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 교단일기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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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의 집중구호는 "사랑하는!" "우리 반!"이다. 임용시험 2차 수업 시연을 준비할 때부터 이 구호를 사용했다. 억지로라도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나는 사랑에 소질이 없다. 사랑해야 마땅한 이들도 잘 사랑하지 못했다. 그런데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을, 단지 내 학생들이란 이유만으로 어떻게 당장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나는 아이들을 마음으로 사랑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입으로라도 사랑하기로 했다. 매일매일 외치면서. 사랑하는! 우리 반! 사랑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3월 중순까지는 아이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랑하기에는 책임감과 고민이 너무 무거웠다. 그저 아이들을 원망하지 않는 데 마음의 힘을 다 쏟았다. 너희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내일이 두려워지지만, 절대 너희를 탓하지는 않..
2주 동안 일기를 쓰지 못한 것은, 회고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이런 말이 있는데, 나는 그동안 내 생활에서 한 발자국도 멀리 떨어지지 못하고 이번 시간에서 다음 시간으로, 하루에서 또 다음 하루로, 그저 발끝만 보며 건너가기 급급하며 지냈다. 어떤 순간은 행복했다. 어떤 순간은 괴로웠다. 어떤 하루는 괜찮았고 다른 하루는 피로했다. 한두 줄의 짧은 상념은 기록할 수 있었지만, 한 편의 글이 될 만큼 긴 호흡의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금 내 최대 관심사는 바로 다음 주 수업이다. 출퇴근을 편하게 하시려면 운전면허를 따셔야죠? 이 지역에서 계속 일할 건지, 아니면 공부를 다시 해서 내년에 고향으로 시험을 볼지 생각하셔야죠? 월급을 받기 시작했으니 돈 관리를..
이번 주는 빠르게 지나갔다. 퇴근 시간이 조금 당겨졌다. 6~7시쯤. 여전히 학교에서는 꼴찌 아니면 뒤에서 두 번째지만 적어도 관사에서 잠시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아서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를 읽고 있다. 미지로 가득 찬, 거대하고 적막한 외계의 원통을 탐험하며 시끌벅적한 교실에서 잠시 벗어나고 있다. 학교의 다른 선생님들은 아직 나를 걱정하시지만(하루는 교감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매일 야근하신다면서요. 걱정되니까 일찍 들어가세요..) 이제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괜찮다고 대답할 수 있다. 괜찮아요. 잘 적응하고 있어요. 이제 몰래 울음을 참지 않고, 매일 불안에 쫓기지도 않는다. 힘이 들어간 건지 빠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신 그 자리에는 고민이 ..
수요일 오후에 울면서 못 하겠다고 처음 생각한 이후로 내 마음은 가파른 '못하겠음'의 비탈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씻고 출근해야 하는데 하염없이 휴대폰만 바라보면서 괴로워하며 앉아 있었다. 저 진짜 학교 가기 싫어요. 못 가겠어요. 그래도 어쩌겠니, 니가 담임인데... 결국 유래 없는 대지각을 했는데 그게 오전 7시 40분이었다. 제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아시겠죠? 이렇게 고단한 데는 어쨌든 이유가 있을 터였는데 아이들 탓을 하는 것은 도저히 (아직까지는) 직업윤리가 허락하지 않았고 그럼 결국 내 탓이 되는 것이 괴로웠다. 우리 반 아이들이 다른 3학년에 비해 더 산만하고 말도 안 듣고 수업 태도도 안 좋은 것인지, 아니면 지극히 평범한 3학년들인데 그냥 내가 역량이 부족한 것인지 고민했지..
늘 그렇지만 고된 하루였다 아이들을 보내고 선생님들과 잠깐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간식을 얻어먹고 교실로 돌아와 퇴근 시간이 지날 때까지 아무 것도 안 하고 앉아 있다가 창문에서 안 보이게 의자를 돌려 놓고 조용히 울었다. 이것보다 더 열심히는 할 수 없어. 이미 최대치를 넘었단 말이야. 발령 받고 단 1분도 학교 생각 안 하고 마음 편히 있었던 적이 없어. 더 열심히는 못해. 더는 못하겠어. 내가 뭘 더 해야 하겠니! 라고도 생각했다가 그 생각은 지웠다. 아이들을 원망하게 되면 안 된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눈물을 그치고 다시 수업 준비를 하고 오늘도 밤 10시에 퇴근했다. 아주 늦은 저녁을 먹고 누웠다. 내일 아침에는 일단 엉망인 교탁을 치우고 아침 글쓰기 예시를 써 주고 어제 경고했는데도 또 친구를 ..
기싸움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기'라는 것을 전혀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명 살면서 여러 기싸움에 참전(?)도 해보고 지기도 이기기도 해봤겠지만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3월에는 아이들과 기싸움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겨요? 줄을 서지 않고, 절대 장난을 멈추지 않고,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졌나? 웃은 게 잘못일까? 존댓말이 잘못일까? 이미 져버려서 돌이킬 수 없는 걸까? 생각한다. 하지만 오래 정색하는 것은 내 성격이 아니다. 일단 얘네들은 너무 귀엽게 생겼다. 오늘 한 명이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렸는데 세모 입과 토끼 앞니 두 개가 너무 충격적으로 귀여워서 순간 마스크 올리라는 말도 까먹고 말았다. 말은 친절하게, 행동은 단호하게..
잠시도 바르게 앉아있지 못하고 틈만 나면 친구와 장난치려는 아이들과 대답도 잘하고 줄도 잘 서는 아이들 그리고 거의 말이 없는 아이들이 한 반에 있다. 수업 시간은 어렵다. 뭐든 하기 싫고 놀고만 싶다는 첫 번째 아이들을 구슬리고 나무라면서 집중시키는 동안 두 번째 아이들의 얼굴에는 수면 아래 짜증과 억울함이 비친다. 그리고 이 둘을 신경 쓰느라 마지막 아이들의 희미한 표정은 포착하기 너무나 어렵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이들을 거의 쳐다보지도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엄한 선생님이 되면 이 어수선함이 바로잡힐까? 더 꼼꼼해야 하나? 더 세심해야 하나? 아니면 가식을 덜고 더 나다운 선생님이 되어야 하나? 아직은 모든 게 어렵기만 하고 중요한 3월이 하루하루 지나간다는 조급함만 커진다. 쉬는 시간은 조금..
매일 조금씩이라도 교단일기를 쓰자고 다짐하면서 3월을 시작했는데, 처음 일주일 동안은 일기는 개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나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3학년 2반이라는 큰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던져지다가 익사하기 직전에 풀려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잠깐 행복했고, 가끔 뿌듯했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그저 끝없이 불안하고 조급했다. 화요일에는 교실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목요일에는 교실 한복판에서 울어 버리고 싶었다. 아이들이 집에 가고 나면 생각했다. 오늘은 또 어떤 실수를 했는지, 어떻게 해야 그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지, 나 때문에 학급이 붕괴되거나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내일은 또 어떻게 하루를 채워야 할지, 그리고 나는 올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