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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2 첫 만남 본문
3월 2일. 작년에 이어 올해도 3학년 2반.
칠판에 감정카드를 잔뜩 붙여놓고 멋진 첫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 아침시간 내내 교실을 비우다시피 했다. 이따금 급하게 교실에 들르면 울망울망 수줍은 얼굴의 꼬마들이 어색하게 나를 흘끔거렸다. 키도 작고 손도 작고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목소리도 작다. 얼마 전까지 열한 살에 가까운 열 살과 지내다가, 오랜만에 아홉 살에 가까운 열 살을 보니 너무나 아기 같아서 새삼 놀라웠다. 아이들은 일 년 동안 정말 부지런히 자라는구나. 이제는 듬직한 4학년이 된 작년 학생들도 3월에는 이렇게 아기였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시업식을 마치고 선생님 소개로 1교시를 시작했다. 화면 가득 수수께끼 같은 낱말들을 띄워 놓고, 이것들이 무슨 뜻인지 맞춰 보라고 했다. '노래'는 무슨 뜻일까요? 선생님이 노래를 잘해요! 아니에요. 노래를 좋아해요! 아~ 선생님 노래 좋아해요. 그렇지만 아니에요. 저요! 선생님이 노래를 못해요! 정답! 선생님은 사실 엄청 음치예요. '2'는 여동생이 2명 있다는 뜻이며 '실과 바늘'은 취미가 뜨개질이라는 뜻이다. 가장 중요한 낱말은 '앗!'이다. 이 낱말은 일종의 선전포고이자 약관 동의 문구다. 너희의 새 담임은 하루에 네 번 "아 맞다!"를 말하고 여덟 번 실수하고 여섯 번의 임기응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야. 앞으로 일 년 내내 그럴 예정이니 선생님이 뭘 깜빡하면 너희가 얘기해줘야 해.
모든 낱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진짜? 가짜? 퀴즈까지 풀고 난 뒤 마지막으로 자유 질문 시간을 주었다. 몇 살이냐고 묻길래 작년처럼 이백 살이라고 대답했더니 작년과 똑같은 아~ 이십살이구나? 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진지한 얼굴로) 이십살 아니에요. 이십살은 선생님이 될 수 없어요.
그럼 삼십살!
(상처) 이백살이라니깐~
얼굴에 철판을 깔고 더 뻔뻔하게 우길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아이들은 그냥 웃고는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이 장난치고 있다는 걸 알지만, 같이 장난치기에는 아직 조금 수줍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너무 낯설어서 나는 마스크 안에서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작년 아이들은 첫날부터 이런 표정을 절대 보여주지 않았었다. 아 선생님 거짓말하지 말고 알려주세요~! 선생님 이백살이면 조선 시대에도 살아있었어요? 선생님 이백살인데 어떻게 아직 살아있어요? 선생님 그럼 우리 할머니보다도 나이 많아요? 수십 개의 질문 폭격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서 교직 경력 15분 차의 김교사는 제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었었다. 반면 올해 아이들은 고정적으로 손을 드는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용히 앉아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작년에 2학년을 맡았던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이 떠올랐다. 올해 선생님 반 학생들이 참 괜찮아요. 조용하고 에너지가 낮아요. 근데 좀 느려요. 보고 있으면 답답해 죽어(웃음). 그리고 좀 4차원인 학생들이 있어요.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 그 말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아주 작은 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어쩌면 올해... 조금 괜찮을지도?
2교시 <나만의 우주 만들기> 활동에서도, 내게 1초에 세 번씩 말을 거는 대신 자리에서 얌전히 꼬물꼬물 활동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교실을 돌아다니며 ㅇㅇ이는 피아노 그림을 골랐네? 피아노 치는 거 좋아해요? 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작은 소리로 네, 라고 대답했다. 심지어 특수학생마저도 혼자서 멋지게 활동지를 완성했다. 작년 특수학생은 첫날 바퀴 달린 옷걸이를 타고 교실을 질주했었다. 이때쯤부터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작년과 올해 중 어느 쪽이 유별난 것인가? 같은 동네, 같은 학교, 같은 학년 학생들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내가 자기들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작년 아이들이 우리 반을 찾아왔다. 나를 보려고 복도에서 펄쩍펄쩍 뛰는 머리통이 교실 창문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복도로 나와 보니 안녕하세요!! 하고 막 웃는다. 디디와 웃으면서 하이파이브를 했다. 도도는 나를 보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을 드는 시늉을 한다. 나만 보면 치는 장난이다. 으이그, 말썽쟁이들아... 너희가 날 잊어버려도 나는 너희를 계속 사랑할 거야. 그치만 4학년 선생님한테는 그러지 말렴...
3교시에는 우리 반의 가치를 정했다. 가치 낱말 여러 개를 제시하고 각각의 뜻을 알아본 뒤 투표로 세 가지를 정했는데, 가치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이 부족했던 것 같아 아쉽다. 아무튼 우리 반의 가치는 배려, 우정, 그리고 즐거움으로 정해졌다. 이 세 낱말을 하나로 줄일 수 없을까? 라고 물으니 아이들은 배우즐, 배즐정, 배거우... 하며 잠시 고민하더니 '배움정'이라는 꽤 예쁜 어감의 말을 만들어냈고, 그건 그대로 우리 반 인사가 됐다. 내가 배! 움! 정! 하고 한 글자씩 선창하면 아이들이 배려! 즐거움! 우정! 하고 따라 외친 뒤 인사를 한다.
4교시에는 하루 연습이라는 걸 했다. 아침시간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에는 뭘 해야 하는지 하루의 루틴을 알려주고 나서 전체를 두세 번 연습해 본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게임처럼 동작을 해보게 하니 아이들이 좋아한다. 일부러 긴급한 목소리로 자! 수업 시간 1분 전이다! 뭐부터 할까! 라고 외치면 후다닥 책상 치우는 동작,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내는 동작, 바른 자세로 앉는 동작을 순서대로 하는 것이다. 점심 시간이다! 후다닥!! 밥 먹는 동작! 양치하는 동작! 청소하는 동작! 알림장 쓰는 동작! 몸을 움직이니까 아이들이 신나해서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점심을 먹고, 5교시는 온통 알림장을 쓰는 데 보냈다. 학년 첫 날이라 안내장도 많고 전달사항도 많다. 첫날이라 또박또박 쓰려고 애쓴 글씨들이 귀엽다. 인사하기 전에 오늘 어땠어요? 라고 묻자 좋았어요, 재밌었어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러분이 그렇게 말해줘서 기뻐요. 선생님도 오늘 여러분과 함께한 첫날이 너무너무 즐거웠어요. 우리 앞으로 멋진 1년을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반은 진심이고 반은 소망을 담은 주문이다. 아이들의 좋았어요, 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서로의 이름을 외우고 비슷한 소망을 주고 받았다. 첫날이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예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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