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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교단일기

꽃씨를 심었다

slowglow01 2022. 5. 1. 17:19

때는 지난 3월의 일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교실 환경용품을 사라는 메시지가 날아왔는데
도무지 사고 싶은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원래 교실을 아기자기하게 꾸미는 성격은 못 되는 데다가
한 해 쓰고 버릴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굳이 늘리고 싶지 않았다.
꽃씨와 화분과 흙을 묶어 파는 세트를 주문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래 이것들은 적어도 산소는 만들어주겠지

4월 5일 식목일에 맞추어 꽃씨를 심었다.
싹은 언제 나냐는 아이들의 물음에 일주일 정도 기다리면 된다고 답하면서
나는 속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나도 식물 키우는 데는 재능이 없는데
싹이 안 나면 어떡하지
상처 입은 동심을 뭘로 수습하지
그냥 교장선생님 말씀대로 모종을 살 것을 그랬나(하지만 돈이 없었다)
아니 차라리 플라스틱 쓰레기를 살 걸...
아이들은 매일 아침마다 가장 먼저 창가로 달려가
자기 화분을 들여다보며 새싹을 기다렸고
나는 후회와 불안 가득한 마음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다음 주 월요일 아침
걱정을 안고 출근한 나를 첫 번째 새싹이 반겨주었다.
공교롭게도 특수학생의 화분이었다.
-선생님!! ㅇㅇ이 화분 싹 났어요!!!
-응.. 선생님도 알아...
(100번 반복)
-선생님, 그런데 제 건 아직 싹이 안 났어요~
-씨앗은 저마다 자기만의 속도가 있어. 기다리면 ㅁㅁ이 씨앗도 싹이 날 거예요..
(1000번 반복)
그 며칠 동안 그 학생은 우리 반 전부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하나씩 하나씩 새싹이 흙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주아주 작은 싹은 샤스타데이지
이파리가 길쭉한 것은 타레붓꽃, 동그란 것은 접시꽃
해바라기 싹은 벌써부터 나는 해바라기다!!! 라고 외치는 듯
큰 키를 자랑하며 해를 따라 기울어졌다.

아이들은 여전히 매일 아침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창가로 달려간다.
처음에는 선생님 지금 화분에 물 줘도 돼요? 라고 일일이 물어보더니
이제 알아서 흙을 만져보고 적당히 물을 줄 줄도 안다.
(물론 분무기로 칙칙 뿌리고는 만족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면 내가 방과후에 다시 준다.)
해바라기 싹에서는 이제 솜털이 보송보송한 본잎이 나기 시작했다.
-선생님!! 새싹에 털이 났어요!!
-야 ㅇㅇ이 화분에 싹 세 개 났어!!
창가에 오종종하게 모여있는 뒤통수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짠하다.

얘들아, 새싹이 신기하지?
매일 들여다봐도 반갑고 예쁘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조금씩 자라 있어 놀랍고 대견하지?
바로 너희가 그래 보이는 줄은 모르고

작은 것, 어여쁜 것, 연두빛인 것
둥글거나 길쭉하거나 깔쭉깔쭉한 것
풋풋한 젖은 흙 냄새가 나는 것
가늘고 연약한 것, 그러나 혼자 흙을 뚫고 올라와
햇빛 드는 쪽으로 온몸을 치받으며 열렬히 자라는 것

지난 주에는 지구의 날 수업을 했다.
지구라는 주제를 꺼내기만 했을 뿐인데 아이들은 이미
지구온난화, 오존층, 플라스틱 같은 이야기를 익숙하게 주워섬긴다.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에너지 아껴쓰기, 쓰레기 줍기, 실천 방법들도 이미 달달 외우고 있다.
한 아이는 마음공책에 지구에게 미안하다고 썼다.
문득 내가 이상한 수업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가 뭐가 미안하니. 지구를 이렇게 망가뜨린 건 어른들의 오만함과 거대 기업의 악독함인데
아이들의 잘못이라고는 이미 망가진 세상에 막 얕은 뿌리를 내린 것뿐인데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르고 소비에 지칠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고 감탄할 줄 모르고 슬퍼할 줄 모르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세상을 나쁜 쪽으로 굴러뜨리는 건 어른들인데
다 알고 있는 너희들이 교실에 앉아서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5월의 첫날
온 세상이 초록으로 가득이다.
키가 훌쩍 큰 해바라기 싹을 위해 나무젓가락으로 지지대를 만들어 주었다.
학기가 시작한지 두 달이 지난 지금, 솔직히 조금 지쳐 있지만
새로운 달이니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보자
꽃씨를 새로 심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
대가 없이 애틋해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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