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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얘기

2022 독서 연말정산(1)

slowglow01 2022. 12. 25. 16:10

매년 이맘때면 그 해에 읽은 책을 정리하고 베스트를 꼽는다. 원래 완독한 책들만 정리하지만 올해는 책을 많이 안 읽었으므로(ㅠㅠ), 그리고 다들 알겠지만 정말 좋은 책을 완독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올해는 읽다 만 책들도 같이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언젠가의 누군가의 읽을 책 선정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다 읽은 책과 덜 읽은 책>
1. 외로운 도시(올리비아 랭)
겨울방학에 혼자 여수로 여행 가서 읽은 책. 너무 좋아서 독후감도 썼다. 이 책 진짜 짱이고 특히 예술/현대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꼭 읽어보길 바람. 나는 사실 별로 관심 없는데 그래도 좋았다!!

2. 내일을 위한 역사학 강의(김기봉)
예스24 중고서점에서 반값에 사온 책인데 처음에는 저자의 의견에 잘 납득이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지만 점차 재미있게 읽었던 책. 비전공자를 위한 쉽고 재미있는 역사학 대중교양서...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특히 신역사주의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소득이었고 이것은 그다음 독서로도 연결된다.

"권력은 단지 일상적 실천의 수준에서 작동되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고 근원적으로 일상적 행위의 수단들을 형성하는 관계자들과 어법들 그리고 세계관을 재생산하는 것에 달려 있다."
토머스 홀트, 1995년 미국 역사학회 회장 취임 연설


3. 틸리 서양철학사(프랭크 틸리)를 중간쯤까지 읽다가 그만두었다. 사실 고대철학에는 별 관심 없고 현대철학이 궁금했는데 현대까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대륙 합리론에서 나가떨어짐. 소위 철학 구몬이라고 불리는 전기가오리에서 이 책을 함께 읽는 모임을 열었길래 들어가볼까 했는데 이것도 바빠서 못 했다. 언젠가 읽겠지 뭐...


4. 관광객의 철학(아즈마 히로키) 역시 재미있게 읽었는데 2/3쯤 되는 지점에서 그만두었다. 왜 그랬지? 철학도 좋지만 이제 좀 현실적인 사례가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얼마 전에 (역시 읽다가 그만둔) <철학책 독서 모임(박동수)>에도 이 책이 소개되어서 다시 읽어보고 싶은데 이미 전자책 대여 기간이 다 끝났다. 역시 책은 사서 읽어야 해

5. 젊은 ADHD의 슬픔(정지음)
앉은 자리에서 한두 시간 만에 후루룩 다 읽은 책이다. 일단 글맛이 좋고, 저자가 소개하는 ADHD의 경험이 왠지 남의 것 같지 않았다. 나도 성인ADHD를 의심해본 적이 있다. 아마 아닐 것으로 마음 속으로 자가진단을 내렸지만, 여전히 보통 사람처럼 살아가는 건 쉽지 않다. 다양하고 정신없고 어쩌면 조금 이상한 우리가 좀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새해가 되길

이를테면 나는 덜 심각하고 웃어넘겨지는 식의 가벼운 느낌을 원했다. 나의 실수에서 파생된 사건들이 인스턴트 조크처럼 일회용이기를 바랐다.


6. 역사가 사라져갈 때(린 헌트, 조이스 애플비, 마거릿 제이컵)
이 책을 한두 줄로 설명하기에는 내 지식이 짧으니 대신 출판사의 책 소개를 빌려왔다.

"세계적인 사학자이며 현대 역사학의 최전선에 있는 린 헌트, 조이스 애플비, 마거릿 제이컵이 이 불확실한 시대에 새로운 역사의식을 제안한다. (...) 근현대 미국사가 쓰인 양상을 예시로 삼아 다양한 역사 방법론을 발생, 전개, 실패의 원인까지 통찰함으로써, 다양한 역사 서술 속에서도 역사적 진실을 보는 눈을 갖출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로 '역사적 진실'이 흔들리고 역사학의 근원이 위협받는 상황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서구/남성 중심 '지적 절대주의'와 새로운 학문적 사조의 지적 상대주의 사이에서 역사의 길을 찾고자 하는 책이다. 어려워 보이고 실제로 어렵다. 그치만 놀랍게도 진짜 끝내주게 재밌음... 단언하지 않고, '사이다'를 날리려고 하지 않고,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제3의 길-역사적 진실-을 이야기하는 세 (여성) 석학들의 학문적 태도가 특히 좋았다고 한다.

객관성은 순전한 의지력에 의해 도달된 어떤 입장이 아니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모든 경우에 자신들의 일상적 탐구를 수행하는 방식도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은 목적 지향적이고 규율에 따르는 지식 추구의 틀 속에서 사회적 이해관계, 이데올로기, 사회적 관습이 충돌한 산물이다. 시간 속에서 발견된 진리가, 언제나 기억과 역사 속에 보존되는 시간적 과정이 지식의 추구를 계속하도록 격려해준다.


7. 고전의 고전(강대진 외)은 북튜버 겨울서점의 추천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흔히 문사철이라고 묶어 부르는 문학, 역사, 철학의 고전 작품 10편을 국내 연구자들이 해설해주는 책. 친절하고 재미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읽으면서 좀 서글펐다. 왜냐면 난 작년에 분명 강유원의 <문학고전강의>와 <역사고전강의>를 읽었는데 이 책에서 다시 만나니 전부 초면인 것이다. 읽고 까먹고 다시 읽기를 약 20년째 반복하고 있다...
특히 일리아스에 대한 해설이 재미있었고, 잘 읽다가 아리스토텔레스 부분에서 지루해져서(고대철학에 관심 없다니깐요ㅠㅠ) 80퍼센트쯤 읽은 채로 덮어두고 말았다. 그래도 추천함ㅋㅋㅋ

8. 한 권으로 읽는 문학이론(올리버 지몬스) 역시 80퍼센트쯤 읽고 그만두었지만 사실 이해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30퍼센트가 채 안 될 지도 모른다. 어쩌면 20퍼센트도 안 될 지도... 귀엽게 생긴 주제에 무지하게 어려운 책이고 읽는 내내 '뭔 소리야..?' 싶었지만 그럼에도 내게 이 책은 올해의 책이다. 바르트와 라캉을 비롯한 프랑스 철학자들을 향한 관심이 이 책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꾸 기표니 기의니 하면서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장난 같은 소리만 하고 있는데 사실 나는 말장난도 좋아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9. 기억의 에티카(다카하시 데쓰야)는 서점에 놀러갔다가 자꾸 눈에 밟혀서 데려온 책이다. 전쟁, 국가폭력, 홀로코스트, 이해할 수 없고 이야기할 수 없는 폭력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아렌트, 헤겔, 레비나스 등의 철학자와 함께 논의하는 책으로, 영화 <쇼아> 등의 매체와 2차대전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다루고 있다. 무척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읽었는데 마지막 장에서 논의하는 일본 교토학파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서 그만두었다. 그치만 나는 사실상 다 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크고 작은 온갖 쇼아가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무수한 재난, 무수한 '절멸'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세계의 대속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의 상처, 정신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세계의 대속이 있다고, 정신의 상처가 치유된다고 믿는 것은 죽음(죽은 자들)의 기억을 망각할 때에만 가능하다.


10. 오벨리스크의 문(N.K.제미신) + 석조 하늘(N.K.제미신)
처음으로 나온 소설. 3권 모두 휴고 상을 수상한 전설적인 기록으로 유명한 N.K.제미신의 sf 3부작 <부서진 대지> 시리즈의 2편과 3편이다. 읽는 내내 속으로 오타쿠처럼 울부짖었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오타쿠의 울부짖음처럼 들릴까봐 뭐라고 소개를 못 하겠다. 흑흑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냐고요... 문학의 미래 sf의 미래 오타쿠의 미래가 전부 이 시리즈에 있는데... N.K.제미신은 2020년대를 구원하러 지상에 내려온 에셒의 신입니다...

11.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우치다 타츠루)
구조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찾아 읽게 된 책. 나는 출판사의 '한 권으로 읽는', '쉽게 읽는' 같은 문구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데(당장 8번만 봐도ㅋㅋㅋ) 이 책은 놀랍게도 정말로 쉽고 또 재미있다. 게다가 얇음! 인문학 책에서 정말 보기 드문 귀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서양철학 전반에 대한 입문서는 많지만 그중 구조주의에 대한 입문서는 찾기 쉽지 않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2. 현대의 신화(롤랑 바르트)
사실 이 책을 주문하면서도 다 읽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표지를 보세요) 예상 외로 진짜... 재밌다. 본격적으로 기표와 기의를 운운하는 2부는 좀 어려울지 몰라도(난 이 부분도 좋았음) 1950년대 프랑스의 대중문화를 분석하는 1부는 2020년대의 한국인에게도 친숙하고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많다. 이 책을 읽은 뒤로 주위에서 어떤 문화적 현상을 보면 '신화적'으로 분석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분명 한국의 문화연구자들도 이런 주제로 논문이든 책이든 많이 썼을텐데 내 검색 능력으로는 닿지가 않는다. 추천... 받아요...ㅠㅠ

부르주아 계급은 뿌리 깊은 위상을 조금도 갖지 못하는, 그리고 상상세계, 즉 고착된 의식과 빈약해진 의식 속에서만 단지 그 위상을 체험할 수 있는 인류 전체를 자신의 이데올로기 속으로 끊임없이 흡수한다. 프티부르주아용 집단 이미지 목록을 통해 자신의 표상들을 퍼뜨림으로써, 부르주아 계급은 사회계급이 분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환상을 확립한다.


13.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미야구치 코지)
전에 인스타에 써놓은 글을 그대로 옮긴다.

"짧고 강력하며 몹시 실용적이다. 교사라면 읽으면서 반드시 한 명 이상의 '금쪽이'의 사례가 떠오를 것이고... 경계선 지능 아이들이 어떤 어려움과 위험에 처해 있는지, 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그리고 기존의 지도/교정 시도가 얼마나 효용 없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책이다. 나는 우리 반 학생 세 명 정도를 떠올리며 읽었고... 작고 얇은 책이니 그냥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혹시 나 만날 일 있으면 내가 빌려줄 수도 있음... 말만 하세용..."

14. 스패로(메리 도리아 러셀)
인류학자 출신이자 가톨릭 신자인 작가가 sf를 쓰면 어떤 소설이 나오는가? 지루한 구석도 있고 기묘한 구석도 있고 좀 떨떠름한 구석도 있지만 무척 흥미롭고 인상적인 것만은 분명한 <스패로>가 탄생한다. 영적인 동시에 인류학적인, 이상하고 독특한 매력을 가진 sf. 그리고 다 읽으면 좀 멘탈 털림...

15.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철학아카데미)
사르트르부터 알랭 바디우까지, 12명의 프랑스 현대철학자의 이론을 국내 연구자들이 소개하는 책. 거의 대학 한 학기 교양수업에 필적하는 양의 지식이 들어 있다. 내가 궁금했던, 필요했던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만날 수 있어 기뻤다. 그치만 아까도 한 얘기지만... 책의 난이도가 '처음 읽는'이라는 말에 별로 적절하지는 않음... 인문학 하는 인간들이여 당신들은 대중을 좀 과소평가할 필요가 있다...


절반 좀 넘게 썼는데 힘들다... 나머지는 2편에서 정리해야지 설마 올해가 가기 전에는 2편을 쓰겠지..? 아무튼 모두들 즐거운 연말 보내요~ 2편에서 만나요~

이렇게 많이 읽었는데 왜 아직도 안 읽은 책들이...

2편: https://slowglow01.tistory.com/m/104