거 재밌구나. 아무래도 직접 경기를 안 나가도 되니까 재밌는 것 같지만.

더 크고 멋진 운동회를 할 수 있었다면
막 떠들면서 햄버거도 먹고
콩주머니도 터뜨리고
응원가도 목 터져라 부를 수 있었다면
다들 얼마나 더 좋아했을까?
아쉽고 속상했다.

그렇게 즐거운 스포츠 데이를 마치고
(이어달리기와 축구는 날씨 좋은 날에 하기로 했다)
학생들을 전부 하교시킨 뒤
그제서야 몸의 괴로움이 몰려왔다.
으어어어... 소리를 내며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는데
그전까지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게 신기했다.
인간 지연씨는 약하지만 김선생은 강하다...

그러나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도 비가 내릴 것을 생각하면 벌써 우울하다.
내일은 국어 <감동을 나타내요> 단원을 마무리하면서
다같이 교실 밖으로 나가 시를 쓸 계획이었단 말이다.
가을 햇볕도 쬐고, 낙엽도 줍고 국화꽃도 보고
완성한 시들은 곱게 모아서 <우리 반 시집>에 추가하려고 했단 말이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본 은행잎 나비도 접어 주려고 했는데
비가 다 망쳤다.
비가 그치면 너무 추워져서 나가기 어려워질 것이다.
하아아ㅠㅠㅠ

내일 1교시에 밖이 어두우면
교실 불 끄고 <밥 안 먹는 색시>나 읽어줘야겠다.
도서관에서 찾은 책인데 꽤나 섬뜩하다.
그나저나 시는 어떻게 써.
책상 다 밀고 교실 바닥에 누워서 쓸까.
휴...

아무튼 이제 괜찮은 글을 쓰려는 욕심을 좀 버리고
(괜찮은 인간이 아닌데 그런 글이 나올 리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기를 열심히 쓰기로 다짐했다는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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